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나와 곧바로 카페로 가는 길로 직진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나는 문인의 자질도 없고, 그렇다고 학자의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뜨내기로 살아가는 게 최상의 삶 아닐까 그런 까닭 있는 생각을 하고 있다. 뜨내기, 얼간이, 비애에 젖은 부모한테 얹혀사는 찌질이 같은 것. 물론 부모한테 얹혀사는 걸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수입이 있다면 그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아프다는 구실로 기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도리가 없어 사실상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단지 운명 때문이다. 지저분한 운명, 말하자면 불쌍한 한 가닥 인생인 것이다. 한량이 될 배포도 없고, 말하자면 히키코모리인가? 변화하는 성질의 대상을 예로 들자면, 변화해야 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이다. 만일 내가 현실을 바꾸는 힘이 부족하다면 약이라도 천천히 끊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이프렉사10mg : 항정신병제”를 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금단증상은 어쩔 수 없다. 견딜 수밖에. 그러나 이 행위가 가장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마치 밤에 각성제를 먹은 듯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그럴 테밖에. 왜냐하면 거짓 4년 반을 밤마다 먹어온 약이니. 그나마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감사해야 한다. 끊자마자 발작에 시달리는 현상 같은 건 없으니까. 단지 1달 동안 정신 과잉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한 6개월까지는 사회공포증이 있을 수도 있다. 혈압이 올라가 안압이나 뒷골이 아플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예비용으로 혈압약을 먹거나 타이레놀을 먹을 수밖에. 그리고 잠이 안 오는 것은 수면제를 3알정도 자기 전에 먹는 걸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박힌 칼날을 뽑고 지혈까지 해서 순리를 찾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이것이 바로 양약의 무서운 점이다. 양약은 일단 끊으면 강한 금단증상이 1개월은 간다. 양약이 효과는 좋지만 단점도 찾으려면 수두룩하다. 서양의 것이라고 무조건 숭배하면 결국 나쁜 것까지 숭배하는 짝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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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을 추(秋)자를 써서 영검한 기운을 풍기며 돌아오는 명절. 내가 산사를 찾은 이유 중 하나는 조상의 죄가 만든 업에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부처에게 내가 모를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귀신들의 원한에 성불을 비는 것이었다. 향불을 피우고, 경을 외우며 청신한 마음으로 108배를 하고, 의연한 정신으로 마지막에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내 업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석가의 뜻한 바라면, 이는 조금이나마 이루어질 것이고, 그로인해 내 마음은 좀더 편해질 것이다. 마음만 편해진다면 현실이 그리 괴로우랴? 불가가 관념론의 절정이라고 떠들어대는 무리들이 있다지만 이것은 철학학파의 하나가 아니라 사적(史蹟)인 종교이다. 그 기원은 무려 2500년이 넘어간다. 그리고 이 시간의 숨결에 무수한 철학적 천재라 할 고승들이 매달려 있다. 이 길이는 서구철학의 역사와도, 예수의 탄생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석가 이전의 무수하게 진리에 대해 탐구하던 인도철학자들까지 합친다면, 이는 서구철학과 유대교의 역사와 맞먹는 시간의 길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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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어가면서 사색에 잠긴다. 하이데거가 걸었던 이 숲길과 이곳에 대한 발걸음. 그러나 내 생각은 좀더 현실적(세속적)이다. 나는 향정신성 약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각성제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내가 만일 성인adhd라면 나는 각성제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주치의인 교수는 내가 성인adhd는 아니라고 한다. 그나마 내가 위안이 되는 건 이미 각성제를 최고용량으로 먹어보았다는 것과, 각성제가 내게 심어준 젊음의 열정적인 기분과, 그 약을 자세하게 안다는 사실이며 다시 한 번 다른 의사에게 가는 건 어떤지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점의 황홀함을 사랑하고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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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다시 한 번 늙은 나이에 대학에 도전해야 된다는 것, 이 세 가지가 내게 압력이다. 내 발걸음은 사뭇 빨라진다. 의식을 찾으니 이미 카페 앞이다. 내게 이 세 가지 발로는 강박증의 증세처럼 다가온다. 왜 내가 이런 강박증을 갖게 되었는지는 독자들도 알 터이다. 왜냐하면 나는 양주에서 보낸 칠 년을 오로지 학문과 글쓰기에 대한 전념의 세월로 탕진해버리고 이제 갈 길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그것이다. 비록 슬럼프는 극복했다손 치더라도 내 자아는 결박당해 있다. 나는 사색의 만화경 같은 세계에 빠지지 못한지도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시나브로 쓸쓸해지는 삶에 당도한다. 카페 겔러리아에서 진한 커피나 마실 도리밖에.
가을하늘의 푸름은 언제나 유년의 색채와 함께한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았지만 한 발 한 발의 인식이 신비스러운 감동과 순간적인 생의 약동으로 가득 차 있고, 희망 혹은 순수한 욕망이 끓어 넘치듯 메뚜기처럼 뛰어오르려는 것 하며. 그 어떤 개인이 자신의 유년이 자신을 주조하는 근본이라는 점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한 작가에게 있어 유년에 대한 인식은 성년이 된 자기 자신으로서는 벅찰 정도로 강렬한 세계에 대한 영감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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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인문학이라거나 글쓰기, 사색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이런 것들이 관념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똑같은 행위를 하고 똑같은 유의 관념론적 해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혼자서 부유하는 관념일 것이고 공통된 개념의 총체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관념에 대한 것들, 예술이나 학문적인 것들이 쓸모는커녕 한 개인이 인식하기조차 힘든 언어유희적인 것들(어떻게든 실체에 다가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평생에 걸쳐 이것을 탁마하는 정신의 장인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을 지독하게 훈련시키고 있다는 걸 자신이 아는 순간, 그들은 단지 학문을, 철학을 그것의 도구를 통해 일련의 기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인식하기도 어렵게 줄기차게 난해한 글들이 매우 조그마한 의미(sinn)만을 담고 있다고 해서 그 글의 정당성마저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후설은? 하이데거는? 사르트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는 좀더 지시체의 길이가 그 자체로 의미를 초월하는 기표예술을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음악과 회화가 그 음계적 기교와 추상적 시도로써 무한한 독특성을 일종의 예술성으로 인정받듯이 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이 달을 능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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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학계에서 범주론적으로 구분해놓은 공통적 개념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관념의 세계의 눈금을 맞추어야한다면, 즉 그런 정론적 체계 안에 자신의 정신적 규격을 밀어 넣는다면, 그것이 지에 대한 정확한 시도요, 인문학적인 시도라 할 것인가? 이렇듯 인문학은 지극히 규범적인 의사소통의 장이면서도 그 장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이런 장성(場性)과 장외성(場外性)의 종합, 보편성과 개별성의 종합이야말로 현대철학이 추구하는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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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하고 비근한 생, 나는 따분하고 지리멸렬한 현실에 역겨움을 느꼈다. 계속되는 삶에 대한 구역질. 부정이 그자체로 부정이 될 수 있는 것, “순수 부정”으로서의 생, 그것 또한 철학자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방정식이었다. 왜곡되고 굴절된 삶을 더 비틀 수 있는 것, 부정조차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적인 태도. 저항과 투쟁, 곧 잉크의 멈추지 않는 분사. 나는 철학책을 읽을 때 한 번은 곧이곧대로 그것을 읽고, 이윽고 그것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철학에서는 비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비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키운다. 좀더 멀리 다다르는 것, 정신편력과 정신방랑 그리고 생각과 그대로 일치하는 나의 글쓰기, 이른바 비판은 하나의 도정적 기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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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로 글쓰기 곧 사유의 호흡을 맞추기, 즉흥성을 관통하는 즉흥성, 작위를 통한 사유. 나는 결코 고매한 사람이 아니다. 나의 실존은 실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속을 배제하려는 세속성으로 인해 발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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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추석, 나는 이 시간에도 자유를 위해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