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의 독립 이후 한동안 양국은 큰 충돌이 없었다. 우선 보리스 옐친 정권의 경우에는 당시 러시아 경제가 파탄 직전의 상태 였는데다가 국회는 옐친이 추진하는 법안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인내심이 고갈된 옐친은 1993년 2월 대통령령으로 의회 해산 및 헌법 개정을 밀어붙였다가 의회 내 반 옐친 세력이 의회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헌정 위기가 찾아온다.


이에 옐친 정권도 질 수 없다는 집념으로 아예 전차부대까지 끌고 와서 대놓고 의사당을 포격하여 700명이 넘는 사상사가 발생해버렸다. 비록 이 일은 옐친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미 '개혁가' 이미지는 허공으로 날라가버렸기에 그는 여전히 처지가 안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재미있는건 비슷한 시기에 두다예프 치하의 체첸에서도 쿠데타 시도가 벌어졌었고 당시 러시아가 올리가르히와 레드마피아의 난동으로 개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첸도 치안 개판에 국제 밀수사업의 거점인 상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당하게 독립 했지만 상태는 독립 이전보다 훨씬 더 엉망이 되어버린 체첸 내에서는 서서히 반 두다예프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여당이던 바이나흐 민주당 내에서도 지도부 차원에서 정부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었는데 이 때문에 당은 결국 분열되었다. 거기다가 2차 내각 때 부총리로 지명된 마모다예프는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명했었다가 오히려 두다예프의 분노만 자극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두다예프는 1993년 1월, 대통령 직접 통치 체제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도했는데 당연히 의회와 헌법재판소는 이를 막아서다가 강제해산 당했다. 그러자 우마르 아부투하노프와 베슬란 관타미노프를 중심으로 한 반 두다예프 세력은 잠정평의회라는 이름을 걸고 러시아 연방 방첩부(FSK)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저항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1994년 10월과 11월에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를 향해 공격했다. 물론 이때까지 러시아는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처럼 손 쉽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가전은 두다예프 측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 붙잡은 잠정평의회 측 포로들 중에 러시아군 수십명이 있는 것이 확인된다. 두다예프는 만약 체첸의 독립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처형할 것이라며 협박하고 나섰고 고심 끝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체첸이 유전지대로서의 중요성 하다는 것과 재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매우 낮은 지지율을 뒤집을 수단으로서 체첸을 공격하기로 결정, 1994년 12월 11일 러시아군이 체첸 국경을 넘어가면서 1차 체첸 전쟁이 시작되었다.

" 1개 공수연대로 단 2시간이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

- 당시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던 파벨 그라초프가 한 말, -

기갑부대를 앞세운 러시아군 3만명의 목표는 오로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였다. 그로즈니 진입 과정에서 12월 31일에는 러시아군 6천명이 시가지 곳곳에서 숨은 체첸 무장대원들이 발사하는 대전차무기에 피해를 입었으며 선봉인 러시아 장갑차량 부대는 시가에 밀려들어갔다가 3일 만에 투입된 BMP 보병 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잃는 커다란 대굴욕을 맞봐야 했고 더 나아가서 그로즈니에서만 T-80 전차 68대 중 67대가 다 박살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애초에 러시아군은 준비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었다. 전선에 투입된 부대는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된 급조 부대였으며 몇몇은 무기조차도 없었고 명령도 엉뚱하게 들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전차병들에게는 기관총탄이 지급되지 않았었고 시가지에서 진행한 보병의 하자와 엄호가 없는 전차와 보병수송차는 측면이나 윗면을 향해 발사하는 대전차 사수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그 와중에 항공정찰과 러시아 위성 정찰도 돈 절약 문제로 인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연히 중요한 군사작전을 수행할려면 현장지휘관들에게 항공사진과 대축척 지도를 제공해줬어야 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첩보 상황은 매우 불명확했으나 작전입안자들은 체첸인들이 도시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예측하거나 기초적인 대응책을 취하는데 실패했다.


거기다가 당시 러시아군에게는 적절한 예비대의 지원이 필요한 상태였다. 왜냐면 러시아군은 과거 소련군 시절 때부터 시가전에서는 병력 우세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을 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즈니 전투에는 약 6만명의 러시아군과 1만 2천명의 체첸군이 참전했음에도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건물에 수비 병력을 배치하는 사정으로 인해 충분치 않았었다. 그래서 그로즈니 자체는 2달 안에 점령하긴 하지만 소규모 교전들은 6월까지 연달아 터져나왔었다.


그럼에도 막강한 화력 앞에 러시아군은 큰 손실을 보면서도 체첸 반군을 마침내 남부의 산악지대로 밀어냈다. 이때 상황이 절박해지자 아흐마드 카디로프의 호소를 들은 옛 무자헤딘 자원병들이 모인 의용군들이 체첸 반군에게 대거 합류한다. 전쟁은 어느덧 잉구셰티아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1995년 6월에는 러시아 남부 부됴노프스크 지역의 병원을 샤말 바사예프 장군과 체첸 결사대원들이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쏴죽이는 사건까지 터졌다. 그리고 훗날 이 일로 바사예프는 체첸의 민족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한편 이 와중에 정작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1995년 4월에 미사일 공격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체첸 반군의 수장인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끈질겼다. 전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러시아군으로부터 약탈한 무기들은 체첸에게 있어 큰 자산이었고 또한 병력 인적자원들도 소련군 복무 경력자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서도 아프가스탄 전에 참전했던 생존 장병들도 꽤 있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러시아군의 교신 내용도 도청할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고 공습을 피하기 위해 근접전투를 전개하는 전술을 사용해 피해를 최소화 했다.


이렇게 전열을 갖춘 체첸은 샤밀 바사예프 총참모장의 주도로 러시아군과의 대결을 넘어서 타킷 범위를 슬슬 일반 시민들로까지 확대했다. 그리하여 부됴노프스크 병원 인질극을 시작으로 벌어진 각종 체첸발 테러들에 대해 러시아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이는 목표였던 러시아 내 반전 정서를 조성하는 것에 성공한다. 이처럼 체첸인들의 질긴 게릴라 전과 소련군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무자헤딘 참전용사들의 도움 역시 체첸 반군어 매복 전술에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븐 알 하타브의 활약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1995년 4월, 샤토이 근처로 러시아군 제245기보연대가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미리 파악한 후 야쉬마르디 남쪽에서 지뢰를 매설하고 2개 분견대와 4개 전투팀으로 나눠 매복하고 있다가 걸려들자 바로 기습했다. 이때 러시아군은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수색조의 전파 교란에 의해 실패했고 러시아군측 지휘관인 테르베르츠 소령이 사살당했다. 그러고 난 뒤에도 체첸 반군은 계속 사격을 갈겨댔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73명 전사, 부상 52명, 차량 20대 파괴라는 큰 손실을 입었다.


구데르메스 전투, 야쉬마르디 전투, 4차 그로즈니 전투, 그리고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 테러 사건까지 터지며 러시아군은 처음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1996년 8월,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 빠졌는데 며칠 후에 바로 체첸 반군은 약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로즈니 시가지에 진입했다. 그들은 증원 시도 저지를 위해 주변 접근로들을 차단했고 러시아군 12,000명은 공항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약 2천명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사실상 패배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옐친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체첸과의 평화협정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약 2년간 지속되었던 전쟁은 러시아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다.

출처: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p157~159, p214~222

- 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2011, p34~37

- 현승수, <체첸 독립운동의 형성과 전개>,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2호, 2009, p490~492

- 이종원, <탈러 분리독립의 선봉 체첸 공화국>,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 CIS 학과, 2016, p14~15

- 박정호, <북 카프카스(North Caucasus) 지역분쟁의 정치•경제적 요인 분석>, 한국외국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연구 제21권 2호, p52~54

- (국방일보/1차 체첸전쟁)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060613/1/BBSMSTR_000000010213/view.do

- (wikipedia 'Frist Chechen War')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 (유용원의 군사세계/러시아 시가전 전술의 변화: 그로즈니 전투의 여파)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8&num=2525

- (유용원의 군사세계/체첸군의 군사교리)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3&num=132228

- (wikipedia '1993 Russian constitutional crisis') http://en.wikipedia.org/wiki/1993_Russian_constitutional_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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