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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읽지만 소설과 세상을 연결짓지 못하는지라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처럼 문학에 천착하는 글은 같은 작가라면 부럽다는 말이 적당하겠지만 소설 바깥을 헤매는 독자로서는 아득히 멀다. 문학과 작가에 대한 동경으로 읽는다. 내가 느낀 것을 글에서 발견하면 한 발 다가갔다 여기며 희망을 지속한다.
소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휘저을 때 '소설이 뭐길래, 문학이 뭐길래 이런 비애를 느껴야 하나' 싶다. 비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다. ‘깊이 절망할 만큼 깊이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부 <절망을 말하다>를 읽는 동안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가 머리를 맴돌았다. 탈곡기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저녁. 어린 작가는 마루에 앉아 마당에 내려앉는 컴컴한 어둠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뒤에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버지, 작가는 집게손가락이 비어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마당에 내려앉는 컴컴한 어둠과 탈곡기에 빨려 들어간 아버지의 집게손가락이 작가의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였다.
79.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 걸. 나는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일 뿐이다. 걸을 때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전설의 인물처럼 살아온 걸음마다 이야기를 남겨둔 당신들이 있어 행복했다.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
작가의 시선은 고향과 피붙이들로 이어지고 다시 ‘가련하고 고독한 자들. 절대적으로 고독하여 고독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새없이 몸을 놀려 식구를 먹여 살리고 살림을 재탱하고 놋대야와 놋그릇을 닦듯 삶을 닦아, 윤이 나게 닦은 자들. 언제나 절망했으되 절망에 진 적 없었던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작가는 이 땅의 내력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이 바로 그 자리다. 작가는 그 슬픔과 고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 딛은 모든 이들의 슬픔과 고통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거기에서 인간과 세상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213.
아이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이 많아지리라. 몸이 멀쩡해도 마음이 아프다는 걸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을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마음을 치유하는 일도 전적으로 아이에게 속하고 말 것이다. 아이는 혼자 고통과 불안을 감내해야하고 이 모든 걸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
그럼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말’인 문학은 무엇을 해야할까? 슬픔과 고통이 모두의 일임을 말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 같아’ 우물에 미숫가루를 푸는 ‘아름다운 테러’가 문학이 할 일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인간을 ‘흔한 인간’이 아니라 ‘그래서 아름다운 인간’으로 드러내 달라는 바람도 얹는다.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많다. 다시 읽으면 처음 읽는 듯 새롭다. 문학만은 동경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러 주길 .....!
이제는 문학을 달리 읽게 되리라. 문학이 건네는 말에 올라타 인간과 세상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비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리... 그렇게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