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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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백범일지에 쓰였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에게 일본 순사는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당연”하다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했다. 그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는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한다. 이 책 제목은 세계 곳곳에서 뭉우리돌처럼 박혀 대한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그들을 기리며 지었다.




...그것은 효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밀어내, 그 자리에 독립이란 두 글자를 채우는 일이다. 손가락을 끊어내는 회맹은 그들을 얼마나 벅차오르게 만들었을까. 부모도 자신도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순수의 경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들은 단지 순간 완벽한 고요와 평안 속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 어떤 고통도, 그 어떤 번뇌도 느끼지 못하는 초월자가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민족의 안다미를 짊어지겠다는 거룩함이자 고귀함의 징표다. 그래서 단지, 단지는 단지가 아니다.





...비석이 보내는 신호는 한국 사람이라면 해석이 가능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을 거다. 이는 어떤 끌림이다. 자기력 같은 그 힘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연상을 돕는다. 그래서 비석 하나를 세우는 일은 잠자던 지박령을 깨워 강력한 아우라를 발산시키는 일이다. 그 기운은 공의 허허로움을 채워 격조한 역사를 다시 인식하게 해준다. 최소한의 배경을 전달하고, 공간이 가진 서사에 사람들을 동감하게 한다. 이때 원본만이 내뿜을 수 있는 고결한 아우라가 발동한다. 눈앞에 서 있는 기념비는 그래서 그냥 돌덩어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그 에너지는 이곳을 회상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내가 서태지의 헌정에 경의를 표하는 이유다.





...다시 이준의 비명이 떠올랐다. 그는 저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지탱할 수 없던 지독한 패배감과 무기력감 앞에 무릎이 꺾였던 건 아닐까. 그 헤아릴 수 없는 비애감 앞에 식음을 전폐한 그는 서서히 죽음의 신에게 자기 자신을 몰아간 건 아닐까. 진정 이준이 하고자 한 건 신 앞에서 우리에게 왜 이런 고난과 역경을 안겨주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있다면 내가 그 짐을 짊어지겠노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만약 그가 신 앞에 섰다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갔으면, 그에게는 물을 죄가 없으니.





...사진가는 없음에 절망하기보단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 깨달음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주변인이 아닌, 안에서 안을 보는 내부자의 시선이어야 한다. 그것이 과거 서사를 이미지로 기록하는 자의 자세이자 태도다. 사진 한 장은 그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여정을 즐겨야 하고, 치열하게 본질을 꿰뚫고자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셔터는 이 모든 게 만족스러울 때 눌러야 마땅하다. 그렇게 촬영된 작품은 단순히 심미적 이미지로 귀결되지 않는다. 미美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넘어 사진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애정이다.






...사적지에 세워진 조형물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공간을 강력한 회상의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자기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간 어떤 시간의 한 토막을 확인한다. 흥미롭게도 돌이킬 수 없는 그 과거에 대한 연상은 결국에는 사라진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그래서 회상의 공간은 무엇이든 부재할 수 있다는 공포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상설의 흔적은 오래전 소멸했다. 현장은 아무것도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못한다. 단지 한 독립운동가가 쑤이펀허 어디쯤에서 허공에 날려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곱씹게 할 뿐. 그래서 이상설의 유산은 그의 죽음 자체인지 모르겠다.





...이인섭이 기록해 놓은 마지막 모습은 이렇다.

“내가 죽을 자리를 내가 잡을 것이다” 하고 자기를 사형리들이 세웠던 자리에서 13보를 엄숙하고 정직하며 진중한 태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서 헤이룽강 물이 휩싸고 도는 파도에 하얀 물결이 넘치는 검고 푸른 바윗돌 위에 마치 기념 동상처럼 우뚝하게 올라섰다. 수많은 관중들은 모두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그를 향해 침묵에 잠기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자신을 쓰러트릴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죽어 누울 자리의 선택에서조차 주인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몽매한 자들이 팔과 다리를 옭아매고,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려도 그녀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이는 죽음 앞에서 연민, 분노, 허무가 가슴을 뒤틀며 절명의 고통을 주는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복수였다.





...우리 독립운동엔 다양한 노선이 존재한다.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중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적잖다. 광복 이후 남한은 반공 체제 수립을 위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역사에서 지워버렸고, 북한은 김일성 신격화를 위해 이들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냈다. ‘역사가 된 기억’과 ‘역사가 되지 못한 기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역사가 승자의 편에 서면 불가피하게 의도적 망각을 수반한다. 그 과정에서 이인섭처럼 자기 배반의 희생자로 남은 사람들이 있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머물지 못한 얼굴 없는 사람 말이다. 어쩜 이인섭은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기억 그 자체를 상징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가 남긴 기록은 모두의 기억에 남겨야 할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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