용돈생활자의 삶. 스물여섯에 삼십 만원을 타서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간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취미생활과 기호식품, 교통비 정도를 쓰는 것이다. 언제까지 나는 이런 생활을 해야 하나. 이런 유의 삶을 지난하다고 한다면 마땅한 형용사를 활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생활의 저변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깔려있다. 그야말로 진중한 고독이다. 이제는 서먹하지 않은 감정이다. 인간이 감성에 따라 행동하는지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만일 그러그러한 감성을 느끼면, 인간의 의식은 그 감정의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이성에 대해서는, 감성적 편린들을 거부하는 형태를 띠는 이성의 화살은 우리 생의 방향성을 이끄는 배의 선장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성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감성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감성이 사태이고 이성이 사유라면, 당연지사 이성을 설계하는 것은 감성이겠지만, 역으로 이성 역시 감성을 설계하는 것이다. 어쩌면 서른부터는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 이성이 감성을 내포할 것이다. 하지만 감성에는 표현의 문제가 있다. 이성은 감성의 폭을 외면적인 차원, 현상학적 차원인 나타남에 있어서는 폭을 늘리거나 줄인다(과장과 소침). 이리하여 이성의 질적 차원에 대해 살펴보자면, 피상적이고 즉흥적인 이성은 임기응변이거나 패턴적인 행동구조에 가깝고,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이성은 지혜이다. 하지만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 아니 의식이라는 구조적 인식의 종합적 장이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논필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부딪기며 살아가거나 반면 혼자서 독고 한다 해도, 상처는 남는 것이고 세월은 역마살이 종말을 맞은 것처럼 한 공간에 머무른다.
우리의 생은 개별적인 것이고 존재자로서 지남하는 바는 타자의 외부에 있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타자이다. 이 나무, 저 사람, 심지어 친구나 가족까지도 결국에는 파경에 이르거나 사별할 운명이다. 그리고 나 역시 죽을 운명을 타고났다. 즉 동일자인 나는 오로지 산다는 것(과정)에만 의지해야 한다.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로소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섞여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분명 안도의 순간일 것이다. 마침내 동일자와 타자는 과정으로서의 생과 어우러져 천천히 부드럽게 녹아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한갓 유행이 아닌 연대관계가 상징하는 철학 같은 것이다. 오직 시대정신만이 혼자라는 것에서 자유롭거니와 고독에서 해방시켜 준다.
창가를 바라본다. 점멸하는 햇살의 점묘. 나는 항상 바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좋아한다. 타성에 젖은 사람의 무리, 그들을 역겹게 생각하는 나와 동시에 역겨움을 지긋이 응시해야 하는 나 사이, 그러니까 그들이 역겹다는 사실을 주조한 나라는 기조와, 내가 안고 있는 역겨움의 기조 사이, 이러한 이중화된 이면들의 양극화된 간극, 이것이 바로 후설이 주장한 ‘의식의 현상학’적 차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러한 무의미한 것과, 내가 문예와 철학 즉 언어라는 숭고한 신비에 대해 말하자면 이러한 유의미한 것 사이를 가로지르는 청명한 햇살과도 같은 생각의 질주를 존재자의 인식론적 이유인 코기토(cogito)와 등가적인 것으로 ‘반성적인 규정’을 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어떤 환멸적인 상황에 빠질 때면, 나는 인위적인 생각의 전환을 모색했다. 그러나 만일 ‘사물 자체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 밖에서 사물의 변화를 논한다’면, 이를테면 부정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사고하자!’는 외침을 자기에게 전가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거나 그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즉슨 코기토라는 데카르트적 인식은 현상학에 있어 ‘과녁의 정 가운데를 겨냥’하는 것이다. 반면 사물 그자체를 향하는 방법론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적과 다른 결과의 진행)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아도르노(부정변증법)적 데리다(해체론)의 능선을 타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상학적 층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층위가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으로 환원되어 일심동체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해는 점차 서쪽으로 기울면서 사영(射影, 수학적인 의미)을 그리고 있다. 모든 형태와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원본의 모사에 매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적인 질서의 구획을 잡기. 과연 언어가 그자체로 의미가 있을까? 언어가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은, 각각의 낱말과 문법의 구조적 차이를 구성하는 ‘논리적 질서’가 심급으로서 대상화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가령 지시체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낱말이 그 의미론적 특성을 지시해야한다면 주변 모든 것(전체)과의 차이적 연결 즉 차연에 의거하는 것, 이른바 그러한 복잡미묘한 논리적 특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 아도르노가 말했듯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그 대상을 둘러싼 주변을 정확히 포착하면서부터, 말하자면 전체적 배경을 탐색하면서부터, 겨냥하고 있는 사물(대상, 인과-과정과 결과+작용과 반작용, 객관적-물리적 물物, 존재자, 인식으로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구체적인 인식은 태산명동서일필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음미한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 그 순수한 개별자만을 단독으로 놓고서 관찰하기에는 불가능하다. 하여, 앞서 말한 ‘논리적 질서’란 전체를 매개한 차연의 요해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 개인의 생도 개별적으로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전체와의(세계, 특히 공동체와의) 매개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의 전체성과 매개의 개념이,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의 개념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의 개념이 한 개체의 기투의 과정의 근간을 관류하고 있음을 이론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말이지 세계와 삶의 문법에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종속에 유한한 이상 ‘논리적인 질서’는 우리가 이해파악하지 못했을 뿐이지 도처에서 마치 신처럼 대변되며 일련의 개체적 한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물리적인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체 이상으로 방사선처럼 뻗어나갈 수 없는 ‘개체적 지’의 한계이다. 하나의 사실은 그 어떤 위대한 사유도 개체적인 지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한 개체가 다다를 수 있는 정신이 과연 무한할까? 그리고 우리가 공통개념에서 사유의 기반을 건설하는 이상, 그리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장이라는 사실에 의거하여, 의사소통의 문헌학인 학문의 세계에서 볼 경우, 물론 한 지식인이 이를 계승해 발전시켜 자신의 이론을 개설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지적 징검다리이자 기념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주의의 입장을 좀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별적 주체의 극한의 기투는 전적으로 지적 교착상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문이라는 공통개념의 파노라마, 이른바 정신적 의사소통의 장의 가외에 있는 것으로 비롯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범위도 어떤 개인적-사회적 범위 즉 인류적 범위 이상으로 도약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기나긴 질곡을 가진 연속성적 역사성의 인식론적 중핵인 인류적 지, 이른바 유적 지다. 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역사의 시간성에 밀려들어가면서 시간의 상속자에, 그런 반면 시대적 가지성에 유폐된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학문의 실증주의적 역사성 즉 학문의 문명적 특성에 대립되는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개별자적 가지성의 한계이다. 전자는 통시적인, 후자는 공시적인 존재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최소한 인류가 담보하는 전체이고, 나아가 주체적으로 거대하면서 장대한 인식자인 인류의 지성은 실증주의가 빚은 명확한 증명의 총체, 즉 인류역사가 구성하는 진보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 모든 것이 쌓여간다는 생각에 우리가 율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상 이상으로 거시적이다. 하지만 나라는 개체는 여전히 시대적 시간성에 괄호치기 되어있다.
양주에서 보낸 7년, 그리 좋은 삶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하지만 언젠가는 알려야 할 것이고 내 삶의 도정에 뚜렷한 질료가 될 것이다. 아마도 회구해보자면, 이 어두운 곳에 들어와서 나는 많은 젊은 패기와 한을 품었던 것 같다. 이 대자연에서 나는 나의 운명 속에서 자유의지란 나의 지식과 사유 말하자면 정체성 같은 것이고 항상 자기극복과 초월을 통해 비록 관념적인 삶을 살았지만, 내 삶의 특이한 궤적은 그것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생이 길다고 생각한다. 무척이나 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인간이 늙는다면 인간은 인생의 여분을 사는 것이다. 그는 기능적이고 무의미한 인물로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젊었을 때, 즉 청년기라는 정상에 있을 때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기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도의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말은 단순히 글자 그대로를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술도 포함되고 재능도 함의하고 있고, 이런 개념들에는 ‘본질을 산다’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젊었을 때로 한정된다. 여분의 늙은 삶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오로지 정상에서 달리는 삶(정상이라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열정이 가장 큰 시기를 말한다)을 꿈꿔야 한다.
날이 저물고, 나는 약 봉지에서 원형으로 된 자이프렉사 10mg를 꽁초 담는 통에 던져, 녹여 없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