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시절 바르샤바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독립을 쟁취한 것을 빼면 근대 시대 동안 강대국에게 지배를 받아왔던 폴란드는 독립과 함께 억눌려있던 민족주의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의 전성기 영토를 되찾자고 부르짖으며 패권주의라는 침략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다.

폴란드는 우선 발트 해 연안과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라루스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주장해왔고 실질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준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틈을 타 1919년에 11만명이었던 병력을 1920년에는 60만명까지 확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폴란드계 미국인들과 연합국 포로들까지 끌어들였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를 지금 러시아 혁명의 혼란으로 러시아의 힘이 빠져있을 때 분리해야 폴란드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판단, 마침내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이때 붉은 소비에트의 등장을 방관할 수 없던 서구 열강들은 폴란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고 자신감을 얻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자신의 영토를 통제할 능력을 되찾을 때까지 키예프에 가능한 한 장기간 주둔할 것"이라며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과거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부터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지주로 군림하며 우크라이나인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기로 악명이 높았었기 때문. 따라서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선 볼셰비키나 폴란드나 둘 다 침략자로 인식되었기에 폴란드의 지배를 거부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 틈을 타서 소련군은 폴란드군을 밀어냈는데 결국 그 해 6월 폴란드군은 키예프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이러면서 장기간 주둔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7월 14일에는 소련군에게 빌뉴스까지 내줬자. 8월 2일에 와서는 바르샤바 60마일 지점까지 소련군이 진격하면서 폴란드는 독립이 다시 물거품이 될 국가 최악의 위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폴란드 총리 그라프스키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두 나라는 1919년 12월 8일 당시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을 제안했는데 이는 남쪽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프셰미실은 폴란드가 차지하되 동부 갈라치아는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엔 영국 외무장관 커즌 경이 이와 비슷한 제안을 소련에게도 했는데 정작 폴란드와 소련 모두 휴전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던 와중 8월 15일,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지휘하는 2만명의 돌격대가 방심하고 있던 소련군을 기습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이 날은 훗날 폴란드의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비스와 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여세를 몰아 폴란드군은 10월 쯤에는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여기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오랜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며 더 이상 이어갈 능력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라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점령하면서 리투아니아와도 갈등을 키웠다. 그 후 소련과는 10월 12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냈고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의 약 13만 5,000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추가로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전투가 벌어지는 영토는 방대했고 군대는 기다란 대형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 덕분에 폴란드군과 소련군 양측은 서로 상대 진영에 어렵지 않게 침투할 수가 있었다. 또한 소련은 폴란드 내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피우수트스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 정권을 수립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폴란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소련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피우수트스키에게 협력했다.

이렇게 독립 직후에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폴란드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비스와 강 어귀에 위치한 단치히는 인구의 90% 이상이 독일인이었지만 연합국은 폴란드에게 항구를 준다는 명목으로 자유도시라는 이름으로 넘겨줬다. 또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에서는 여러차례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이때 폴란드 민병대는 바이마르 공화국군을 대신해서 나온 자유군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지만 패하고 말았다.

한편 동프로이센과 본토가 분리되어 버린 독일은 폴란드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는 1939년 폴란드 침공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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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부터 이어진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은 1950년대를 지나며 부패와 무능, 정책 실패로 인해 불만 여론이 꽤나 많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1958년 말,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에스트라 상륙 이후부터 치열한 전투 끝에 정부군을 격퇴하고 그들의 요충지인 산타클라라를 점령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아바나에 입성하고 바티스타가 쫓겨나며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세워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개혁을 내세웠는데 실제로 1959년 5월부터 토지개혁을 위한 대량의 토지매입 및 빈농을 대상으로 한 분배가 시작된다. 이러한 급진적인 토지개혁 실시에는 체 게바라와 오스카르 피노스 같은 자들의 입김이 컸었다. 거기다가 토지개혁법은 외국인에 의한 토지 소유 및 소작을 금지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유화 했었는데 당연히 쿠바 경제에 지분이 크던 미국 정부는 쿠바와의 거래 중단이라는 압박을 가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대신에 새로운 파트너이자 미국의 적국인 소련과 연간 100만톤 가량의 설탕 및 기타 농산물 매입 및 경제 개발 지원금을 받아내기로 하는 합의를 맺으며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1961년 4월, 미국 CIA의 지원 아래 미국 내 쿠바인 망명자들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 했지만 오히려 전멸 당하고 말았으며 그 후 쿠바는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언했다.


한편 피그스만 침공은 안 그래도 반미로 기울어가던 카스트로의 성향이 더 강경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쿠바는 소련과 접촉하여 미사일 기지를 쿠바에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못가 1961년 10월 14일 기지 건설은 발각되었고 당연히 여기에 분노한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NSC를 소집하고 해상봉쇄를 감행, 미군 합참의장의 주도로 군사경계태세를 데프콘3로 설정하는 한편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 계획까지 수립되었다.


예상보다 단호한 케네디 행정부의 입장에 놀란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결국 한 발 물러섰고 이로써 소련은 10월 28일에 쿠바로부터 소련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결정하며 쿠바 미사일 사태는 종식되었다. 그런데 협상이 마무리 되기 이틀전인 10월 26일, 아직 상황을 잘 파악 못하고 있던 카스트로는 소련 대사관에서 흐루시초프에게 줄 편지를 작성하고 소련 대사에게 전달했고 이를 읽은 소련 대사는 카스트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 당신은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무기를 발사하도록 흐루시초프 동지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카스트로도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만약 그들이 쿠바를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지구상에서 전멸시켜버려야 합니다! "


이를 들은 소련 대사는 상당히 충격 받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전달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곧 편지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흐루시초프에게 전달되었고 흐루시초프는 대책회의 도중 이 편지를 받고 경악한 말투로 이렇게 외쳤다.

" 이건 미친 짓이다. 카스트로는 죽기로 작정하고, 쿠바인들과 우리를 함께 무덤으로 끌고 가기를 원한다! "


10월 28일, 흐루시초프는 카스트로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 답장에서 이미 미국으로부터 쿠바 불침공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제발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흐루시초프는 구세주의 심경으로 혁명을 순교로 승화시켜려는 카스트로를 제정신이 아닌 놈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카스트로는 진지하게 저런 망상을 했는가 하면 그건 소련이 제공한 핵무기의 목적인 침략의 발생시 미국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쿠바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겪어온 굴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쿠바는 현실적으로 미국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쿠바인들과 소련인들이 함께 '마지막 날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무기를 들고' 미국에 저항해야 한다는 1억 총옥쇄론과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실제로 카스트로는 소련 대사를 불러다가 쿠바 상공을 비행하는 미 정찰기를 사격하자고 주장하거나 모스크바 측에 더 강한 군사적인 대응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흐루시초프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은 미국과의 체제 경쟁을 위한 수단 중 하나였으며 먼저 발사할 의도도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즉 방어적 무기로서 배치했다는 의미다. 그러니 흐루시초프가 카스트로의 말 같지도 않는 망상을 바로 일축시켜버린 것이라고 봐고 봐도 무방하다.


출처:

- 최정순, <쿠바혁명과 그 변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문, 1990, p8~12, p30~31, p37~39

- 이창위, <북핵 앞에 선 우리의 선택>, 궁리, 2019, p192~201

- 리처드 파이프스, <공산주의의 역사>, 을유문화사, 2001, p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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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초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측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상당수의 남한 지역은 북괴군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왔다. 이때 북괴는 겉으로는 인민위윈회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 로동당과 내무서(경찰), 검찰 등의 강제력이 구동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점령 후 2주만에 주민에 대한 인구조사와 신상파악을 끝낼 정도로 리 단위 이하의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전쟁은 빨리 끝나지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은 북괴군의 생각보다 견고했고 1950년 7월에는 인민군의 손실 규모가 6만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러면서 겉으로 여유를 가지려던 북괴 정부의 태도는 긴박한 상황에 맞춰서 아예 완전히 전시 총동원 체제로 전환했으며 이는 전쟁 발발 이후에 이제 막 점령했던 남한 지역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14일 북괴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군사동원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적 자원 동원에 나섰다. 여기에 따라서 18세 이상, 37세 이하의 남자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는데 겉으로는 자원이라고 포장했지만 시,군,면 단위로 내려갈 수록 행정기관들에 의한 강제징집이 심각해졌다.

시흥군의 경우에는 8월 이후부터 각 면별로 의용군 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면마다 각자 몇백명씩 할당량을 줬다. 그래서 민청과 여맹, 인민위원회 같은 어용조직들까지 나선 결과 불과 며칠 만에 3,000명이 넘는 인원이 의용군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로 북괴군에게 입대하게 되어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의용군으로 징집된 인원 중에서는 전쟁 전에 대한청년단이라는 반공 단체에서 활동했었던 자도 있다는 것이다. 시흥군 동면 출신 의용군 참가자 210명 중 신원이 확인된 186명 중에 무려 절반 이상인 99명이 대한청년단 출신이다. 또한 보도연맹원 출신도 의외로 꽤 있었는데 이는 아마 일종의 전향자 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던 경력을 씻고 북괴에게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남한 점령지 내 적극적인 의용군 강제 동원 결과인지 안동 부근에 배치된 13사단 병력의 80%는 남한 출신 징집병들이었고 4사단도 약간 더 적은 70% 수준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제 징집으로 끌려온 자들인 만큼 공산주의 이념과 당에 대한 충성심은 당연히 많이 떨어졌고 그래서 훗날 북괴군 중 반공포로들의 구성을 보면 이때 징집된 의용군 출신들이 많았다.

의용군 징집 외에도 노동 동원도 많았다. 내무성은 각 지역인민위원회에게 지시를 내려서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교량이나 도로를 복구하는 공사에 지역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쓰게 했는데 정비에 필요한 망치나 삽 등의 장비는 대원들이 의무적으로 챙기게 했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 방공호 건설에도 동원된 점령지 주민들의 노동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북괴 측은 이승만 정부와 지주 계급이 농민들을 세금으로 괴롭혀왔다고 외치며 이제부터는 각종 세금 징수로부터 해방 시켜주겠다고 외쳤지만 당연히 입만 열면 구라인 북괴답게 지킬리는 없었다. 당장 토지소유권을 증명하려면 160원이나 되는 돈을 납부해야 했고 밀이나 보리, 조 같은 곡식에도 현물세라는 이름으로 세금이 붙어버렸었다.

거기다가 수확고 판정을 받으려면 파종면적에 대한 판정과 예상수확고 판정이 필요했었는데 문제는 북괴 관료들이 아예 한 이삭 당 평균 알수를 세거나 중량을 재가지고 평당 수확고, 총수확고를 정하는 방식이 점령지 주민들에게는 딱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존 이승만 정부의 유상매수 유상분배식 농지개혁에 농민들은 크게 불만이 없었기에 북괴의 사회주의식 토지제도에는 호응이 많을 수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양곡수매라는 이름으로 행 해지는 쌀 수탈도 심각해져갔다. 각 도,군별로 할당량이 정해지자 행정기관들의 주도로 조직적인 동원 활동이 전개되었고 아직 가을 추수 전이라서 농민들은 식량과 자가축적분까지 넘겨줘야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 운반까지 해야 했었고 북괴군을 위한 성금이랍시고 할당량을 정해서 강제 모금을 하기도 했다. 또 석유와 의약품도 중요 물자랍시고 마을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것들을 작은 병 단위까지도 전부 압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북괴의 억압통치가 지속되자 주민들 사이에선 불만이 조성되었고 북괴 측은 이에 맞서서 치안 유지를 위해 자위대(자경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반대파들에 대한 감시명단을 작성하고 인민재판 등의 학살짓을 저지르던 내무서의 협력 아래 칼, 몽둥이, 낫 등으로 무장하고 다니면서 '반동분자'로 분류되는 자들을 숙청하는 것에 앞장서고 다니며 주민들의 원한을 샀다.

요약하자면 6.25 전쟁 초반기 북괴의 남한 지역 통치 방식 매우 가혹한 수준이었으며 전쟁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에 대한 동조 여론이 있던 한국인들의 정서가 반공으로 확실히 기울어가는 것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고 볼 수가 있다.

- 출처: 장병준 <한국전쟁기 북한의 점령지역 동원정책과 '공화국 공민' 만들기>, 2012, KCI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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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은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시작으로 1차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였다. 그러자 피우수트스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무력 뿐이다. 폴란드의 독립 문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패배하고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에 항복할 때만 확실하게 해결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말은 예언이 된다.


1차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많은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타도 1순위이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부에 폴란드인 부대 3개 여단을 만들어 러시아 제국을 향해 싸웠다. 이들 중 기병대는 1915년 6월, 우크라이나 남부 로키트나에서 러시아 제국군에게 과감히 돌격해 커다란 승리를 쟁취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활약을 눈여겨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폴란드 부대들을 동부전선에 배치해줬다.


1916년 11월 5일, 폴란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원 아래 부분적으로나마 독립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국가평의회 군사 책임자 자리에 올랐고 이로써 폴란드인 부대들은 주권국가의 군대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폴란드의 독립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는 듯 했지만 독일 정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폴란드의 장래 보증은 꺼려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영국, 프랑스와 접촉하며 러시아하고만 싸운다고 밝힌다고 하며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슬슬 거리를 두려는 행보를 보였다. 이에 독일은 충성 서약을 거부하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폴란드인 장교단을 감옥에 투옥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폴란드인들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지지는 날이 갈 수록 높아졌고 폴란드인 장교단은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연합국 측도 폴란드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립 약속을 했다. 1914년 전투가 시작된지 2주가 지난 무렵에 러시아 당국도 승리한다면 폴란드의 독립을 허용해줄 것을 약속했으며 1917년 여름 프랑스군은 서부전선에서 싸울 폴란드인 연대를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때 폴란드계 미국인들이 많이 합류했다고 한다. 1917년 차르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러시아 혁명정부도 폴란드의 독립을 약속했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도 독립국 폴란드의 수립을 지지했다.


결국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갇혀있던 폴란드인 장교단은 석방되었고 폴란드는 드디어 독립할 수 있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도 독립 영웅으로 환영을 받으며 바르샤바에 돌아왔고 며칠 뒤 국가수반 겸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폴란드는 삼국분할 이후로 처음으로 독립을 되찾았지만 그로스폴렌과 폼메른, 슐레지엔 지역 같이 독일과의 영토 분쟁이 발생하는 지역도 나타났고 남부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충돌, 동부에서는 소련과의 갈등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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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867년 12월 5일 지금의 리투아니아 영토인 잘라바스에서 태어났다. 피우수트스키의 집안은 대대로 이 지역의 귀족 가문이었고 잘라바스는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원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지만 18세기에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이뤄진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그의 집안은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유제프의 아버지도 1863년 1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어머니 마리아 빌레비츠도 러시아 제국을 증오했다. 1863년 봉기는 많은 폴란드인들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끌 확실한 구심점이 없어 실패했다. 그 후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국가개혁에 나서 폴란드 지역의 귀족 무력화 및 농민 지지 확보 목적으로 농노 해방을 했는데 이때 피우수트스키 가문도 몰락한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빌뉴스에 있는 러시아식 고등학교에 다니며 차르에 대한 충성심과 정교회 신앙을 교육받았다. 이 시절에는 딱히 재능있다는 평가는 못받았으며 재미있는건 훗날 소련의 비밀경찰인 체카(Cheka)의 창설자가 되는 펠릭스 제르진스키와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피우수트스키와 제르진스키는 서로 1년 선후배 사이였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제르진스키가 거짓말을 잘 못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이 시기에 어머니를 통해 폴란드어와 문학, 역사도 배웠다고 한다.


1885년 피우수트스키는 하르키우 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다. 재미 있게도 중국의 쑨원, 쿠바의 체 게바라, 필리핀의 호세 리살,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프랑스의 프란츠 파농 같은 세계의 혁명가들의 전 직업의 상당수가 의사였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피우수트스키도 나로드니키의 일파인 '인민의 의지당'에 가입해서 활동했었는데 1886년 학생 운동을 그만두고 타르투 대학교에 입학할려다가 거부되었다. 인민의 의지당 활동 시절에는 젊은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며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으나 이 책의 추상적인 논증은 그와 맞지 않았다.


거기다가 인민의 의지당에 소속된 알렉세이 울리야노프 등의 혁명가들이 차르 알렉산드르의 암살 음모를 세우던게 당국에 발각되고 형인 브로니스와프가 그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피우수트스키도 체포되었다. 하지만 곧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아 시베리아로 5년 유배형을 떠나게 되었고 유배지로 이송되기까지 몇주간은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후 레나 강 유역의 키렌스크와 툰카 등지에서 유배 생활 및 강제노역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유배지 환경이 매우 열악했는지라 배고픔을 참지 못한 유형수들이 봉기를 일으켜 관리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피우수트스키는 이빨 두개를 잃기도 했다.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에서 피우수트스키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결국 1888년이 되서 요양 차원에서 6개월 간의 복역 중지 결정을 허가받았다.


유배 기간 동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시베리아에서 복역하는 많은 폴란드인들을 많았는데 이때 1863년 1월 봉기의 주도자였던 브로니스와프 슈바르체도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탓에 모국어인 폴란드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와 영어까지 구사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아이들을 상대로 수학과 언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 일도 맡기도 했다.


1892년 유배형을 마친 피우수트스키는 현재 리투아니아의 실라레 디역인 아도마바스 마노르로 가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폴란드 사회당에 입당해 리투아니아 지부 설립에 참여했고 극좌 성향에 가까웠으나 국제주의 노선보다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크게 보였다. 1894년에는 지하신문이자 당 기관지인 '로보트니크'를 발행해 이 신문의 주필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어느덧 다음해에는 폴란드 사회당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가 당 강령을 손봐 폴란드 독립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1899년 7월, 어느 개신교 교회에서 폴란드 토목기사와 이혼한 적이 있는 마리아 유슈키에비치와 결혼한 후에는 우치로 옴겨 '로보트니크'의 인쇄를 계속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비밀 인쇄소가 발각되어 피우수트스키는 체포되었고 바르샤바 인근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01년 5월에 정신병 행세를 한 피우수트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탈출해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지역인 크라코프로 갔다가 1902년 4월에 다시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에 피우수트스키는 런던, 뉴욕, 샌프란시스코, 벤쿠버, 호놀룰루를 거쳐 도쿄로 갔다. 목적은 일본의 폴란드 독립 지지를 받아내는 것에 있었고 그의 형인 브로니스와프가 일본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일본과도 나름 접점이 있는 셈이었다. 일본 정부 측과 접촉한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군 내 폴란드인들을 통한 정보 제공과 포로 중 폴란드인들을 선발해 폴란드 군단을 창설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일본은 유럽 정세 크게 휘말릴 생각은 없었기에 선전선동과 후방교란 비용으로 2만 파운드의 돈만 피우수트스키에 줌으로써 직접적인 지원은 거절했다. 왜냐면 이때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민족민주당의 드모프스키가 먼저 일본에 도착해 피우수트스키의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떠벌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지원금을 받은 피우수트스키는 이 시기에 일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는지라 훗날 독재자로 군림하던 1928년에 러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일본군 장교 51명에게 훈장을 주기까지 한다.


한편 피우수트스키는 드모프스키와는 정적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당은 참정권 요구와 두마 진출이 노선이었는데 반해 피우수트스키는 폭력 혁명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폴란드의 자치를 내걸었던 드모프스키는 1905년 두마 선거에 진출하는데 이와 반대로 피우수트스키는 사회당의 선거 참여 자체를 거부한다.


다시 폴란드로 돌아온 피우수트스키는 곳곳에 널리퍼지고 있던 혁명운동을 이끌었고 아예 준군사조직인 폴란드 사회당 전투단까지 조직한다. 사회당 전투단은 1904년 10월 28일 바르샤바에 주둔하는 코사크 기병대를 습격하며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선언했고 초반에는 정찰 활동이 중심이었지만 1905년을 거치며 러시아 정치인을 암살하기까지 한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은 폴란드에서도 일어났다. 12월 12일, 사회당은 폴란드 내 모든 노동자의 총파업을 호소했고 무려 40만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은 워낙 거셌기에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막을 수준이었고 상황이 악화되자 러시아 당국의 유화책으로 두마(의회) 선거를 열기로 확정했다. 하지만 피우수트스키는 앞서 말했듯이 폭력 혁명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여기며 사회당의 선거 참여 자체를 막아버렸다.


머지않아 유럽에 큰 전쟁이 날 것이라고 본 피우수트스키는 이걸 기회로 보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폴란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판단, 1906년에는 오스트리아 참모본부의 지원으로 크라코프에 군사학교를 세워 800여명의 정예 요원들을 키웠다. 피우수트스키 일파는 한해 동안 무려 336명의 러시아 관리를 암살했는데 '피의 수요일'이라고 알려진 1906년 8월 15일 특수작전 동안에는 러시아 경찰에게 77건의 저격을 감행해 29명을 사살하고 43명을 부상입히기도 했다.


1908년 9월 26~27일에는 그가 결성한 군사 행동 연합이 바르샤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세금을 운반하던 우편 열차를 기습하기도 했다. 당시 빼앗은 금액은 무려 200,812 루블로 이는 군자금으로 쓸 돈이었다. 습격 장소는 빌뉴스 근방의 베즈다니 였고 200,812 루블은 지금 가치로 환산하며 500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이다. 피우수트스키는 곧 이어 준군사조직을 '적극 저항 연맹'으로 재편했고 이곳의 구성원들은 훗날 폴란드군 장교단의 핵심이 된다. 또 1912년에는 사실상 사관학교인 총포협회를 만들어 1만명 이상의 규모까지 키웠다.


피우수트스키는 자신의 주장이 사회당의 강령으로 채택될 만큼 점점 세가 커져갔지만 사회당이라고 전부 피우수트스키에게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회당 내 좌파는 피우수트스키가 사회주의적 대의를 배신했다고 믿었는데 피우수트스키에게 있어서 사회개혁은 독립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예전 동료들에게 "우리는 함께 붉은 기차를 타고 여행했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라는 이름의 역에서 내렸다"라며 본심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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