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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ㅣ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그의 시의 목소리는 비 온 다음날 뻘밭을 기는 지렁이의 행보를 닮은가 싶더니, 어느새 뿌연 수면을 내리찍는 물총새 부리처럼 날카롭다. - 이성복의 소개글 中 -
시인 이성복의 말처럼 문태준의 시는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기도 한' 낡고 풋풋한 감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의 시를 먼저 읽고 작가의 이력을 나중에 들춰본다면 '1970년대 출생'이라는 숫자에 조금은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196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시골풍경을 그려내는 시인의 시선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들여다보는 듯, 마치 이제는 사라져버린 풍경사진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아마도 시인 문태준에게 시간은 매우 더디게 흘러가는가 보다. 어물전 개조개가 몸 바깥으로 천천히 맨발을 내밀어 보는 그 속도와 같이......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시인은 한 호흡이라 부른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시간을 숨을 한번 들이시고 내쉬는 짧은 호흡에 비유하는가 하면,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그 시간들은 결코 동일한 시간일 수가 없다. 시인은 시간의 간극을, 대상과 대상 사이의 그 간극을, 매우 느린 속도로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간극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내밀한 풍경들을 포착하고 만다.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순간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맨발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 이 사이 /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당신과 나 사이 /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음의 어둠 사이에 /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문태준의 시는 낡은 풍경을 마치 처음보는 풍경처럼 새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시어는 쉽고 평이하지만 대상과 대상을 연결짓는 행간의 이음새는 진부하지 않고 독창적이며 각각의 시들은 미묘한 감정의 지점들을 매번 건들리고 있다. 한국 현대시가 빠른 속도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려 형식적인 기교에만 집착하고 있을 때, 문태준은 매우 느릿한 시선으로 사물을, 자연을, 사람을 깊이 들여다본다. 느림의 미학으로 다져놓은 그의 시들은 개조개의 맨발과 같은 속도로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을 훓고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