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의 덕질 1 - S코믹스 S코믹스
야츠다 테키 지음, 박연지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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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너무 귀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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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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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나는 여러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지금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분노다. (나는 당신의 유서를 읽을 생각은 아니었다.)

장 아메리는 서문부터 이 책의 내용은 자살-또는 자유죽음-에 대한 변호가 아니며 다만 스스로 그 주제를 고찰한 결과일 뿐이라 말하지만 그는 <자유죽음>의 출판 후 2년이 지난 1978년 자살했다. <자유죽음>의 다섯 단락을 자신의 죽음의 논리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 아메리는 자살이라는 현상의 사회경제적 배경 또는 심리적 연구 또는 과학적 분석을 배제하고 철학적이며 개인적인 측면에서 자유로운 죽음을 고찰했기에 이 책을 평가하기란 곧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를 평가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그 삶은 너무 괴로운 것이었고, 그는 너무 지적이고 재치있는 사람이라 뭐라 말하기가 두려워진다. 그는 자살했으니까.

<자유죽음>에서 가장 괴로운 부분은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였다. '직업적 성취를 위해 자살희망자의 자살욕구를 부정하고 삶을 살리는 자신에게 도취하는' 상담자의 희화화가 나오는 도입부터 나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사회 이전에 개인이 존재한다는 철학적 전제가 실제 자살행위로 개인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조각하지 못한다.

이 책의 핵심이라 할 법한 4장은 작가가 가장 강하고 설득적인 논리를 피력하는 곳이다. 그렇다. 결국 선택하는 주체는 개인이다. 삶이 자유롭다면, 죽음까지도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자살은 상처가 된다. 이 잘 쓰인 유쾌하고 깊이있는 자살에 관한 수필이 2년 후 작가의 선택에 대한 예고서란 사실이 나에게 상처가 된다. 그 괴로움은 우선적으로 내 책임이지만, 그 드높은 지성과 고단한 삶으로 엮어낸 지혜로 자살에 '자유죽음'이라는 관을 씌우고는 곧이어 자살해버린 장 아메리는 그 원인이다.

자살자의 관점에서 당연히 자살은 희망이요 선택이요 마지막 구원이며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갈림길이다. 이 책을 긴 유서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면 장 아메리는 그렇게 죽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타인에게 자신의 글을 읽힌 지식인으로서 그가 지키지 못한 책임이다.

우울증이 언제나 병증은 아닌 것은 맞다. 그러나 우울이 희망없는 상황에 대한 타당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게 치료와 교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상황이 바뀌면 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 바뀐다. 그 때를 기다릴 수 있도록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을 반드시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 불러야 하는가? (기다릴 수 없는가?)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위에 개인의 삶에 대한 권리를 두는 장 아메리는 그 논리를 위해, 한줄기 비웃음과 함께, 사회와 개인을 엮는 끈을 끊는다. 1978년에 그는 죽었고, 그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 똑똑하고 논리적인 책을 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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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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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더 자극적인, 더 참신한 글도 있었지만 제 5회 한국과학문학상 작품집에서 가장 내 마음을 울린 작품은 성수나 작가의 <신께서는 아이들을>이었다. 반복해 읽으며 골몰하고, 내 슬픔과 미련에 대해 생각했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한 구조의 세상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올라온다. 죽은 아이들이다. 피안의 섬에는 무덤과도 같은 작은 언덕이 있고 잠시 머무를 오두막이 있다. 바다 아래는 차안이다. 이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신이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아이들은 다시 태어날지 또는 그저 사라질지 결정할 수 있다. 섬을 지키는 반려동물과 반려인은 결정의 순간까지 아이들을 돌본다. 

반려동물은 말을 할 수 있다. 아이들과 반려인은 말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섬이 조용한 장소인 건 아니다. 종을 울리고 섬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있고,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보며 입모양으로 소통을 한다. 너무 많은 말소리로 너무 적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배인 걸까. 섬은 생각하는 장소다. 

섬을 둘러싼 바다는 신의 그물, 신의 사랑이다. 반려동물과 아이들은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 충만하다. 반려인은 열매와 풀을 먹어야 한다. 반려인은 이질적인 존재다. 바다를 통해 환생하거나 바다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바다는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신은 왜 그를 사랑하지 않는가? 그가 신을 믿지 않기에?

서글픈 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 신, 바다, 섬, 반려인, 반려동물은 무슨 상징일까 고민하다 이것저것 덕지덕지 모티프를 부여하다 이내 지루해졌고, 그제야 순순히 글을 활자 그대로 읽었다. 그러니 간단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다.

반려인은 섬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그물은 촘촘하고 완벽하지만, 신은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완벽하지 않고 아이들은 실수를 하고 어쩌면 신의 손을 놓칠지도 모르니까. 그 때 손 놓지 않을 누군가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불신자는 섬에 머무르며, 무조건적이지 않은 사랑과 전능하지 않은 능력으로 아이들을 지킨다. 

동물이 하듯, 또는 어린아이와 신이 하듯 의심하지 않는 사랑이란 아름답고 편안하다. 불신하는 사랑은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사랑에 상대비교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이야기의 끝에서 불신자는 신자가 되고, 그 믿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자 자신이 지킨 아이들이리라. 나는 그 믿음 자체가 신의 얼굴이라 믿는다. 

글을 곰씹고 한껏 술렁이는 마음으로 작가노트를 읽었다. 

 '...내가 이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는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를 따돌리는 이 수많은, 무방비한 뒤통수들. 그런데 왜 밉지 않은 걸까. 나는 그들 사이에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아주 먼 훗날에, 의심 많은 내가 무언가를 믿게 된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이 뒤통수들일 거라고. 그 믿음으로 이야기를 썼다.'
p.286

작가의 말로 비로소 내 안에서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찬찬히 읽었다. <신께서는 아이들은>은 신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지,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무결한 믿음이 아닌, 보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믿음이다. 의심과 공존하는 믿음이다. 

나는 어떠한 신앙도 없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내게 구원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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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잠드는 나라 - 잘 자요 그림책
야나가 히데아키 지음, 이나토메 마키코 그림, 이소담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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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른의 불면증에도 도움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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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창비시선 462
강지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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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이었나, 유리컵을 깨뜨렸다.

날이 추워서 급히 창문을 닫으려고 탁자에 내려놨던 유리컵을 깜빡하고 휙 몸을 돌리다 그렇게 됐다.

(공익을 위한 제보: 다이소 2000원 내열유리컵은 강화유리컵이 아닙니다. 깨지면 산산조각납니다.)


순서대로 떠오른 건 1.고양이!! 막아!!! 2.뭐야 완전 먼지가 됐네 3.이거 얼마 전에 읽었는데.

여기에서 3이 이 시집이었다.


 달걀을 깨서 유리잔에 넣을 때였다. 달걀을 가득 담아 

 테이블에 유리잔을 내려치면 그 잔이 자신만의 달걀을 

 낳을 것 같아서. 하지만 내려치니 깨지는 건 내 앞의

 창문이었고...

 -<새의 밤>

(내 유리잔에 담긴 건 달걀이 아니라 아쌈과 설탕을 듬뿍 넣어 팬에 끓인 로얄밀크티였다.)


이번에 알았는데, 유리가 깨질 때는 아주 맑은 소리가 난다.  얇은 유리라서 그랬는지도.

덕분에 나는 이제 이 시를 읽을 때면 머릿속으로 챙그랑/찰랑/챠르릉 효과음을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유리를 깨뜨리기 전에도 나는 이 소리를 상상할 수 있었다.

달걀을 담고, 잔을 집어들고, 강하게 내려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챙그랑. 그런 소리가 나겠지.

그럼 조금 시원하려나. 

(하고 생각했었다. 현실에서 조각난 유리잔이란 유리먼지를 전부 제거했다는 확신을 위한 고달픈 사투다.)


강지이 시인의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는 표지의 윤슬처럼 반짝거리는 시집이다.

시의 깊이와 무관하게 시어는 난해하지 않으며 쉬이 손끝에 닿는다.

단어를 읽으며 느끼고, 휘두르고, 보고, 맡고, 상상한다.

나는 깨어지는 유리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너무 밝은 바다, 종이를 태운 불의 냄새를 안다. 그건 초대장이다. 

감각의 공유가 가능하다면, 공감도 이해도 곧 따라온다.


시인의 공간은 출입에 관대하고, 방대하다.

여름에서 시작해 겨울까지 함께 걷고, 더 넒은 곳까지 가자고 문을 연다.

그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시인을 만난다면 어쩜 이렇게 예쁘니, 하고 팔짱을 끼고 싶다. 물론 허락을 받고!)


오늘도 눈이 내리길래 발자국을 잔뜩 남기고 들어왔다.

유리 같은 이 눈 속에
발이 들어맞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다고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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