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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책을 고를 때, 좋아하는 작가나 주제이면 표지나 띠지, 덧표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거의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니까 표지나 띠지는 자세히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서점에서 직접 고를 때는 띠지나 뒷표지에 적혀있는 다른 작가나 비평가의 평을 읽고 망설이기도 했다. 책의 내용에 감동을 받거나 실망을 해도 표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런 무관심이 줌파라히리가 쓴 《책이 입은 옷》을 읽고는 작가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표지도 책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줌파 라히리에겐 표지는 애증의 대상이다. 노심초사 기다리다 허탈해질 때도 많다.
책이 완성되고 세상에 입장하려 하는 순간에서야 표지가 나온다. 표지는 책이 탄생했음을 내 창조 과정이 끝났음을 표시한다. 내 손에서 독립해 자신의 생명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쾅쾅 도장 찍는다. 작이 마감됐음을 알려준다. 출판사에 표지는 책이 도착했음을 의미하지만 내겐 이별을 의미한다.
내용에 걸맞는 표지는 내 말이 세상을 걸아가는 동안, 독자들과 만나러 가는 동안 내 말을 감싸주는 우아하고 따뜻하며 예쁜 외투 같다. 잘못된 표지는 거추장스럽고 숨 막히는 옷이다. 아니면 너무 작아 몸에 맞는 않는 스웨터다.
보기 흉한 표지는 날 싫어하는 적 같다.
책 표지를 만들 때는 작가의 의견보다 디자이너와 출판사의 의도가 더 많이 반영되는가 보다. 줌파 라히리는 표지를 그려줄 그래픽 디자이너와 얘기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글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신호가 표지다. 그럼 독자들은 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줌파 라히리가 자란 동네의 도서관에서는 책이 오래 읽힐 수 있도록 일부러 하드커버를 만들어 붙인다. 그 하드커버에는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있었고, 책의 내용이나 작가의 이력이나 사진은 실려있지도 않았다. 독자들은 텍스트로 직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책을 사면 다른 것들도 덩달아 얻는다. 작가의 사진, 이력, 서평. 이 모든 게 상황을 복잡하게 한다. 혼란을 일으킨다. 길을 잃게 한다. 난 표지에 실린 논평이 못 견디게 싫다. 그것 때문에 가장 불쾌한 영어 단어 'blurb' 를 알게 됐다. 표지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싣는 건 적절치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독자가 내 책에서 만나는 첫 단어는 내가 쓴 말이길 원한다. 독자와 책의 관계는 이제 책 주변에서 움직이는 열두명 남짓 사람들의 매개를 통해 훨씬 더 많이 형성된다. 작가인 나와 텍스트,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발가벗은 책의 침묵, 그 미스터리가 그립다. 보조해주는 자료가 없는 외로운 책 말이다. 예상할 수 없고 참조할 것 없는 자유로운 독서를 가능케 하는 미스터리. 내 생각에 발가벗은 책도 스스로 설 힘이 있다.
원래 표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인지 발가벗은 책도 괜찮다. 발가벗은 책이 당황스럽고, 불쾌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와 독자 모두가 만족하는 표지도 있겠지.
표지 이야기를 한참 읽다가 이 책 《책이 입은 옷》의 표지, 덧표지 아래에 숨겨져 있는
표지가 궁금했다.
덧표지 아래에 숨어있던 표지. 한참을 들여다 봤다. 느낌이 달랐다. 일단은 덧표지를 벗기기로 했다. 원서표지도 맨 뒤에 있었다. 원서는 파란색 바탕에 제목만 있었다. 줌파 라히리가 말한 발가벗은 책 그대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발가벗은 채로 출간되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