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현대사상의 모험 13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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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무위에 대한 유위의 우위

 

현대는 유위적 지향의 삶의 연속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무위에 대한 반동을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상성에 대한 근거와 향유가 도처에 근대화로 인해 은폐되어 있으며, 그 어떠한 동양철학에 의거한 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계속된 동시화의 산업구조 속에서 한 개인의 여유로운 무위에 대한 정신적 풍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처에서 소유와 재능, 세속적인 욕망과 서구 아카데미즘이 시원인 쓰기와 덮어쓰기의 과정의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진보 다음에는 또 다른 진보가 있다. 모든 세상의 제요소가 변증법적 과정 아래서 자라나고 있다. 무위와 여유에서 비롯하는 보다 창의적인 생각은 노동시간의 증가라는 유행의 급물살로 말미암아 뿌리 채 뽑히고, 피상적으로만 다원화를 주장하는 사회의 패러다임의 이래, 사회라는 이름의 상속과 증여의 역사는 새로운 경제공황과 맞물려 변증법적 유물론의 부활을 지시하고 있다.

 

 

황무지의 역설적인 풍요는 현대사회가 신자유주의로 개명됨에 따라 완전히 사망했다. 세계는 유를 위한 유로 점철되었다. 좀더 많은 소유를 위해, 미시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단지 거기 있는 강박적인 노력으로써의 재능으로 인해,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이 곧 역사의 운동, 즉 역사학이라는 시각으로만 인지하게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삶으로서만, 결과가 시작이 되는 변증법의 무한한 운동에 반쯤 넋이 나가 더 이상 쉼터와 같은 자연, 스스로 그러함의 세계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유위를 이끌어내는 커피는 술보다 더 현대를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기호식품이 되었으며, 더 이상 찍어내기 불가한 달러와 중국 인건비의 상승의 이중적 사실은, 인플레이션이 곧 계급투쟁의 반발로 이어지는 스프링운동(더 이상 눌릴 수 없게 되면 튀어 오르는)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것과 다르게 사회적 투쟁은 개인의 발전에 의지하게 되었으니 유위적인 것이 곧 목적이 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하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이 유위, 그렇다면 개인적인 것이 유위적 이익을 위해 허구와 가상의 한시적인 연대로 구축되는 사회적 구조를 우리는 미리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집단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1. 연대와 구조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결국 비항구적인 연대, 유동적이고 이해관계에 따라 쉽사리 부서질 수 있는 연대에 들어간다는 걸 뜻한다.연대에 있어 부차적인 것은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휴머니즘, 그것도 계급으로 말미암는 수직적인 피드백의 휴머니즘이다. 사회는 언제나 계약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다원적인 사회를 직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의 담합, 무수한 커넥션이 사회구조를 상정한다. 하기야 사회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전세계적 사회라는 것, 궁극적으로 자본이 원천이 되어 규제되고 개방되는, 즉 끊임없이 상호순환하고 변양하는 이 사회 전체가 바로 우리가 구성하는 물리적-관념적 의사소통의 장이다. 그 질서의 규칙은 역사가 대변하는 권력과 부의 상속과 증여에서 비롯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가문이 지시하는 상속의 역사다. 이 구조적인 사회의 공시성, 이른바 너무 복잡한 것 같지만 일견 모든 역사의 제요소가 일률적인 하나의 관점에서 논리적 연역의 발로에서 규정되는 하나에서, 이 일자의 역사적 가지성의 질서에서, 이미 죽었거나 현존하는 개인들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탄생에서부터 착취하거나 피착취하는 사회인으로 규정된다. 언제 어디서나 권력과 부의 피라미드는 역사적으로 변동 없이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비로소 한 개인의 탄생이 곧 일자라고 잠칭할 수 있는 사회와의 계약-신과의 계약-이 구성하는 역사 속에서 진정되었다. 우리는 사회가 보여주는 파노라마와 유행하는 패러다임에 의거한 현실태에 부닥뜨린 것이다(가능성은 죽어있다).

 

 

정치경제학은 현상학에 의거한다. 결국 배후의 문제도 규명된다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계의 원리 아닌가. 절대로 이원론적인 요소가 진리의 자명한 일원론성을 가릴 수 없다. 그 어떤 복잡한 사회라는 현상계도 결국 보여줄 수 있는 선형적인 문장과 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는 곧 역사이다. 사회의 구조성(공시성)과 역사성(통시성)은 상호주관적 개방성으로서 나선형의 형태로 시나브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침내 현상이라는 반성적 규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모든 실천적인 형태는 이론학의 규명 속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론학은 의사소통의 최고도의 장인 학계에 의해 변양의 궤적을 그린다. 이리하여 이론과 실천의 순환 역시 변증법의 원리로 말미암아 자신의 유위적 진보를 보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원론의 정상에 서 있는 현상학과 변증법, 그리고 양자의 동적 관계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좀더 앞으로 나아가자.

 

 

2. 연대와 구조2 : 현상학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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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의식, 병렬적으로 나열된 의식들의 변주, 그 순간에 행복도 불행도 없이 하나 됨을 느끼지 못한다. 단순한 이인증인가 지적도약의 새로운 계기인가, 그런 유들을 우리는 아직 파악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해 현상학은 단 하나의 규범을 제시한다. 바로 사태 그자체에 의식의 감압 없이, 그러니까 어떠한 편견의 제약 없이 오로지 사태(사실)에 대해 순수함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걸 뜻한다. 여기에는 의식의 파노라마가 규정하는 임의의 인과나 전제된 명제의 색안경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미묘하게나마 정초의 잣대는 내포되어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믿음에서 기약되는 것이거니와 항상성을 가지며 현상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그러니 본디 이 정초 역시 현상에 원본적인 의식인 것이다. 이를 필증적 명증성이라고 한다. 그런즉슨 우리가 사유하는 것이, 나아가 사유와 사태의 일치, 이는 이른바 충전적 명증성이고, 그리고 양자가 결합할 때 즉 이러한 일치의 당위가 이른바 순수현상학이라는 독보적이고 특칭적인 철학이 주장하는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 역시 세계의 해명에 거반의 역량을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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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상호작용에서 연대가 특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기야 세계의 구조는 사회의 구조이고, 사회의 건설은 역사성이라는 직선적 시간성에서 현전하는 것이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통시, 사회가 역사라는 명제는 보편타당하며, 동류에서 동류로 이행하듯 명석판명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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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모종의 계약으로 말미암는 이익집단이다. 즉 이익의 깃발 아래 한 곳으로 집결한 표명결사대이다. 그러나 사회의 배후에는 정식적인 것이 아닌 비밀결사도 부르주아의 담합을 위시해 은밀하게 맺어진다. 바로 이것이 사회 제반 구조를 개설하는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대를 표명결사의 층위와 비밀결사의 층위로 나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나는 사물들은 전자이고, 암흑에 둘러싸인 가장 사악한 세력들은 막후에서, 즉 빙산 밑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며 기생할 생각으로 온갖 작전을 동원하고 있는 후자다. 이로써 전자든 후자든 현상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이 관점이 바로 사회가 은폐하는 부조리이다. 다시 강해하자면, 보이지 않는 미시적 배후, 이것들까지 전체성으로 투시하여 일련의 현상학으로 나타내는 것, 이는 이른바 현상학이 사회과학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문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현상학적 관점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초에 은밀하게 가담하면서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궁극적인 전체를 과학적 인식론으로 해설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특수성으로 있다. 보편성이라는 휴머니즘적 정신은 더 이상 사회의 해악 아래 숨구멍조차도 막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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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대와 구조3 : 언어로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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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물들을 설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는 퍼즐을 찾고 직조하는 게임과 같다. 하지만 어떤 유의 설명으로 이론은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할까? 되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 적은 주제를 수많은 언어로 논하는 것, 이것이 아주 완전한 방법적 시도일 것이다. 결국 쓸 수 있는 한 가지 주제를 엄청나게 다종다양한 언어로 해명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은근히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바 이런 방식이야말로 모든 철학책이 시도했던 시나리오의 방법일 것이다. 좌우지간 방법에 대한 문제가 직접적으로 이론가에게 돌직구로 날아든다. 해명할 수 있는 문제는 더욱더 언어의 미로에 빠진다. 단말마. 쓴다는 것에서 희를 찾지 못하면 그 죽음과 가까운 고뇌와 대면해야 한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것, 이러한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쓴다는 것의 핵심은 잘 쓴다는 게아니라 그냥 쓰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자신을 위해 쓰는것이다. 하지만 결국 잘 쓰는 것 자체가 자기완성의 길목에 있다면 그냥 주구장창 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그리고 쓴다는 것에 더욱 더 쾌락을 느끼길 원한다면, 끝도 없는 지식과 문예와 미학에 대한 탁월한 고찰, 그리고 궁극적으로 스타일, 그러니까 글쓰기의 자기개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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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계속해서 말해져야 한다. 말과 말이 맞물려 더 장대한 말이 되어야 한다. 즉 말과 말의 교미는 새로운 말의 변태를 가져와야 한다. 이것은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말의 변증법적 개념으로 향한다. 그러나 단순히 회포를 푸는 말, 마냥 하는 말은 광인의 수다처럼 무의미할 것이다. 문예이든 철학이든 말은, 언어는 표상을 넘어선 궁극적인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에크리튀르라는 중심개념으로 자신의 이론을 밀고 나갔던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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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는 언어도단이란 없다. 말해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다. 단지 규범적인 형식이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해서 도를 지나친 글들이 책으로 엮여도 인정을 받지 못할 뿐이다. 사실상 순문예와 학문성이 인문학의 세계를 당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론의 방법론적 문제는 이념적인 것을 규범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데에 그 발로가, 닦달음하는 출발이 있는 것이다.

 

 

괴로운 불안, 그리고 이와 함께 달리는 글쓰기. 어떤 주제의식도 화두도 없이, 아니 만약 이 산문에 화두란 게 있다면 나의 방향의식을 중심으로 달리는 관념론적 이론학에 가까울 것이다. 이론이라는 것은 어원상 다른 것을 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내 산문을 논급의 형식으로 쓴다면 이는 미학의 범주에서 벗어날 것이다. 문학적인 형태야말로, 마치 벤야민처럼 독특한 천재들이 쓰는 글이 보여주는 그의 공부형식 같은 것, 정말로 우리로선 따라갈 수 없는 터져 나오는 독특한 지성의 홍일점이자 백미. 결국 중심적 의제는 삶과 글쓰기가 일체가 되는 것, 하지만 독서 없는 글쓰기에 무슨 알맹이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미친 듯한 독서야말로 천재의 기본적인 수칙, 즉 그의 스타일 아닐까? 불안으로 있는 것, 솔직히 말해서 커피는 불안을 야기한다. 기분 좋은 불안, 정신의 날뜀, 즉흥적으로 쓰고 또 쓰는 것, 이 시대는 잉크의 분사가 아니라 워드프로세서상의 기입, 흩날림 같은 것이다. 불안이 곧 검은색의 흩날림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가장 좋은 서구적 글은 적은 의미를 가지고 많은 현란한 수사적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반면 어떤 방법론적 원리에 의거하여 글쓰기 자체에 전환점을 두는 것이 바로 독서다.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읽는다는 것은 곧 사유다. 읽음과 사유, 글쓰기는 지성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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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쓰임, 모든 언어와 지식, 형식이 이용되는 철학의 총체적 글쓰기. 백지에 끊임없이 농축된 발화의 가래를 뱉기, 그리고 정리하기, 따라서 완성되는 일련의 정식. 우리는 언어학의 존재론적 구조가 마침내는 시작도 끝도 없는 줄기찬 산문에 의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이론의 방법론적 시작을 이해했으니 단계적으로 변증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갈 차례이다.

 

4. 연대와 구조4 :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객관적 유물사관을 기준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비트는 것을 도구로 삼아 탄생한다. 이를테면 이집트의 대부분의 시민이 노예였던 것으로부터 20세기 미국의 중산층의 폭발로까지 구구절절 실증적 사실을 통한 역사적 기술이 전자일 것이다(특별히 역사의 어떤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역사에 대해 해명하기에 앞서 인류의 기원과 시작에 대해서부터, 그러니까 인류 일반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에서부터 마르크스는 원용했다. 결코 헤겔에 대한 계승의 책임에서 마르크스를 철학자라고 규준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세계에 대한 역사철학적 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당대 사회의 구조를 완전하게 꿰뚫어본 공에서 그의 철학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물질적이고 인식 가능한 구체적인 현실을 역사성에 입각해서, 이 모든 것을 변증법적 원칙으로 규명하면서 현실해결의 원칙을 이루는 것, 이것이 후자. 그리고 전과 후가 상호침투하면서 사회이론의 인식을 넘어서 실천적 집단행위까지 이어지는 것이 다른 철학자들과 구분되게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이 공준한 이론의 독특한 명증적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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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부터 연대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발생한 잉여가치가 착취라는 정을, 이에 대한 반동으로 거반 세력인 피착취 대상이라는 반을, 마침내 투쟁이라는 합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외관상 변한 점들은 있지만, 구조적으로 달라진 건 마르크시즘의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개방을 위시해 더 거대한 착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부르주아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고, 더 많이 만들어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인류의 대다수가 자본의 구조 안에서 착취당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제시가 중요함의 문제에 있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열쇠와 같은 것이다. 하기야 마르크스의 토지와 인구문제, 지주와 농노의 관계 그리고 토지의 면적(반경)과 잉여가치의 관계는 IT사회에 있어서 사회과학적으로나 정치경제학적으로나 뒤로 물러나는 낡은 개념이겠지만, 그러나 이 토지면적에 따른 경제의 문제가 배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기술의 발달로 황무지조차도 빌딩숲으로 개간할 수 있고,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교통에서 불리하다면 인구가 집적되지 않는 변방이나 황무지로 뒤쳐질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주와 농노의 관계는, 임대료를 챙기는 건물의 실소유자와 항상 장사가 안 될 시에도 비싼 임대료를 내야하고, 장사가 잘 될시 건물을 비워달라는 술책에 대한 양면적 공포에 휩싸여 있는 규모 작은 자영업자의 관계에서 상정될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떤 사업이든 건물을 매입하지 않는 한 대기업 미만규모의 사업에 있어서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로 빠지게 되는 걸림돌, 일종의 늪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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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철학은 오늘날에 있어 좀더 현실적으로 변양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적 범주론과 같은 추상적인 사고에서 탈피해야 하며 현실의 모든 제요소를 망라하는 우주적 총체에 가까우며 후자의 경우가 마르크스가 필생에 주장했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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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순수현상학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는가? 우리는 이 양자의 동적 관계를 알아보기에 앞서 언어유희의 거장인 사르트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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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대와 구조5 :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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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그의 철학과 문학, 그리고 그와 실존주의에 대한 열광은 아직도 나의 가슴에 남아있다. 실존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문학에서 예사로 운위되는 실존주의 일반, 철학에서는 니체, 메를로 퐁티를 거쳐 이 글의 주인공인 사르트르와 카뮈로 표상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그 외에 여러 타입의 실존주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이 대자적인 의식이 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자유이며-물론 여기에 따른 책임은 있지만- 미래를 향해 이론적-실천적으로 기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요약한 것은 존재와 무라는 철학서의 핵심을 쓴 것이고, 사실상 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무수한 언어유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언어유희라 하여 논리학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철학적 개진 자체를 뒤집어엎고 시도하는 글장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종훈 교수의 말처럼 현대철학이 언어적 전회에서 발로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데리다의 에크리튀르 개념은 후설을 시작으로(20세기를 시작으로 하는 현대철학)에 있어, 언어 그자체를 도구가 아닌 목적, 즉 몸통으로 자신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신들린 언어유희 역시 나의 글쓰기의 스타일에 있어 전범으로 삼는 형식이었다. 그의 글에 대해 논하자면, 후설과는 다른 의미로 알아보기 어려운 만연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사르트르만큼 비비꼬아서 글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글쓰기에 대한 어떤 무한한 것, 이미 대중의 책들의 글 형식을 넘어선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 그는 당대에 이해받지 못하는 글을 쓰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게 글을 쓰는 사람, 만연체의 제왕(이것은 그의 생각이 복잡해서일까? 아니면 이미 그의 언어에 대한 재능으로 말미암은 타성 같은 것일까?), 글쓰기가 뭔지 아는 멋있는 지식인 정도로 내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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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그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말하자면, 아마도 그는 각성제를 즐겨 이용해 글쟁이만이 심취할 수 있는 불안을 즐기고, 불안의 고통스러운 카타르시스가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면(생활습관을 추적해보면, 그는 날마다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셨고 줄기차게 파이프 담배를 피워댔다. 파이프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보통 30분에서 1시간 넘게 피울 수 있다. 암페타민 계열인 코리드란을 남용하다시피 한 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집필할 무렵이다). 카페에서 글을 썼다고 하니 아무래도 에스프레소 샷을 6개 정도를 한꺼번에 우유나 크림에 타서 빈속에 마셨을 것이다. 커피와 담배가 교차할 때 단순히 각성효과가 아니라 하는 능력이 항진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미스터리가 있다. 단순히 의식에 나열되는 말이 아니라, 흰 백지에 생각 없이 갈겨쓰는 것(사르트르는 노인이 되어 눈이 멀 무렵 자신은 어떠한 철학적 사고도 해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것도 폭발적이고 즉흥적으로,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갈겨쓰는 체질이 있다. 이런 체질을 나는 사르트르적 체질이라고 할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언어를 측두엽의 브로카영역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복잡한 생각은 전두엽, 전전두엽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무에서 생각 없이 선험적으로언어가 커피와 담배로 인해 터져 나온다면? 흰 백지와 펜만 가지고 영감도 생각도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깨어 있는그자체로 글쓰기를 연마하고 연마해서 결국은 지식의 언어적 마에스트로가 된다면?-이것이 바로 에크리튀르의 최종 개념이다(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건 글쓰기라는 미궁의 변증법이므로 엄청난 양의 독서 없이는 잿물과 같은 글이 탄생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글을 쓸 때 발하는 광채, 생각 없이 쓰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며 언어를 무의식에서 길어내어 병렬적으로 나열하면서 순식간에 조립하는 그의 언어변증법적 글쓰기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 천재적인 비결이 바로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의 명예를 가져온 것이다. 이 무식함 속의 탁월함이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의 방법론을 알았고, ‘변증법적 이성비판’, 즉 여기서 다루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실존적 현상학의 완전한 결합에 대해서 해명할 차례인 것이다.

 

 

6. 구조주의에 대한 탐구, 가지성과 불가지성, 무위와 유위의 문제

 

산문의 작문(=산문적 글쓰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형식상의 자유성이 확보되어 있다. 여기에는 완전히 논리적인 연결성(논리학적 연결고리)에서 생성되는 일련의 장이라 일컬을 수도 없고, 의미론적으로 과학적 차원을 서술하는 것도 아니다(즉 정밀함을 중요시하는 과학서와는 그 종지를 달리한다, 그것이야말로 산문이고, 산문의 예술성이다). 반면 전적으로 이념적(=관념적인 것의 규칙적인 장)인 것도 아니다. 후설은 의미와 지시체를 구분했다. 그러나 현상학적 구분 없이 이를 정식적으로 표현해보기로 하자. 간단히 말해 기표란 달을 가리키는 손의 표층적인(=날줄) 형태다. 지시체란 달(씨줄)이다. 의미란 달의 속성(형상)과도 같은 것이다. 지시체와 의미 양자를 기의라고 할 수 있다.지시체와 기의를 유별한다면, 이를테면 일그러진 달을 일그러진 달로 인식한다면 지시체와 의미의 구분은 애매모호할 것이다. 분명 둘은 동일하기 때문(동일률)이다. 여기서부터는 불어의 개념을 도입하기로 하자. 랑그와 랑그주. 둘다 언어라는 불어의 뜻인데, 랑그라는 좁은 의미의 추상적(개념적)인 것이 지시체라면, 랑그주와 비슷한 더 넓은 외연을 가진 의미(sinn)는 표현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까지 함축한다. 그리고 그 기체(일그러진 달이라는 사물)까지 수학적으로 내포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미(sinn)’란 가치를 나타낸다. 행복 같은 감정 같은 것 말이다.따라서 지시체와 의미의 차이는 인식론적으로 현상학적 환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앞서 기표가 기의를 능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즉 달을 가리키는 손이라는 글의 문형(생명 없는 신체)은 생명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자기운동일 것이다. 이는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적 언어유희에 의해 달성가능하다. 언어유희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따로 할 필요가 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추측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성문법론이란 언어의 규칙(문체), 문체나 작가가 만든 알아볼 수 없는 신조어가 아무리 기벽하다해도 같은 모국어를 사용한다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작가가 아무리 자신의 글을 뒤틀고 만연체로 도배하고 일부러 난해한 문장을 만들고 무수한 신조어를 만든다 하더라도 같은 모국어를 매개하는 작가와 독자는 서로 간 그 글의 의미나 지시체를 이해할 수 있다. 생성문법론은 이로써 어떠한 한계 없이 무한하게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 그렇다면 기표(신체, 즉자, 생명 없는 물질)라는 에크리튀르 자체가, 이 피상적인 수사적 형식이 무한한 기의(의미, 지시체, 정신, 대자)를 생성한다면, 공시적으로 따져볼 때 기표의 무한성은 기의의 무한성을 담보한다. 기표와 기의가 구조적으로 같은 시점 아래 공유하는 것, 궁극적으로 기표와 기의의 공시적인 환각, 이것이 바로 에크리튀르(문자언어, 글쓰기)의 새로운 이면이 아닐까?

 

 

언어의 무수한 정의의 연산으로 이루어지는 변칙적인 문장구조, 이들의 설계는 그리하여 한 주체의 글은 이미 타자들이 됨으로써, 즉 일련의 글에 많은 작가들이 있음으로서 무한히 많은 지시체의 연쇄를 나타내는 천재적인 역량을 그 안에 담아낸다.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그러니까 의미나 지시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형식도 아니다. 그것은 글이라는 예술작품의 전체성 즉 아우라의 문제다(여기에서는 논리학적인 철학적 글도 포함된다).

 

 

우리는 오래 동안 말과 실천을 구분해왔다. 그러나 말이라는 언표는 이미 실천에 다가서 있다. (사유)이 실천(행동)인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맞물림으로써 글은 선형적인 동일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글이라는 좌표에서 뻗어나가는 의미의 방사선은 압도적이다. 언표는 명제라는 작은 범주로 상징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명제 속에서 구조적 집합으로서의 우주를 발견한다. 이미 명제는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명제가 또 다른 명제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끌면서 폭발적인 사유는 명제의 규칙적인 전체화가 된다. 변증법적 사유가 이미 증명을 대리하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를 규준할 수 없는 대해로 빠져들게 한다. 마침내 끝없는 문장과 그 문장이 지시하는 관념은 무위를 지향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자 하는 실천적 자세로 마침표를 찍는다. 더 이상 무위와 유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무와 유는 유비되기도 하지만 차연적인 관계로 정립된다. 즉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 사이에는 끝없는 차이가 있으면서도 무수한 차이로서의 연결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승려적 삶을 사는 것은 세속에서 벗어나려는 비세속의 삶이고(따라서 세속은 상대항으로 언제나 존재한다), 불가에 귀의하는 듯한 글쓰기적 실천이라고 우리가 규제한 이론학, 즉 말의 연쇄가 사고(思考)는 사태(事態=사물)를 표상하고 존속시킴으로써 실천적 완성을 이룩하는 사유 역시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 사고라는 가상의 세계가 현전하는 존재자의 실재를 규정하는 근거는 표상과 고결하면서도 끊임없는 고결한 이상의 장소에서만 엄존할 수 있다. 반면 말이 실천에 이르는 최종심급은 어떤 면에서 유위 속의 무위다. 마치 음악의 휴지기와 연주하는 부분의 관계에서처럼 유기적으로 차이와 연계, 반복의 삼박자의 메커니즘으로써 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배운다는 것이고, 말한다는 것이며, 실천하는 것이고, 실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개념들의 내재성의 장을 이루는 지향과 욕망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욕망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층위에 있는 것이고, 지향이라는 고결한 층위는 학문함과 사유함이나 승려로서의 무위로 한 인간을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글을 쓰는 것, 학문함은 자기완성으로 향하는 것과 역사에 자신의 무명을 입체적으로 몰아넣으려는 것, 그런 세속적 차원은 지엽적인 것이고 어디까지나 글을 통해 무상성이라는 구도(求道)의 완성이 중요하다. 만일 예술가의 삶 역시 자본과 상호 교류한다는 점에서 세속적이라면, 그것은 사물의 한 면(노에시스)만 바라보는 꼴일 것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전체인 노에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지만 학문 이상의 것, 즉 글쓰기의 종교나 도의 차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고 일종의 도가 될 수 있고, 분명 모두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인 것, 본격적인 진리로의 이행일까? 진리를 구명한다는 것은 어차피 쓸 수 있는 범위를 자신의 가지성과 선비정신(=아카데미즘)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생사의 초월이나 우주와 자신이 일종의 동일자가 되는 범여일여의 해탈로, 극한의 세속적 차원 안의 비세속적 차원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과정으로서의 생에 의거하는 실존주의의 에크리튀르다. 글쓰기의 궁극인 실존의 형이상학, 비록 그 실체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만일 말이 실존의 형이상학을 증명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우주를 관통하는 지성에는 육박할 수 없다. ‘실존의 형이상학이란 실존주의가 인간주체랑은 분리될 수 없고, 인간주체의 추상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결국에는 하나의 실체인 객관적인 개념으로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우주를 보는 시각을 바꿨듯이, 실존주의의 최종지점인 형이상학적 기저가 객관적 개념의 환원을 통해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문학, 심지어 생활세계 전반의 지형도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원칙은 무신론(부처를 죽여라=주체의 지성을 추구하라), 유념의 극한에 다다를 때 오는 무념(쓰기와 덮어쓰기를 통한 비우기, 즉 이론학의 자기초월적 무상성의 실천=요컨대 생각을 지우려 하면 떠오르기 마련이고 내려놓으려하면 이미 들고 있는 게 된다, 욕망을 제거하려면 더 높은 층위를 차라리 고결함을 지향해야 한다),가지성에 내포된 무한개념(알 수 있는 한 끝없이 알 수 있다=배움과 인식의 무한한 가능성) 등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한 개체의 글쓰기와 지식이 불가지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언어유희에 의한 다의성과 다의성이 포개져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즉 불가지적인 것 전체를 파악하는 인식론적 주장은 아니지만, 최소한 영적인 것과 비세속이 다다르는 무위의 지점은 표현가능하다. 철학자들이 무에 대해 할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 승계호 교수는 철학비판학자라기보다는 비판을 위시한 비판론자다.

 

 

불가라는 이념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망라하는 유일한 무위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글쓰기와 지식이라는 학문과 언어라는 유위의 역사에 대해 긍정해야 한다. 삭제하기보다는 쓰기와 덮어쓰기의 우위, 내려놓는 것에 대한 들고 있는 것의 우위, 이를테면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데 휴지기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연주파트다. 연주파트는 과정으로서의 생이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사회를 이루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생성해나가는 역사일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얻었고 그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

 

 

 

 

7. 실존주의+후기구조주의

 

 

 

학문을 수양하면 외부성(세계의 초재성)만을 배우고 분석하는 것 같아 때때로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기투라는 복합적인 개념으로 명시화되는 현대의 내재성, 실존주의가 표방하는 내재성은 순간적인 것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실사적으로는 영원하지 않으며, 이 즉흥적 개인주의가 종말을 맞더라도 세계라는 역사성은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항구적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실존이란 더더욱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실존을 결코 쾌락의 만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실존은 일률적이고 팍팍한 프롤레타리아의 생에서 존재의 개별성의 진리적 의미를 되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음문자적 깨달음, 즉 내면의 음성언어의 목소리를 듣는 것, 즉 이성적인 것(로고스로 상징되는)에 복종하는 내재적 행위를 시대적인 문명적 코드와 규약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면성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 존엄성, 즉 인간적 진리의 내재적 차원이 자유인 이유는, 그 공간만이 어떠한 사물의 세속적 차원에 물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속과 비세속을 가르는 것은 기표(신체=자신의 경제적 외모적 조건)를 보는 게 아니라 기의(정신=내면)를 해석하는 것, 그러니까 구체적인 존재자에서 현상계 너머의 진리로서 불변하는 존재를 추출하는 것, 그럼으로써 한 개인의 삶이 앎에 대한 자기확신(=믿음)에 찬 궁극적인 개별성의 대오로까지 상승하는 걸 뜻한다. 이것이 정보로 넘치는 현대적 삶의 특징에서 실존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다(이는 마치 다시 플라톤을 회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편으로 실존주의는 고전에 대한 독서 즉 문헌학에 대한 실천일 수도 있으며, 한 잔의 커피를 마시고 오솔길을 따라 걷는 사색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면의 목소리(표음문자적 글쓰기)이거나, 기표로 하는 연주(어느 정도 원숙해서 쓰기-기계가 되는 기법)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배움에 있어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세계, 표의문자의 세계인 불가를 포함한 동양철학에도 견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학문과 문화는 통하는 법이니까. 현대에는 경제, 문화적으로 통합되고 있고, 고대에도 진리의 기원에 대한 동일성은 즉 이 무위와 유위의 두 양가적 문명의 종지는 일자이다.

 

 

 

우리는 에크리튀르(문자 이전의 글쓰기, 즉 충만한 내면의 음성언어)를 통해 이성적 사유를 통감한다. 의지력은 언어에 의해 구성화 된다. 철학적으로 원숙하다는 것은 자기철학의 내용(비물질적 실질)을 언어로 표현(물질적 실질)한다는 것을 뜻한다. 표의적인 표현이든 표음적인 표현이든 좋다. 표음화가 현대화의 상징이라면, 표의는 기원이나 근원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또는 수학과 과학의 기호들, 문자와 상징을 망라하는 전체적인 기호체계, 퍼스의 기호학.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진정 중요한 것은 개념의 실사들을 커뮤니케이션하는 것 아닌가?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들의 확장도 결국 내면 의사소통이론의 확장 아닌가? 그러니까 두뇌를 쓴다는 것은 두뇌라는 기표가 마음(의식)이라는 기의(실사)와 일치하는 지점에서 빅뱅처럼 우주의 지적 폭발의 확장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두뇌와 마음 양자를 이어주는 매개는 언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타자에서 동일자라는 자연스런 종차로 이행할 때 그것은 살아있는 실사적 진리(내재적 파롤=내면의 발화, 자유의지)가 되는 것이리라.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기호들은 집합적 표상이 아니라 모종의 실재적 파워를 가진 코드의 리듬과 같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언어란 실천적인 음계의 차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8. 무상, 비세속, 무위.

 

 

소통불가능성으로 대립된 인간, 우리는 말하지만, 사실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는다. 사회의 의사소통적 장,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계약론의 전체적인 양태를 가지고 있다. 순수함은, 순수함의 의사소통은 유년시절 때뿐이다.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것은 돌이킬 수도 없고 단지 무상, 비세속, 무위라는 삶은 물론 죽음의 통째를 차지하는 제반요소로 남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는 삶의 덧칠이란 이런 상실의 공간들을 매 꾸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삶의 특징들의 색채를 칠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데 비례해서 덧칠을 계속한다. 결국 순수성에 의거한 유위란 착각이다. 내가 앞서 제시한 것은 세속이 변양해가면서 생성해나가는 유위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어느 동양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지긋한 도란, 실체는 보이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비세속이고, 무위이며, 무상한 것이지만 무의 속성에는 일정한 연속성도 없고 어떠한 한계가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말처럼 순수 무는 자신이 있을 공간에서 현성할 수도 있다. 무의 본보기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개념은 불가의 무학이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수행해나가야 할 공부라는 개념에 반하여 더 이상 배울 가치도 없을 정도로 깨달음을 얻어 이미 그 반열에 오른 것. 무학이야말로 세속에서 탄생한 학문을 부정하는 것이고, 서구문명의 세속적인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옆으로 비틀어 꺾는 것이며 한국사회의 평생공부열풍에 대한 무위에 대한 가장 큰 실천이다. 즉 무학은 미래조차 부정하는 관념론이다. 그런데 그러면 어떠한가. 꼭 학문적 헤게모니나 교양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진보일 수도 있다. 무상의 길목에 들어서면 어떠한 위협과 부정적 상황조차도 순수한 무로 치환된다. 하나의 굵직한 개념이 모든 생적 개념들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학문의 제3, 서구학문도 아니고 동양학문도 아닌 양자의 교호와 같은 것. 아니 더 이상 서구라고도 동양이라고도 제3자라고도 규정할 필요가 없는 지점, 이런 비규정, 규제적 발견이야말로 진정한 철학함의 본모습이 아닐까?

 

9.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의 종말이 아니다. 단지 의식, 주체, 이성 일변도의 철학이 객관적인 방향으로 이행해 실증성의 등급으로 귀화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20세기는 철학의 세기였다. 그 어떤 세기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런 카오스의 백가쟁명이 대표적인 철학자, 탑의 지식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프로페셔널리즘, 즉 분과학문의 전문성이 강조되는 지금 철학은 모든 걸 망라한다는 자부심을 조금은 접어두고 고유한 지적 전통에 자신의 육신을 기댈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 철학이 살아남으려면 여전히 전체를 망라하는 스케일 큰 기획을 기준으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 들뢰즈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현대는 시뮬라크르, 곧 허상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신보다 오래 존속하지 않으며, 주체의 동일성은 실체의 동일성보다 오래 존속하지 않는다. 모든 동일성은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이 구절에서 주체의 동일성에 대해 실체의 동일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주체는 끝이 났고, 실체에 의존하는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여태껏 그래왔지만 철학이 항상 주체를 중심으로 회전할 필요는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더더욱 실체(객체) 중심의 동일성과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사의 위치로, 초월론적으로 격상해야 한다.

 

우리가 들뢰즈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창시자의 예를 따랐다고 낡았다고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바디우와 지젝이 있다. 바디우는 철학을 역사성과 단절해야 이 시대에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지혜의 전당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역사성이다. 반면 지젝은 라캉과 헤겔 사이를 오가며 공산주의의 부활을 제창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지젝의 기획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에 그 어떤 주의도 이를 대체할 수 없고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새로운 인류의 건설을 담보하기에.

 

뒤를 보면 급격한 낭떠러지가 있다. 선택의 여지는 무이다. 단지 흐느낌과 염세주의, 그러한 것들은 현실과 더욱더 멀어지게 하고 리얼리티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 돈키호테와 같은 아카데미즘의 지향. 도주와 도피를 위한 사색과 글쓰기, 그리고 이미 인생을 대리하는 산문들.

 

텍스트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하자면 많이 낡은 느낌이 들 것이다. 너무나 많은 갑론을박들이 이미 논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은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활용성일 것이다. 어떤 해방적 구실을 담보할 수 있나, 쓰기의 음계적 변주가 자칼과 같은 혀를 양산할 수 있나, 그런 실용적 평가 말이다. 만일 박제된 예술성으로 그 의미를 끌어낸다면 우리는 고리타분한 미학이란 범주만을 고찰하게 될 것이며, 문헌학적 탐색의 샛길로 새 나갈 것이다.

 

우리들의 공존의 공간에 있는 선택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작은 공간으로밖에(밀집된 공간) 이루어질 수 없고 바로 이 공간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피상적으로는 연대와 연대의 투쟁이다. 여기서 사회계약론은 만인을 매개한다).

10. 실존한다.

 

바디우는 일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는 사르트르주의자이다. 초기 사르트르, ‘존재와 무의 강렬한 자유의 상징을 지닌 사르트르 말이다. 그는 진리성의 집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진리성을 집을 수 있는 집게가 분명히 있다는 얘기이다. 바디우처럼 진리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철학자가 또 있을까. 들뢰즈 이후 철학은 공백이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였던 탁월한 들뢰즈는 많은 것들을 설명해내었고 연산공정의 크나큰 기획을 표시하였다.

 

 

역사성과 영원성은 항상 대립한다. 즉 유위변전과 지속은 철학사의 테마였다. 영원성의 섬광은 순간적인 것에 영원함을 부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주체, 과학적으로 보면 한 개체의 삶의 중심적 테마에 귀속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역사주의와 단절이라는 철학적 음모를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문과 기술은 역사성에서 비롯되었다. 인식론적 범위조차 그러하다. 이를테면 우주생성이나 인류의 연대의 시간성을 예측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펜에 의지하지 않고 발굴과 귀납을 통한 역사인식은 인류의 시간성을 무한히 정밀하게 확장하였다. 과연 영원성의 섬광이란 무엇일까? 일종의 영지주의인가? 들뢰즈는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역사성과 영원성을 대립시킨다. 영원성은 요해지평의 무한한 확장일 수도, 개념의 무한한 확장일 수도 있다. 거기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반시대적 철학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논리적으로 차이소에 의거한 범주론적 도식으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범주는 분화되고 미분화된다. 그렇다고 결론에 이르러 도덕적인 전망보다는, 그러니까 도덕적 한복판에 호소하기보다는 영원성의 섬광이 무엇인지 역사성과 유비하여 그러한 점을 해명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공통분모의 진행형을, 그 연쇄가 폭발하여 마비되는 관점을 독학자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언제까지나 진리에 대한 해명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일반성에 대해 질적 질서에는 유사성이, 양적 질서에는 등가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유사성의 대체로 질적 질서와 양적 질서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극복은 철학사에서 오래 동안 보전된 방법론이다. 그는 일반성이 반복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일반성 안에 반복이 종속되던지, 반복 안에 일반성이 종속되는 유비의 귀결은 극복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만일 무한한 반복(영원회귀와 같은)이 있다면-그가 니체에 의존하는 것에 빗대어- 반복 안에 일반성은 종속되고 차이는 없어지며, 유사성은 이미 질적 질서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유비는 동류 대 동류로서 능동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원성의 섬광은 지의 동일성이다. 이것을 누리는 주체는 정체성의 측면에서 기호언어에 함몰되어 있다. 혹은 학문적 야심에 대의를 세워 학계에 출사표를 낸다. 지식인들은 많다. 또한 세계학계는 백가쟁명이며,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위대한 학자는 신이 선택하는 것이며, 굳이 피상적으로 출사표를 내지 않아도 자기 자신의 지해는 온전하게 남아있다. 영원성은 순간적인 것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장에서.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열정적 기투이다. 우리 사회는 다시금 실존주의를 재장전할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현상학적 실존주의가 아니라 새롭게 제시되고 계시되는 새로운 실존주의의 타입에서 말이다.

 

10. 심층적인 논리학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지 않는다. 글쓰기는 앎을 확장시키고,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앎을 언어로 대자적으로 각인(엔그램)시킨다. 여기서 대자적이라는 의미는 본디 사르트르적 의미와 우리가 규정하는 범주적 구축론적 의미가 있다. 그렇다. 글은 생각과 사유를 언어적 체계로 구축시킨다. 즉 유위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쓴다는 것과 생각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진다면 사유는 좀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단독자들이 실천적으로 이를 이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해석학에 몰두하면 그걸로 족하다. 많은 지혜를 가진 지식인들이 우리의 글쓰기를 대리해주기 때문이다.

 

 

텍스트들은 무수하고 이것은 독특성과 관계한다. 텍스트들은 무한한 반복이되 무용한 반복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문명은 이를 통해 나선형으로 발전해나간다. 따라서 문헌학적 계보는 실증주의적 역사성을 대리한다. 만일 고유한 생각이 폭발적으로 터지는데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학계(언어 혹은 기호)와 공유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학문적 유죄일 것이다.

 

 

지난날 서구 철학사의 싸움은 언제까지나 논리와의 싸움이었다. ‘왜 그런가?’를 표현하기 위해 질문에 대한 답에 논리를 포장시키거나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심지어 소피스트적 논박이든 수학적 논리와 어법이 가미되면서 체계의 철학만이 탄생했다. 철학은 모든지 정합성의 싸움이었다. 이런 가운데 논리실증주의가 발촉하고 철학의 한 구, 한 절은 논리적으로 그릇되면 그 의미가 아무리 심오하고 깊든 배리가 되었다. 거기다가 증명의 문제가 있었다. 경험주의는 증명에 대해 요구했다. 더 이상 철학은 심오한 아포리즘의 연쇄가 아니라 하나의 수학소에 불과하게 된 것이었다. 수학소라는 말이 부당하다면, 언어논리소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미의 결여를 뜻한다. 의미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는 철학이 말이다.

 

 

철학이 이원론 사이를 배회했다면 우리는 한 가지 사유의 질적 차이를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사유와 직관적 사유의 차이는 질적 차이이다. 박이문은 언어적 사유만이 인간사유의 조건이라고 각인했다. 그리고 또한 전자와 후자를 가르는 것은 글쓰기에 대해 준비되어 있는 질료의 충전성이다. 굳이 직관적 사유라고 할 필요 없이 직관적 코기토(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사유는 어느덧 존재론적 위치를 점할 것이고 언어적 사유와 직관적 사유의 이원론, 즉 양자택일적 선택지는 평평한 일의성으로 굴러들어갈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원론이 항상 바보 같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세속적이건, 그렇지 않건이라는 조건은 또 하나의 전체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원론은 언뜻 보기에는 우둔해보이지만 테제에 대해 집합의 모든 영역에 수를 채워 넣는다. 논리학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바보이건, 바보가 아니건이라는 명제의 조건은 바보라고 언표하든지, 바보가 아니라는 긍정적 언표를 실행한다. 바보가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똑똑하다는 가능태를 내포하고 있다. 이원론의 외연은 모든 관점상의 위치를 포장한다. 여기서 이런 이원론을 불식시키려면 역량적인 일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더 괜찮은 3자의 해결책 혹은 두 가지 중 옳은 선택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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