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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평점 :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오롯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
─ 장자크 루소
...우리는 쇼핑몰의 현금 자동 인출기 앞에 줄 서 있다. 가림막 없는 고해 성사소. 지급기 화면이 뜨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동작. 기다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번호판을 누르고, 기다리고, 돈을 챙기고, 집어넣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떠나가기.
...파리행 열차에서 남자가 젊은 여성에게 묻는다. 〈주당 몇 시간 일해요?〉, 〈몇 시에 근무 시작이죠?〉, 〈원할 때 휴가 낼 수 있어요?〉. 어떤 직업의 이로운 점과 불편한 점을 평가해야 할 필요성, 생활의 구체적 현실. 불필요한 호기심, 무미한 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앎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는지를 알기.
....그 어떤 묘사도, 그 어떤 이야기도 부재. 그저 순간들, 만남들. 에트노텍스트들.
...이렇게 늘 다음의 법칙이 경험적으로 확인된다. 즉, 자신이 어떤 말들을 이제는 사용하지 않으면 그 말들이 사라졌다고, 자신이 먹고살 만하면 가난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또 다른 법칙, 그것은 정확히 그 반대인데, 오래전에 떠나왔던 도시로 돌아가면서 과거 그대로 변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리라고 지레짐작하기. 두 경우 모두, 현실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유일한 척도가 나뿐이라는 공통점을 가짐. 첫 번째 경우가 타인 전부를 자신과 동일시하기라면, 두 번째 경우는 우리가 도시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본 그 이미지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존재들에게서 예전의 나를 되찾으려는 욕망.
...그녀 주위로 반원을 그리며 둘러선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끄덕인다. 당연히 그 어떤 동정도 없는 것이, 그 철저한 고독은 고독이 아님을 ─ 현실의 고독은 그려 낼 말이 없으며,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자신들 역시 〈실추〉할 수 있으면, 다시 말해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음을 잘 알고 있기에. 작가 역시 그것을,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함을 안다. 사람들의 뇌리 저 안쪽에서 진실은 작동한다.
...어떤 때는, 슈퍼마켓의 계산대에 줄 서 기다리는 여자에게서 어머니의 말과 몸짓을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바로 바깥에, 전철이나 RER의 승객들과 갈르리 라파예트나 오샹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사람들 안에 나의 지나온 삶이 침잠되어 있다. 자신들이 내 역사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심조차 않는 무명의 사람들, 내가 결코 다시 보게 되지 못할 얼굴들, 육체들 안에. 아마도 거리와 상점의 군중에 섞여 든 나 역시 타인의 삶을 지니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