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이탈리아의 졸전 이미지가 유명한지라 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도 호구였다는 인식이 퍼져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은 2류 수준이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호구 수준까지는 아니었음.


일단 이탈리아 전선은 서부전선과는 달리 험한 산악지대 였음. 여기는 싸우다가 산사태 날 확률이 높은 지형에다가 워낙 험해서 군수물자 보급을 빠르게 할 수 없는 동네인지라 아마 1차대전 주요 전장 중에 가장 최악인 곳을 꼽으라면 바로 캅카스와 이곳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임.


그런데 1차세계대전 내내 이탈리아군의 방침은 이손초 강을 공격전선으로 삼아서 드라바 강과 사바 강으로 열린 관문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본토를 공격한다는 전략이었고 실제로 3개월 한번 공세할 정도로 프랑스군이나 영국군보다 공격 빈도도 높았음. 생각해보면 1류 국가였던 영국, 프랑스도 그나마 평지인 서부전선도 참호뚫고 전진하느라 큰 희생을 치렀는데 얘네는 무려 산악지대에서 저짓할 수 밖에 없었으니 피해가 많이 나오는건 당연한 일임.


또 하나 재미있는건 이탈리아군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의 핵심인 사르데냐 왕국군 계열 장교단이 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입대 허용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보였었음. 그리고 참모총장인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은 전쟁 중에 후퇴한 장군들을 죄다 면직시키는 굉장히 원칙적이었기에 규율과 군기는 의외로 잘 잡혔었다고 함.


거기다가 이탈리아는 통일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다가 지역 차이도 심한 곳이라서 북부 출신과 남부 출신들의 통학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 와중에 비록 성과는 전혀 없었지만 산악지대를 열한차례나 공격을 했으며 카포레토 공세 직전 이탈리아군은 드디어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함.


그리고 곧바로 이탈리아군 역사상 가장 최악의 참패인 카포레토 전투가 시작되는데 분명히 이 공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을 독일제국군이 적극적으로 도왔었는데다가 독가스 공격을 날렸음. 휴돌턴이라는 장교도 이탈리아군의 방독면이 효과가 없었다고 기록한 걸 보면 이때까지 서부전선과 달리 이탈리아 전선에는 독가스 살포가 거의 없었다보니 당연히 이탈리아군이 제대로 화학전에 맞설 수가 없었다고 봄.


그 외에도 이탈리아 개개인 장병들도 나름 잘 싸웠었음. 앞서 말했듯이 산악지대 지형의 특성상 암석에 포격이 맞아서 이게 전장에 떨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하는 상황과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하게 이탈리아군 장병들을 싸워왔음.


또한 알프스 지리에 익숙한 산악부대 '아르디티'는 독일군의 충격 전술 부대 스톰 트루퍼에서 모티브를 따온 산악부대로서 단도 등을 활용한 백병전에 능했음. 이들은 육탄전과 기습 훈련을 비롯한 각종 특수훈련들로 단련된 최정예들이었으며 기관총과 기관단총 같은 자동화기 뿐만 아니라 수류탄도 대량으로 보유했으며 단도도 백병전용으로 자주 사용했다고 함. 월급과 식사 및 병영의 질도 일반부대보다 좋았는데 덕분에 단결심과 동지애는 뛰어났다고 함.


이렇듯 이탈리아군은 물론 무능한 면이 있긴 했었어도 의외로 괜찮은 부분도 없진 않았었음. 그리고 2차대전 당시 무솔리니 정권의 이탈리아군의 무능함과 비교해보자면 1차세계대전 이탈리아군은 정말 양반임.


출처:

- 존 키건, <1차세계대전사>, 청아람미디어, 2016, p326~327, p485~487

- https://en.m.wikipedia.org/wiki/Arditi

- 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Vittorio_Veneto

- https://www.history.co.uk/italy-in-wwi

- 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warfare_1914-1918_italy

- 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arditi

- https://m.dcinside.com/board/kaiserreich/1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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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쟁으로 체첸 반군 세력들은 순식간에 수도였던 그로즈니를 잃고 다시 남쪽 산악지대로 밀려갔다. 그들은 산악지대에서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항쟁을 이어갔지만 이미 과격화 된지라 예전만큼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실제로 한 때 두다예프 정권에 협력했었던 아흐마트 카디로프는 이제 완전히 러시아 연방의 편으로 돌아서버린 후였다.


한편 체첸 세력은 무자헤딘의 영향으로 어느덧 '민족 해방'이라는 목표가 '이슬람 국가의 수립'으로 바뀌어갔다. 2000년 3월, 1천명의 체첸 반군들은 러시아군 진지를 기습하였고 그해 5월에는 원격 폭탄을 이용해 즈베르예프 장군을 살해하는 등 체첸 반군 세력들은 기존의 산악 게릴라 전 외에도 이젠 테러 전술까지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2001년 11월, 러시아군에 의해 가족이 사망한 가즈예프라는 체첸인 여성이 러시아 장군인 가드지에프를 자살폭탄 공격으로 죽였다. 또한 다음달에는 러시아군을 향해 폭발물을 실은 트럭을 몰고 돌진하던 15세의 체첸인 소녀가 총에 맞아 사살되었고 그 외에도 각종 자살폭탄 테러들이 2002년까지 러시아에서 여러번 벌어졌다.


특히 2002년 1월에는 모스크바 극장에 들이닥친 40명의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민간인 700명을 인질로 잡는 사태가 발생했다.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체첸 공화국에서의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군은 강경 진압으로 방향을 잡고 극장 내에 독가스를 투입했다. 독가스의 투입으로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제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인질로 잡혔던 민간인 100여명도 같이 희생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일은 2004년 9월, 북오세티야 공화국 부근의 베슬란 학교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당시 베슬란 학교는 30명의 무장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약 1,000명의 인질들이 붙잡혔는데 이때 인질 중에서는 어린이들이 많았고 이후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인질구출작전에서 300명이 넘는 인명피해가 벌어졌다. 그리고 샤밀 바사예프는 모스크바 극장 테러와 함께 베슬란 학교 사건을 자신이 한 짓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당연히 이러한 강경파의 테러 행위는 안 그래도 체첸을 조질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러시아 정부를 자극하는 짓이었기에 러시아와의 협상을 바라는 체첸 반군 세력 내 온건파들의 영향력은 갈 수록 축소되었다. 결국 2005년 2월, 온건파의 핵심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러시아와의 마지막 교섭에 실패하고 다음달에 스페츠나츠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체첸 반군 내 온건파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2006년, 체첸 반군의 사령관이 된 도쿠 우마로프는 드디어 대놓고 본인들의 목표는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샤리아 법으로 통치되는 이슬람 국가라고 밝혔으며 러시아와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나마 몇 안되는 온건파였던 마스하도프의 죽음으로 이제 체첸 반군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로 뭉친 독립군에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폭주를 멈출 수 없는 광신적인 테러조직으로 완전히 타락해버렸다.


한편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인 체첸 공화국의 수장이 된 카디로프는 서방 인권단체에게 '러시아의 앞잡이', '인권 탄압자' 등의 비난을 받게 되자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 대규모 사면 프로그램이라는 당근책을 던져줬고 예상대로 많은 반군들은 자수를 선택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체첸반군의 중심이던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은 2007년에 캅카스 에미레이트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간 열차에서 테러가 벌어진 것에 이어서 2010년 3월 29일,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연쇄 자폭 테러 사건이 터지며 41명이 숨졌고 이어서 다케스탄 지역에서도 자폭 테러로 12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테러를 일으킨 것은 캅카스 에미레이트였다. 2002년 극장 인질 사건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최대 테러인만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이를 심각한 일로 규정하고 다시 체첸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대형 테러가 성공한 도쿠 우마로프는 더욱 기고만장 해졌고 다음해인 2011년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또 다시 자폭테러를 벌였고 이 테러로 사망자 35명, 부상자 180명이 발생했다. 하지만 정작 이미 체첸 반군 세력은 2004년 베슬란 학교 사건 이후로 서방세계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이슬람 근본주의화가 되면서 주민들의 지지까지 사라져버렸기에 세력 확대는 커녕 살아남을 수 있을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추락해버린 상태였다.


결국 2014년 3월, 캅카스 에미레이트의 수장 우마로프는 쫓기던 끝에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캅카스 에미레이트는 IS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등 어떻게든 발악을 하며 단체를 유지할려고 애썼지만 러시아군에게 많은 대원들이 사살되면서 2016년을 끝으로 사실상 궤멸된 상태다.

출처:

- 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한국중동학회논총 31권 3호, 2011, p44~49

- 이종화, <국제인질테러사건의 현황 및 분석>, 위기관리이론과 실천, 한국위기관리논집 제8권 제4호, 2012

- (wikipedia/2010년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 테러) https://ko.m.wikipedia.org/wiki/2010%EB%85%84_%EB%AA%A8%EC%8A%A4%ED%81%AC%EB%B0%94_%EC%A7%80%ED%95%98%EC%B2%A0_%ED%8F%AD%ED%83%84_%ED%85%8C%EB%9F%AC

- (wikipedia/2011년 도모데도보 국제공항 테러) https://ko.m.wikipedia.org/wiki/2011%EB%85%84_%EB%8F%84%EB%AA%A8%EB%8D%B0%EB%8F%84%EB%B3%B4_%EA%B5%AD%EC%A0%9C%EA%B3%B5%ED%95%AD_%ED%85%8C%EB%9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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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인 다케스탄 공화국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지하드를 선포하며 침공했다. 이들을 이끄는 건 체첸 내에서도 강경파로 꼽히는 샤밀 바사예프와 무자헤딘 참전용사 출신인 이븐 알 하타브였고 이 침공의 목표는 체첸과 다케스탄 지역을 아우르는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역민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고 러시아군의 대응으로 몇주 만에 진압된다.


9월에는 러시아 내 주요도시들에서 대규모 테러가 벌어졌다. 이 테러로 수백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주거지들도 상당수가 파괴되는 참사로 이어졌다. 1차 전쟁 때의 회의적인 여론과는 달리 이번에는 직접적인 테러로 대규모 사상자가 나왔기에 당연히 러시아의 여론은 급격하게 반 이슬람, 반 체첸으로 기울며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는데 이는 선거가 다가오는 와중에 상황이 좋지 않던 옐친 정권과 신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에게는 커다란 호재였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체첸인들은 범죄자 성격도 가지고 있다"는 논란이 될 만한 언행을 하면서까지 강경 대응에 대한 의사를 표명했다. 그의 직책상 이런 일은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훗날 블라디미르 푸틴은 독일 <슈피겔> 소속 언론인인 후베르트 자이펠과 만난 자리에서 이때 당시를 두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었다.

" 난 총리로서 공식적으로는 전혀 개입할 권리가 없었다. 그건 대통령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계속 가만히 있었더라면, 러시아는 피로 물든 전쟁으로 끝없이 고통받게 됐을 것이고, 우리는 아마 제2의 유고슬라비아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나선 것이다. "

이렇게나 확고한 그의 의지는 러시아군 수뇌부의 전쟁 결정으로 이어졌고 이를 지켜보던 러시아 국민들도 아직 신임 총리였었던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여론에 힘을 입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주도로 1999년 9월부터 러시아군은 뛰어난 공군력과 조직화 된 10만명의 보병을 동원해 다케스탄 부근의 체첸 반군들을 공격했다. 특히 이번 전쟁은 1차 때와는 달리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1999년 12월, 그로즈니는 러시아군의 화력 앞에 그대로 초토화 되었다. 다음해인 2000년 1월에는 체첸 반군들이 역습해오긴 했지만 러시아군의 대응에 막혀 실패했고 1월 중반쯤에 가서 그로즈니는 러시아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이 당시 러시아군은 1차전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지라 보병과 기갑이 합동으로 작전을 펼칠 때에는 체첸군의 대전차 부대를 러시아군 보병이 상대하게 하거나 지상병력 투입 이전에 먼저 대규모 공습을 하는 등 나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그로즈니가 정리되고 샤밀 바사예프와 이븐 할 하타브가 이끄는 체첸 반군 잔당들이 또다시 남부 산악지대에 들어가자 러시아군도 바로 대응에 나섰다. 예상보다 신속한 러시아군의 대응에 당황한 하타브는 체첸 반군을 이끌고 돌파하는 길을 골랐고 그렇게 하여 2000년 2월 29일부터 우르스 케르트 마을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맞붙게 된다. 초반에 하타브 부대는 뛰어난 산악기습과 능동적인 포위전술로 러시아군을 776고지로 몰아넣고 그들의 증원시도를 저지하고 6중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 다음에 러시아군 각 중대가 모이는 다 크기 전에 한 부대를 겨냥 병력을 집중 격멸, 포위 고리에 구멍을 뚫고 돌파할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러시아군의 포격 지원에 수백명의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한다.


그 후로도 계속 하타브의 부대는 6중대를 공격하며 몰아붙였지만 그들은 4일 동안의 포위공격을 막아냈고 결국 하타브는 작전의 실패를 수용, 러시아군 공수부대가 추격해오기 전에 빨리 잔존 병력들을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퇴각했다. 당연히 러시아군은 포위망을 강화해 그로즈니 남부 산악지대에 남아 있는 체첸 반군들을 소탕했다. 한편 하타브는 우르스 케르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지휘할 수 있는 병력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는 분명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1차 체첸전에 이르기까지 게릴라 지휘관으로서의 이름을 날렸지만 이 전투만큼은 분명 그의 패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븐 알 하타브는 여전히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러시아군에 맞서 크고 작은 저항전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2002년 3월, 그를 계속 살려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FSB(러시아 연방보안국)은 맹독으로 그를 암살했다.


출처:

- 후베르트 자이펠, <푸틴 권력의 논리>, 지식갤러리, 2018, p180~183

- 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2011, p39~42

- 김태연, <체첸에서의 폭력의 전개와 그 관계적 요인>,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러시아연구 제28권 제2호, p61~66

- 현승수, <체첸 전쟁과 국제이슬람 무자헤딘 운동>, 한국이슬람학회, 한국이슬람학회 논총 제17-2집, p129~130

- (776高地の戦い_2000_包囲)
http://warhistory-quest.blog.jp/18-Ju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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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침공이 실패한 이후 1996년 12월 체첸에서는 두다예프의 사망에 따라 두번째 대통령 선거를 진행했다. 이 선거는 온건파의 핵심인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강경파의 핵심인 샤밀 바사예프 간의 대결로 이뤄졌는데 꽤나 큰 표차로 마스하도프가 바사예프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고 한다. 이때 마스하도프는 러시아 연방 정부와 지속적으로 교섭하는 듯 했지만 독자적인 군대를 갖추는 것을 넘어서 아예 체첸 공화국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짓까지 했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마스하도프 정권은 두다예프에 비해 리더쉽이 많이 부족했었다. 그래서인지 체첸 정규군 외에도 각종 무장세력들이 난립하며 군벌화 되어갔고 특히 살만 라두예프가 이끄는 부대들은 두다예프 전 대통령 경호병들까지 흡수한 상태였었다. 그리고 이러한 군벌들 중에서도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바로 전직 무자헤딘 출신인 이븐 알 하타브가 이끄는 훈련 캠프였다.


그가 이끄는 캠프는 공식적으로는 체첸 정부 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론 개인 사령부나 다름 없었다. 러시아 정보 당국 자료에 따르면 하타브가 5개를, 그의 친구인 바사예프가 2개를 맡았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도 아부 바카르 캠프는 양동작전과 테러리스트 교육을, 아부 자파르 캠프는 게릴라 전 훈련을, 야쿠브 캠프는 중화기 사용 훈련을, 다우가트 캠프는 이슬람 프로파간다 전문가 양성을 맡았었다.


2개월에서 6개월에 걸친 고된 훈련을 마친 병사들 중 우수한 인원들은 하라초이 마을에 있는 '와합파' 마드라사로 간다. 여기서는 주로 와하비즘을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교육이 행해졌을 거라고 하는데 갈 수록 체첸 내부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에는 이 것의 영향도 결코 작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하타브의 행보의 목표가 이슬람 국가화이며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힘이 커질 수록 분열만 더 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하타브 본인은 체첸에 내정간섭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정작 그는 해외 이슬람 조직들로부터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가 체첸 내 강경파인 샤밀 바사예프와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독자세력화 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득세를 억제 하려는 마스하도프 정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1998년과 1999년 동안 아르비 바라예프, 람잔 아흐마도프, 살만 라두예프 같은 체첸의 과격주의자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자꾸 납치와 테러들을 계속 벌여대자 옐친 정권은 특사로 블라소프를 체첸에 파견했지만 1998년 5월, 납치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체첸 내에서도 마스하도프 정권은 과격주의자들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하고 오히려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체첸은 서구적 제도 대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법을 도입하게 되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 된 지하경제는 이미 통제불능의 상태였다,


1차 전쟁 이후 러시아 정부는 마스하도프 정부에게 나름 안정화에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마스하도프는 강경파들에게 휘둘리다가 결국 실패했고 1999년 3월에는 특사로 파견된 슈피군도 납치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뒤론 체첸과의 관계 정상화 문제는 완전히 물 건너가버렸다. 한편으로 이븐 알 하타브와 샤밀 바사예프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는지 주변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인 다케스탄 공화국이 내부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정부와 충돌하고 있는 틈을 노려 점령 후 체첸과 통합해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 카스피해로 나아가는 통로를 확보한다는 야심을 실현해나기기로 하였다.


출처: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p214~216

- 장병옥, <체첸-러시아 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중동연구 제29권 1호, 2010, p42~43

- 김태연, <체첸에서의 폭력의 전개와 그 관계적 요인>,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러시아연구 제28권 제2호, p57~61

- 현승수, <체첸 전쟁과 국제 이슬람 무자헤딘 운동>, 한국이슬람학회, 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17-2집, 2007, p120~130

- (wikipedia 'Shamil Basayev') https://en.m.wikipedia.org/wiki/Shamil_Basayev

- (776高地の戦い_2000_包囲) http://warhistory-quest.blog.jp/18-Ju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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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의 독립 이후 한동안 양국은 큰 충돌이 없었다. 우선 보리스 옐친 정권의 경우에는 당시 러시아 경제가 파탄 직전의 상태 였는데다가 국회는 옐친이 추진하는 법안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인내심이 고갈된 옐친은 1993년 2월 대통령령으로 의회 해산 및 헌법 개정을 밀어붙였다가 의회 내 반 옐친 세력이 의회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헌정 위기가 찾아온다.


이에 옐친 정권도 질 수 없다는 집념으로 아예 전차부대까지 끌고 와서 대놓고 의사당을 포격하여 700명이 넘는 사상사가 발생해버렸다. 비록 이 일은 옐친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미 '개혁가' 이미지는 허공으로 날라가버렸기에 그는 여전히 처지가 안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재미있는건 비슷한 시기에 두다예프 치하의 체첸에서도 쿠데타 시도가 벌어졌었고 당시 러시아가 올리가르히와 레드마피아의 난동으로 개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첸도 치안 개판에 국제 밀수사업의 거점인 상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당하게 독립 했지만 상태는 독립 이전보다 훨씬 더 엉망이 되어버린 체첸 내에서는 서서히 반 두다예프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여당이던 바이나흐 민주당 내에서도 지도부 차원에서 정부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었는데 이 때문에 당은 결국 분열되었다. 거기다가 2차 내각 때 부총리로 지명된 마모다예프는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명했었다가 오히려 두다예프의 분노만 자극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두다예프는 1993년 1월, 대통령 직접 통치 체제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도했는데 당연히 의회와 헌법재판소는 이를 막아서다가 강제해산 당했다. 그러자 우마르 아부투하노프와 베슬란 관타미노프를 중심으로 한 반 두다예프 세력은 잠정평의회라는 이름을 걸고 러시아 연방 방첩부(FSK)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저항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1994년 10월과 11월에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를 향해 공격했다. 물론 이때까지 러시아는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처럼 손 쉽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가전은 두다예프 측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 붙잡은 잠정평의회 측 포로들 중에 러시아군 수십명이 있는 것이 확인된다. 두다예프는 만약 체첸의 독립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처형할 것이라며 협박하고 나섰고 고심 끝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체첸이 유전지대로서의 중요성 하다는 것과 재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매우 낮은 지지율을 뒤집을 수단으로서 체첸을 공격하기로 결정, 1994년 12월 11일 러시아군이 체첸 국경을 넘어가면서 1차 체첸 전쟁이 시작되었다.

" 1개 공수연대로 단 2시간이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

- 당시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던 파벨 그라초프가 한 말, -

기갑부대를 앞세운 러시아군 3만명의 목표는 오로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였다. 그로즈니 진입 과정에서 12월 31일에는 러시아군 6천명이 시가지 곳곳에서 숨은 체첸 무장대원들이 발사하는 대전차무기에 피해를 입었으며 선봉인 러시아 장갑차량 부대는 시가에 밀려들어갔다가 3일 만에 투입된 BMP 보병 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잃는 커다란 대굴욕을 맞봐야 했고 더 나아가서 그로즈니에서만 T-80 전차 68대 중 67대가 다 박살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애초에 러시아군은 준비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었다. 전선에 투입된 부대는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된 급조 부대였으며 몇몇은 무기조차도 없었고 명령도 엉뚱하게 들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전차병들에게는 기관총탄이 지급되지 않았었고 시가지에서 진행한 보병의 하자와 엄호가 없는 전차와 보병수송차는 측면이나 윗면을 향해 발사하는 대전차 사수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그 와중에 항공정찰과 러시아 위성 정찰도 돈 절약 문제로 인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연히 중요한 군사작전을 수행할려면 현장지휘관들에게 항공사진과 대축척 지도를 제공해줬어야 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첩보 상황은 매우 불명확했으나 작전입안자들은 체첸인들이 도시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예측하거나 기초적인 대응책을 취하는데 실패했다.


거기다가 당시 러시아군에게는 적절한 예비대의 지원이 필요한 상태였다. 왜냐면 러시아군은 과거 소련군 시절 때부터 시가전에서는 병력 우세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을 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즈니 전투에는 약 6만명의 러시아군과 1만 2천명의 체첸군이 참전했음에도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건물에 수비 병력을 배치하는 사정으로 인해 충분치 않았었다. 그래서 그로즈니 자체는 2달 안에 점령하긴 하지만 소규모 교전들은 6월까지 연달아 터져나왔었다.


그럼에도 막강한 화력 앞에 러시아군은 큰 손실을 보면서도 체첸 반군을 마침내 남부의 산악지대로 밀어냈다. 이때 상황이 절박해지자 아흐마드 카디로프의 호소를 들은 옛 무자헤딘 자원병들이 모인 의용군들이 체첸 반군에게 대거 합류한다. 전쟁은 어느덧 잉구셰티아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1995년 6월에는 러시아 남부 부됴노프스크 지역의 병원을 샤말 바사예프 장군과 체첸 결사대원들이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쏴죽이는 사건까지 터졌다. 그리고 훗날 이 일로 바사예프는 체첸의 민족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한편 이 와중에 정작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1995년 4월에 미사일 공격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체첸 반군의 수장인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끈질겼다. 전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러시아군으로부터 약탈한 무기들은 체첸에게 있어 큰 자산이었고 또한 병력 인적자원들도 소련군 복무 경력자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서도 아프가스탄 전에 참전했던 생존 장병들도 꽤 있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러시아군의 교신 내용도 도청할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고 공습을 피하기 위해 근접전투를 전개하는 전술을 사용해 피해를 최소화 했다.


이렇게 전열을 갖춘 체첸은 샤밀 바사예프 총참모장의 주도로 러시아군과의 대결을 넘어서 타킷 범위를 슬슬 일반 시민들로까지 확대했다. 그리하여 부됴노프스크 병원 인질극을 시작으로 벌어진 각종 체첸발 테러들에 대해 러시아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이는 목표였던 러시아 내 반전 정서를 조성하는 것에 성공한다. 이처럼 체첸인들의 질긴 게릴라 전과 소련군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무자헤딘 참전용사들의 도움 역시 체첸 반군어 매복 전술에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븐 알 하타브의 활약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1995년 4월, 샤토이 근처로 러시아군 제245기보연대가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미리 파악한 후 야쉬마르디 남쪽에서 지뢰를 매설하고 2개 분견대와 4개 전투팀으로 나눠 매복하고 있다가 걸려들자 바로 기습했다. 이때 러시아군은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수색조의 전파 교란에 의해 실패했고 러시아군측 지휘관인 테르베르츠 소령이 사살당했다. 그러고 난 뒤에도 체첸 반군은 계속 사격을 갈겨댔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73명 전사, 부상 52명, 차량 20대 파괴라는 큰 손실을 입었다.


구데르메스 전투, 야쉬마르디 전투, 4차 그로즈니 전투, 그리고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 테러 사건까지 터지며 러시아군은 처음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1996년 8월,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 빠졌는데 며칠 후에 바로 체첸 반군은 약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로즈니 시가지에 진입했다. 그들은 증원 시도 저지를 위해 주변 접근로들을 차단했고 러시아군 12,000명은 공항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약 2천명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사실상 패배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옐친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체첸과의 평화협정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약 2년간 지속되었던 전쟁은 러시아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다.

출처: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p157~159, p214~222

- 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2011, p34~37

- 현승수, <체첸 독립운동의 형성과 전개>,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2호, 2009, p490~492

- 이종원, <탈러 분리독립의 선봉 체첸 공화국>,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 CIS 학과, 2016, p14~15

- 박정호, <북 카프카스(North Caucasus) 지역분쟁의 정치•경제적 요인 분석>, 한국외국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연구 제21권 2호, p52~54

- (국방일보/1차 체첸전쟁)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060613/1/BBSMSTR_000000010213/view.do

- (wikipedia 'Frist Chechen War')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 (유용원의 군사세계/러시아 시가전 전술의 변화: 그로즈니 전투의 여파)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8&num=2525

- (유용원의 군사세계/체첸군의 군사교리)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3&num=132228

- (wikipedia '1993 Russian constitutional crisis') http://en.wikipedia.org/wiki/1993_Russian_constitutional_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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