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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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썼던 글을 다시 읽지 않는 부끄러운 버릇이 있다. 부끄러워서 그렇다. 글을 쓰는 나보다 글을 읽는 나는 그 시간의 간극만큼 더 똑똑하니까. 원래 비판은 더 쉬우니까. 그러니 읽으면 아쉬울 테고, 아쉬워서 부끄러울 테고, 부끄러우니 고쳐야 하는데 그건 힘들고 귀찮으니까. 그러니까 사실, 게을러서 그렇다.


의무교육 과정을 지나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초본을 그대로 제출해 버리는 몹쓸 행동을 고치지 못한 탓에 후회도 참 많았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글은 정말로 읽고 싶지가 않다. 거울 보는 것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이 나이까지 (나이야 뭔 상관인가 싶지만) 동화책을 좋아하고 환상문학을 즐겨 읽고 용과 나가와 주술과 저 우주 어딘가의 문명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도 비슷한 심리 아닌가 한다. 현실은 무섭고 귀찮으니까.



1.

집에는 [82년생 김지영]이 두 권 있다. 한 권은 나중에 선물로 받은 거고, 한 권은 출간되자마자(는 아닌가. 좀 알려진 뒤였나?) 구매했었다. 그리고 첫 장을 읽고 빠르게 깨달았다. 읽으며 괴롭겠구나. 의무감으로 읽는다면 더더욱. 그래서 덮었다. 언젠가는 읽겠지.


책장의 반절은 차지하고 있는 듯한 '언젠가는 읽을' 책더미에서 [김지영]을 구출한 건 2019년 10월 개봉한 [82년생 김지영] 영화였다. 정유미는 너무 예쁘고 공유는 너무 잘생겼던 그 영화를 보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다 나왔고 집에 와서는 바로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영화와 책을 비교한 감상문을 어딘가에 썼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였더라... 다시 볼 생각 없이 글을 쓰다 보면 정말 다시는 못 보게 되곤 한다).


그 독서는 예상한 만큼 괴로웠다. 영화보다 더 슬픈 내용이었는데, 영화를 본 만큼 이야기 자체에는 익숙해져서 조금 덜 슬프고 조금 더 화가 났다. 분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 너무 가까우면 이야기에 취해버리니까. 



2.

평범하고 일상적인 아픔이라고 덜 아프지는 않다. 덜 화려할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김지영]은 훌륭한 작품이 맞다고 생각한다. 김지영 씨의 삶은 사실 정말로 별일 없는데, 그 별일 없음을 그렇게 참담하게 그려줘서. 


그래도 창작물이니까 끝에서는 더 (영화에서 그랬듯이) 희망적인 모습을 그려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도, 정말 그랬다면 이만큼 인상적인 글은 아니었겠구나 싶다. 영화의 밝은 결말은 원작의 어둠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후련한 표정으로 글을 쓰며 내면의 어둠을 털어내고 더 당당하고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주인공은 분명 멋지지만, 자아 성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불안한 미래를 외면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 더 눈에 익다. 이쪽이 더 진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치기보다는 도망가버리는 비겁함으로 날마다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3.

[김지영] 자체도, 이 책에 대한 반응도 현재 사회에 대한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거울 속 물체는 보기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민얼굴을 보는 게 부담스럽다 해도 거울을 보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꼴로 다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82년생 김지영]이야말로 작금의 필독서라 해야 하지 않을까.



4.

영화에서 김지영씨의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면 내새끼, 내새끼 우짖는 장면이 가끔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사랑이 맞다. 사랑이 나를 분노케 하고, 행동하게 한다.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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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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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 라고 하려니 작년은 빼먹는 꼴이 되는군... 이건 서양식 달력이 문제라고 본다. 애꿎은 겨울은 매번 중간에 걸쳐진다. - 이번 겨울은 유독 눈이 잦았다. 눈이 오기 전 어느 날 시집을 사 두었다가 눈이 오는 날 읽었다. 첫눈은 아니었고, 폭신하고 하얗게 땅이 덮이던 날. 대개 첫눈보다는 한겨울에 내리는 눈이 예쁘다. 언제나 시작은 어설픈 법이니까.

⊙ 가끔 베스트셀러나 인기 신간 목록을 보면서 다소 삐딱하게 '제목빨이네' 중얼거리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계절을 노린 단어선정, 공격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의문형, 리본 묶어 선물하기 딱 좋을 듯한 파스텔 블루 표지까지. 예뻤다는 말이다.

⊙ 뭐 배운 것도 없으면서 미술이고 음악이고 문학이고 건드리고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답답한 건 뭐가 왜 좋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고흐의 해바라기보다는 난이 좋아요. 쇼팽은 Kate Liu의 연주가 가장 훌륭했어요. 이규리 시인은 시를 참 잘 써요. 왜요?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아, 네...

⊙ 첫눈이었든 첫눈이 아니었든 그 눈은 오래 전 물이 되어 흘러서 사라져서 다시 비와 눈이 되었을 테니 첫눈을 맞던 나도 그렇게 완전히 녹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 여전히 근심도 고민도 남아있고 답 없는 질문을 하는 나도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궁금하고. 다음날 보도에 남은 찌꺼기는 질척하고, 도로변에 남은 얼음눈은 건드리면 바스락 부서진다.

⊙ 이 시집을 선물용으로 구매하지는 않을 거다. 선물용 시집이라 함은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적당히 새초롬하고 몽근해야 하는데, 「첫눈」은 좀 추워서. 겨울날 핫초코가 아니라 아이스 돌체 콜드 브루 - 맛있습니다. - 를 내미는 꼴이 될 거라서. 무엇보다, 이 책을 반길 사람이라면 이미 한 권 갖고 있겠지.


+

...

연두가 어떻게 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지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그 결별들을 다 어떻게

-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中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 떠올라서 좋았다.

Nature’s first green is gold,
자연의 첫 초록은 금빛
Her hardest hue to hold.
잡아두기 어려운 빛
Her early leaf’s a flower,
이른 잎새는 꽃처럼 피어나
But only so an hour.
순식간에 사라져요.
Then leaf subsides to leaf.
잎은 잎에 자리를 내어주니
So Eden sank to grief,
낙원은 슬픔에 침잠하고
So dawn goes down to day.
새벽은 내려와 아침이 되니
Nothing gold can stay.
금빛은 머무르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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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한글 만들기 1 : 원리를 아니까 재밌게 하니까 - 기본 글자 아하 한글 시리즈
최영환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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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귀엽고 내지 구성이 재밌어요. 자꾸 넘기다 보면 빨리 닳을 것 같긴 한데 그게 교재의 목적이니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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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리커버 한정판)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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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연애를 한 적이 없다. 사귈래요? 그래요. 했다가 헤어질래요? 그러죠. 하며 갈라졌던 만남을 연애라 부르기는 힘든데, 그게 전부였으므로. 한때는 그 사실이 짜증이 났다가, 그 다음에는 부끄러웠다가,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정말로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연애를 주제로 삼는 글은 좋아한다. 까탈스럽게도 이건 동정이고 이건 착각이고 이건 기만이군, 하며 소설 속 연애를 헤집어 분석한다. 연애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소설 속 연애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꼴은 우습다만, 그렇게 따지자면 대부분의 독자는 대부분의 소설을 읽을 자격이 없으리.

<너무 한낮의 연애>에 등장하는 연애란 (연애와 무관한 글이 더 많지만) 진짜더라. 그래서 일단 마음에 들었다.


1.
제목 선정이 탁월하다. 수록된 글 하나 하나가 한낮처럼 눈부시다.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대단하다는 비유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잠깐씩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분명하고 올곧다. 내 안의 초라함까지 다 까발려질까 무서운데 그게 또 싫지는 않다.

강한 빛에 희게 바랜 오래된 유적지를 거닐면 이럴까. 가식의 꺼풀이 모두 벗겨진 세상. 필용과 양희도, 조중균씨도 세실리아도 그리고 모두가 진심으로 각자의 삶을 살았구나 생각했다.


3.
나른하다. 햇볕을 온몸으로 쬔 듯하다. 여름같은 책이니 겨울에 딱이다. 생경하고 차가웠던 올해에 안녕을 고하며 읽었다.

오늘이 불안했듯 내일도 불안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앞으로. 햇빛 속으로.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 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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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1-0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삐냥님, 또 새해가..... 이제 새해라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일만 있으시면 좋겠다는 건 확실하네요. ^-^

0, 1, 다음에 바로 3이네요. 숨어있는 2가 궁금하다...

빠삐냥 2021-01-01 14:51   좋아요 0 | URL
날카로우신 syo님! 2는 올리기 직전에 다시 읽으니 아무래도 tmi인가 싶어서 지웠답니다... 리뷰라는 게 책 이야기를 하는 자린데 자꾸 개인사가 튀어나와서요ㅎㅎ (저는 부끄럼이 많습니다!) 난 자리를 알아주시니 머쓱하면서도 기쁘네요.

올 한 해 syo님의 서재 덕분에 더 많은 책을 더 즐겁게 읽었어요. syo님도 좋은 일만 가득한 2021년 보내시길 바랍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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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삼중으로 추천을 받아 읽었다. 
김하나 작가의 추천사, 모 유투버, 그리고 알라딘 추천마법사.
신간 추천을 받기는 쉬운데 흘려보낸 좋은 책들은 알기 힘들다. 알아도 다는 못 읽지만.

1.
집이란 단어가 좋다.
ㅈ-ㅣ-ㅂ. 웃을 듯 입꼬리를 늘이다 금세 입술을 꾹 다문다. 집.
내가 나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세상을 바깥에 가둘 수 있는 공간이다.
(이사 경험이야 많지만) 다행히도 이제껏 집이 없어 본 적은 없기에 내게 집이란 개념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전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가족이 함께 있으면 그게 집이지~ 라고 말할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자라났다는 말이다. 

2.
집을 주제로 하는 책이라는 걸 알자마자 코로나 때문인가 싶었다. 2020년 일어난 일 중 코로나 때문이 아닌 게 더 적겠지만. 실내생활의 비중이 높을수록 집이란 공간의 의미는 커진다. 단점도 장점도 미처 몰랐던 자질구레한 특징도 더 크게 다가온다. 읽으면서 쭉,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이 집밖에 없다면? 전염병이 도는 이 추운 겨울 몸 둘 곳이 딱 여기뿐이라면?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은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다.

3.
책의 흐름에 따라 작가는 계속 자라나고 이동한다. 성장소설의 템포다.
어린 시절 어디 살아? 묻는 친구에게 집을 자랑하고 싶었던 욕망을 지나,  집을 누구보다 열심히 가꾸면서도 엄마-작가의 외할머니-를 단 두 번 밖에 초대하지 못한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이내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집 다운) 집을 꾸미는 설렘과 기쁨이 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나는 이를 승리의 역사로 읽었다.

읽는 내내 내 집과 내가 살아온 집들이 겹쳐져 보였다. 내 기억이 이렇게 선명한 줄 나도 몰랐는데. 집이 뭐라고, 떠올리니 바로 떠오르는 풍경들이 있더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이 사람은 이런 집들에서 살아서 이런 사람이 되었고, 나는 다른 집들에서 자라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4.
7장 <서재의 주인>은 따로 떼어 봐도 훌륭하다. 부제 '나의 자리, 엄마의 자리'도 좋다. 서재를 만든다는 것. 그곳의 주인이라는 것! 아, 읽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충만해진다. 

5.
황선재 작가는 친애하는 그의 집, 그의 개인사, 그의 공간에 대해 말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집, 나의 개인사, 나의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진솔한 만큼 나도 솔직해진다. 집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정말 소중하다고 서로 맞장구치며 한참 수다를 떤다.

연말에 내려갈 때 들고 가야겠다. 엄마랑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난을 나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 P58

내가 자기만의 방을 소망할 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 P135

가족 각자가 이룬 것은 엄마가 이룬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해내는 것은, 엄마가 씁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때뿐이었다. "나는 평생 이룬 게 하나도 없구나."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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