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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야간비행 - 정혜윤 여행산문집
정혜윤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작가는 필리핀 보홀에서 스페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홀에서 스페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연’이었지만 자신을 위한 여행의 출발이었다고 한다.
“여행이 새로운 자극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루한 순간도 있듯이 일상도 지루하기만한 것이 아니고 특별한 순간도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살고 싶은 삶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 되고 싶은 나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에 못 미치는 내가 있다. 세속을 향하는 내가 있다. 영원을 향하는 내가 있다. 그 두 세계 사이의 왕복운동, 두 세계 사이의 여행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고 보홀을 지루한 일상으로, 스페인을 특별한 순간으로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보홀도 특별한 순간이고, 스페인도 특별한 순간이다.
보홀 여행에서는 보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페인 여행에서는 책으로 만난 작가나 작품 속 인물들에 대하여 들려준다. 허구의 인물이든, 직접 만난 사람이든 작가는 그 사람들의 정수만 들려준다. 그걸 뇌로 이해하게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 작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스페인 출신이나 스페인과 관련된 작가들과 작품들, 그들과 관련된 장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여행 방법에 대하여 잠시 생각했다. 작가는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가장 사랑했다는 정원에 앉아 로르카의 창문도 쳐다보고 분수의 물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라나다 거리를 상상하기도 한다.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작품 속에 나오는 장소, 작가와 관련된 곳을 찾아가서 뭔가를 느끼고 싶어진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서 흥분하기도 하고 상상을 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그 작품의 배경 공간을 찾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 황홀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돌아와서 그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느낌은 예전과는 달랐다.
여행은 새롭게 존재하기를 부추긴다.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새롭게 존재하기’를 부추긴다.
작가가 인용한 작품들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주제 사마라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와 페르난도 페소아의 “페소아와 페소아들”을 빌렸다. 70여개의 이명을 사용했던 페르난도 페소아. 작가는 리스본에서 페소아의 집을 찾아갔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70여개의 이름은 70개의 정체성. 우리 안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여러 정체성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인용한 작품들도 읽고 싶지만 정혜윤 작가가 직접 쓴 글도 베껴 쓰고 싶다. 베껴 쓴다고 모두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베껴 쓰면서 다른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베껴 쓰는 동안 내 몸 어딘가에 새겨졌다가 나도 모르는 순간 툭 튀어나올 것 같다.
“그렇지만 모든 사물은 본질적으로 다 낙하해. 루크레티우스가 알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쏟아지는 ‘원자들의 춤’이라고 표현했어. 그렇게 낙하하다가 낙하를 방해하는 뭔가를 우연히 만나.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낙하를 멈추고 평행상태를 유지해. 이제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미스 양서류야, 우연히 나에게 부딪혀줘서 고마워. 나의 낙하를 방해해줘서 고마워. 나는 네가 없었다면, 미스 영장류가 없었다면 이만큼 안정되어 있지 못했을 거야. 너와 미스 영장류가 없었다면 나는 무엇이 진짜 안정인지 몰랐을 거야. 나는 토대가 뭔지도 몰랐을 거야. 우리의 토대는 말이야. 그것을 믿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것. 그래서 끝까지 충실하는 것 외에는 달리 뭘 해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그것이 토대일 거야. 너희들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손톱만큼도 날아오르지 못했을 거야. 미스 양서류야, 서로서로 부축하고 쌓아나가다가 높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더 날아오르자꾸나!”
우연히 부딪혀 나의 낙하를 방해해준 “책”이 고맙다. “책”을 날개삼아 날아가는 중이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비행을 멈출 때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있겠지. 욕심을 내자면 책을 계속 날개 삼아 ‘빛으로 휩싸인 채 어둠 속을 여행하는’ 삶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