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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자연의 세계에는 위계의 질서가 없고 수평의 질서만이 존재한다. 자연은 특정대상을 편애하지도 폄하하지도 않는다. 자연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은 뻘밭을 기는 지렁이와 늦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색바랜 나뭇잎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자연을 응시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에 대해서 결코 무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평무사한 세계 앞에서 무심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심란하기만 하다.
수평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지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를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한 마리 잠자리가 펼쳐놓은 고요한 수평 앞에서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시인은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 속에서 공평무사한 자연의 질서를 읽어낸다. 시집 <가재미>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수평의 시학이며, 시인은 번잡한 수직의 세계 속에서 수평의 미학을 발견하여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낸다.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수련 中-
넝쿨에서 넝쿨이
독 같은 새순이 평면적으로 솟는다
평면에 중독된 나의 질환 같다
(중략)
한 세계가 평면적으로 솟는다
-넝쿨의 비유 中-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에 눕고 싶다 했다
-마루 中-
수평은 대상과 대상을 나란하게 연결시켜 주는 선(線)이다. 그 나란함은 자신의 눈높이를 대상에게 맞추었을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 평등한 선(線), 수평 앞에서 시인은 한없이 겸손하다. 그럴 때 대상은 고요하지만 내밀한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문태준 시의 독특한 서정성은 사물을 수평적 관계로 들여다 보는, 세계를 낮은 자세로 응시하려는 시인의 투명한 마음이 빚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수평적 시학을 사물과 사물에서 사물과 사람에게로,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확장시킨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암투병으로 초췌하게 누워있는 그녀에게서 시인은 바짝 엎드린 가재미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 옆으로 가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내고 시인은 그녀의 눈물 속에서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그녀의 물 속 삶으로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들어가 마침내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마저 덤덤하다.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마리 가재미로 누워 눈을 맞춰 주는 것 뿐. 시인은 이 수평적 눈맞춤을 통해 그녀의 삶을 어루만지고 보듬어 준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옮겨붙은 가재미에게 눈을 마주하는 또 다른 가재미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심할 수가 있을까? 문태준의 시가 우리의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은 한없이 낮은 자세로 사물을, 사람을, 삶을 대하는 시인의 겸손한 시선 때문이지 않을까. '극빈과 수평의 시학'으로 빚어낸 그의 시는 묘하게도 진한 시적교감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