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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재영씨
신재영 지음 / 에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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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열심히 일을 했다. 공장도 다녔고 편의점에서 일했고 전단도 돌렸다. 그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 죽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군산과 부산과 마산과 대구와 경산과 포항과 섬으로 갔다. 돈은 흥청망청 다 써버렸고 그냥 무일푼으로 다녔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무전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맞다 그 당시 무전여행이 약간 유행이기도 했던 것 같다.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했고 표를 끊지 않고 몰래 기차를 타고 검표할 땐 화장실로 숨기도 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반갑게 인사를 해줬다. 자기 아들도 무전여행을 보내고 싶다며 밥도 사주고 용돈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부분 활짝 웃으며 안녕이라고 해줬다. 그리고 자살을 결행했지만 실패한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를 내려봐 주시던 노숙하던 할배도 내가 죽으려던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활짝 웃으며 깼구나? 밥 먹어야지 하며 인사를 해줬다.

 

1999년 사형선고처럼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을 한 후 어마 무시하게 빚을 지고 이제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떠돌던 때에는 온라인 카페에서 알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고 술을 얻어 마셨다. 그들 모두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 않았고 그저 안녕이라고 인사를 해줬다. 눈이 펑펑 내리던 1231일 광화문에 있는 정동극장에서 자정이 되기 전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의 내용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마지막 대사 오겡끼데스까?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 있다면 누구보다 활짝 웃으며 누구에게든 인사를 잘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많이 타락한 것은 인사를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 나를 자극해주는 것은

 

2014년 안녕의 천재 하재욱이 안녕 하루라는 책을 냈다. 그의 인사와 그의 하루는 늘 성실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참 행운인 거 같다.

 

202111월 친애하는 김은경 시인이 자신의 이름을 안녕이라 바꾸고 사랑의 근력이란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은 제목보다 시인의 이름이 더 중요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2023년 성윤석 시인은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란 시집을 냈다.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쓰는 행위가 내게는 선명한 하지만 무심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 읽게 된 편의점 재영씨라는 책은 사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읽은 책에 가깝다. 그런데 재영씨가 편의점이라는 길 위에서 사람들과 나누는 인사가 사라져버린 어제와 오지 않을 내일 사이에서 선명하게 하지만 무심하게 하는 인사가 고단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토닥거리는 봄바람과 무심한 듯 안아주는 눈송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었구나 생각이 되었다. 난 다시 나의 일상에 좀 더 성의껏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당신에게 일상의 인사를 권하고 싶다.

 


나헌티 웃어주고 그려서 고마웠어유.
~~~~

사람은 단 하루만 산다. 어제는 이미 없고 내일은 원래 없는 것. 잃어버린 엄지손가락 만나러 아저씨 먼 길 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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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라일락 시인의일요일시집 13
석민재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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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형태나 모양을 지니지 말고 물처럼 유연해야 한다. 물을 컵에 따르면 물은 컵이 된다. 물을 병에 따르면 물은 병이 된다. 물을 찻주전자에 따르면 물은 찻주전자가 된다. 물은 한 방울씩 떨어지기도 하고 요란하게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 – 이소룡

이소룡이 입었던 모양과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배꼽에 힘을 팍 주고 그녀는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걷고 또 걸어서 보폭을 확보해나가는 일 그 걸음걸음마다 호흡을 심고 형상을 심고 세계를 심는 일 그래서 그 세계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 그게 바로 그녀의 시 쓰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주 충고한다. 그리로 가면 안 된다. 저리로 가라. 그렇게 걸으면 안 된다. 이렇게 걸어야 더 돋보인다. 사람들과 같이 걸어라. 앞서 걸어라. 하지만 그녀는 그런 소리를 가만히 두고 다른 길을 걷는다. 자신만의 보폭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
울고 싶은 대로 울었다
내가
입을 다물면
돌이 소리 지를 것 같았다 - 울고 싶은 대로 울었다 중에서
그러니까 그녀의 울음조차 그녀의 걸음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그녀가 걷는 방식은 목적과 쓸모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녀의 걸음은 정말 정말과 진짜 진짜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
-한곳에 오래 있으면 발이 간질거립니다 무리에 어울리는 요령이 없는 내게 사건을 순서대로 적는 습관을 길러라고 합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 같아도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 화심 중
그러니까 자신만의 보폭을 확보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세계에 그녀는 감히 닿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가가 귀찮아서 기뻐서 티격태격 다음에도 어색해서 처음이라서 말할 수 없어서 이게 전부라서 기가 차서 비 온다고 눈 왔다고 배부르다고 들었다고 좋겠다고 띄어서 아니 마구마구 붙여서 발전도 방향도 없이 가가를 이 만큼 저런 사례 축하한다고 반갑다고 맛도 멋도 아니라고 앞으로도 뒤로도 필사 필사적으로 기대도 이익도 없이- 가가는 가가 중에서
그러니까 어쩌면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걸음을 믿고 그 걸음이 이끄는 곳에 닿고자 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훌륭한 말들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가버립니다 – 내시경 중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가는 걸음이 이끄는 곳은 아름답고 쓸모 있다고 불리는 세계가 아니라 서러운 귀신의 세계 그러니까 그녀는 귀신의 계승자
조금 놓아버리면 조금의 평화가 오고 크게 놓아버리면 큰 평화를 얻을 것이니* 냉정하게 뒤집어도 나는 모방범이 아니다 유일한 계승자다 - 回 중
그러니까
- 나는 나를 뒤집어야 살 수 있다 – 오뚝이에게 중
그녀는 살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어른의 문법과 어른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걷고 또 걷는 중
-
모든 대답이 빠져나가도
우리는 노래로 전전할 수 있으니
입이 총구가 되지 않게
밥이 벽이 되지 않게 - 어떤 경우라도 나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중
그러니까 그녀의 걷는 방식은 그녀가 숨 쉬는 방식 그리고 노래하는 방식 춤추는 방식 악착같이 자신에게 닿고자 하는 울음
그래, 라일락

봄에 찾아온 그녀를 닮은 시집 울음을 감춰둔 이들에게 울고 싶은 대로 울라고 말하며 권하고 싶다.

모든 대답이 빠져나가도
우리는 노래로 전전할 수 있으니

입이 총구가 되지 않게
밥이 벽이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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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언니 시점 - 삐뚤어진 세상, 똑부러지게 산다
김지혜 외 14인 지음 / 파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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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 뮤리얼 루카이저

 

세계에서 역사라는 것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여자들의 이야기를 지운 기록이지 않을까? 뮤리얼 루카이저가 저 말을 꺼낸 지 50년이 지났고 이제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하다고 하거나 오히려 남자들이 억압을 당한다고 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또 여자를 억압하고 여자에게 피해를 주는 건 오히려 여자들의 질투라는 얘기들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들이 그런 얘기들을 함부로 지껄이고 일부 여자들이 남자와 겨루기 위해 남자의 언어라는 칼을 들었을 때 다시 한번 더 침묵 속에 빠지는 여자들의 삶이 있고 삶 속에 여자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럴 때 어떤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걸기 시작하는 풍경을 떠올려본 적이 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말해야만 한다.침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모든 것에 속게 되니까.[....]우선 말해야만 한다.이 경우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무엇이건 말해야 한다.럭비 게임에서 첫발을 내디디는 것과 같이,말을 통하여,말을 거스르며,자신과 함께 말을 훈련시키고,그 말과 부딪치면서,왜곡시키고 돌진하는 것이다.

-프랑시스 퐁쥬의 '프로엠므'에서-

 

여자들은 겨루는 말 대신 걷고 일상을 살고 극복하고 서로 손을 내밀고 다시 웃으며 수다를 떤다. 여자들은 전쟁에 빠지지 않고 다시 먹이고 키우고 삶을 사랑하며 삶의 순간들을 위해 기도한다. 멍드는 삶과 기도하는 삶과 여자로 사는 삶에 대해 남자들이 우선 읽었으면 하는 책 물론 여자들도 좋아할 만한 책 한 권을 추천해본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자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사무실에 들어가고 사장과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다 사장이 나간다. 사장이 나가면 부장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큰소리로 ‘커피’라고 소리를 지른다. - 한진수 나비반지 중

-나는 한 마리의 젓소, 눈앞의 냉혈인은 목장 입장료도 안 낸 주제에 젖소를 구경하고 있다. 수치스러웠다. 화도 났다. 더는 탐닉의 대상이 아닌 자기 아이를 먹일 젖가슴일 뿐이었다. 동시에 눈앞에 스물다섯의 팽팽한 가슴을 뽐내는 그 여자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 홍소영 울지 않는다 중

아시잖아요. A는 평소에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 어쩌다 꽃뱀한테 걸려 욱하는 마음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사실 그 여자도 잘못이잖아요? 유부녀가 그러면 안되는 거죠. ....어쩌면 그곳에 평생 갇혀서, 출소하는 날이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는 그 사건의 피해자, 그녀의 보이지 않는 감옥을 어설프게 가늠하여 본다.
- 허성애 장르는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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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아침달 시집 28
성윤석 지음 / 아침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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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아는 것에 가둬질 것이니까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읽은 책 안에 갇힐 것이니까
하나를 배우면 열을 궁금해하고 그 열 개의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러나 그 장면 안에 가둘 수 없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를 쓴다면
그 사람은 이 순간을 무섭도록 살아있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이 곧 지나갈 것이기에
순간을 부술 날개를 날마다 생성하려 할 것이다
성윤석 시인의 시는 늘 치열한 날갯짓의 기록이지만
새로운 날개의 생성을 도모하는 어슬렁거림이기도 하고
만들어진 완성을 부스러뜨리는 실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성윤석 시인이 이번에 –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란 시집을 냈다.
그 시집 안에는 우리가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일상의 순간들을 가지고 와서
그 순간 안에 들어가 놀기도 하고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돌을 던져보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보며 순간을 어지럽힌다. 어지럽히는 순간들이 무성해지면 그는 순간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간다. 순간에 갇힌 삶을 사는 당신 올 한 해 수고 많으셨고 내년에는 좀 더 재밌게 살기를 바라며 이 시집을 추천해본다.


인생에는 별의 것이 없지만
별것은 별에게나 있겠지만
나는 다 답할 수 없다
아직 팬티까지 벗고 달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 사는가
나는 직업이 있는가
나는 혼자인가 가족이 있는가
나는 죽었는가 살아 있는가
나도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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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희미해진 사람 걷는사람 시인선 74
김미소 지음 / 걷는사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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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같은 마음은 무섭다

깨진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 파편을 이리저리 굴리며 아프게 살아가니까
하지만 유리 같은 마음만이 빛나는 순간이 있다.
김미소 님의 시는 기교가 아니라 유리 같은
마음으로 쓴 것처럼 느껴져 읽을 때마다
자꾸 찔리고 아프다
하지만 희미해져 있던 마음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다.
희미해진 마음들에게 김미소 시인의 시집을 추천하고 싶은 추운 날이다.
동봉하는 시는 시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시
놀이터
​ 김미소
너와 나의 교감은 멀어졌다 가까워진다
줄의 탄성이 사라질 때까지
표정을 확인하려 할 때마다
허공은 분명해지고
뒷모습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도
밀어주는 사람을 또 밀어주는 사람은 없다
구름에 가까워지면 구름의 태도가 보일까
몇 번이고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끝나지 않은 운동
발밑의 모래알이 날씨처럼 흩뿌려지면
추락하는 기분을 이해할까
놀이터의 진짜 용도를 알아가기엔
나는 지나치게 놀이를 모른다
또 다른 아이다움이 필요하다면 뛰어내릴 것
스스로 혼자가 되는 법을 알았지만
자주 엎어지고도 웃을 것
착지와 동시에 분산되는 모래의
균형을 안녕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돌아간 저녁의 부피는 가라앉는다
빠져나간 한 줌의 석조(石造)를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돌아간 식탁에는
간혹 개미가 돌아다닌다
개미에게 식탁은 놀이터였을까 작업장이었을까
다섯 살의 내가 작업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문득 여섯 살이 되는 밤을 지난다

나는 괜찮습니다
흐린 날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꾹 눌러쓴 이름이
흩어지던 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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