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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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항상 그곳에 남아있을 뿐이다. 고요하지만 화려한, 도도하지만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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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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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자기고백과 내면의 갈등을 새로운 상황으로 끌어올리는 니시오카가 뜨거운 열정보다 더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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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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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을 역사의 통계치로 퉁쳐버리면 절대 안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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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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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이야기 1-4의 첫인상은 생소하지만 친근한 이름이었다. 주인공인 이복동녀’, 아명은 놋새’. 놋새 엄마는 이초샘’, 형제들은 이노금, 이노향, 도화선, 귀동녀’. 이 이름들에도 당시의 남아선호 사상이나 그 비슷한 정서가 담겼을지 모르지만 요즘 이름과는 다른,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 같은 이름이다. 이름에는 기원을 담는데 놋새에 담긴 기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작가의 외할머니이자 놋새의 엄마, ‘이초샘’. 어린 시누이 둘과 홀시아버지 모셨고,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자식 일곱을 낳아 키웠다. 병으로 누운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남편 이근호는 어쩌다 한번 드나들 뿐이다. 시집살이 시키는 심술궂고 극성맞은 시아버지. 며느리는 갖가지 병간호에도 차도가 없는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린다. 놋새는 엄마의 젖을 할아버지와 나눴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착한 널 못 살게 군 것은 말하지 말라며 죽는다. 며느리의 지성이 하늘은 감동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시아버지의 뉘우침에는 진심이 모자란 듯하다.

 

이복동녀 씨는 1927,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보천리 미산촌에서 태어났다. 내 어머니의 이야기 1~4는 이초샘에서 이복동녀로 다시 이복동녀의 딸인 작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 공업화, 민주화 시기까지의 역사가, 인물들의 삶과 생활을 만나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 수탈의 기초를 세운 임야조사사업. 놋새네는 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5년 동안 재판을 한다. 산은 지켰지만 가세는 기울고 빚까지 얻었다. 놋새네는 산골짜기로 이사하고 빚을 갚기 위해 결국 산을 다시 팔았다. 20년 만에 그 산을 다시 산 건 4대 독자 외아들 찬세다.

찬세의 아명은 억석. 억석은 13살에 조촌사램(사람)과 혼인하지만 어려서인지 덩치 큰 신부가 무서웠는지 5년 동안 정을 주지 않는다. 조촌사램이 떠나고 몇 년후에 거산 사램과 다시 결혼한다. 놋새는 올케인 일산 시이(거산사람) 70년을 의좋게 지낸다.

 

거산 사램아 마이 먹어라”, 함경도 북청에서는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 며느리의 친정마을 이름을 사람앞에 붙였다고 한다. 작가는 외숙모 외삼촌을 큰아버지, 큰어머니라고 부른다. 북청에서는 친가와 외가 구분 않고 엄마, 아버지를 기준으로 손위면 큰어머니, 큰아버지로 손아래면 아지미, 아지비로 불렀다. ‘화다분하다(홀가분하다)’, ‘애질애질하다(사랑스럽다)’, ‘집낭(시집간 딸)’, ‘헤뚤헤뚤하다(침착하지 못하다)’ 내 어머니 이야기는 낯설지만 엄연히 우리말인 함경도 사투리를 맛깔나게 살려놨다. 작가 녹음한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 자 한 자 새기듯 정성들여 옮겼으리라.

 

놀지 않으면 구럭이 슨다(구더기가 꼬인다)는 구럭다기날(21), 아낙들이 마을 큰집에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돈돌라리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흥겹게 놀았다. 아마도 바빠질 농사철을 앞두고 몸도 마음도 쉬어가는 날이 아닐까?

 

절기 행사나 혼인잔치, 손님대접, 종교, 새집짓기 등 당대 함경도의 의식주 문화, 전기와 축음기, 기차와 같은 근대문물의 유입 등 점점 잊혀진, 어쩌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살려놔서 반갑고 고맙다. 이복동녀 씨의 놀라운 기억력이 더 감사하다.

 

작가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 1-48년이나 그렸다. 달리 말하면 8년 동안 엄마를 새롭게 알아간 셈이다.

 

작가의 엄마는 딸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작가는 그런 엄마를 보며 기뻤다고 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들이 모두 순조로웠을까? 미쳐 몰랐던 사실에 놀라고 마음 아프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동안 엄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다면 풀리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러면서 엄마의 삶을 이복동녀의 삶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게 됐다. ‘이복동녀의 삶이 더 애잔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엄마의 삶을 만화로 그리면서, 엄마를 더 넓고 깊게 알게 되고 이해했다. 엄마의 삶이 객관화된 만큼 더 애틋해졌을 것이다.

 

내 어머니의 이야기 1-4를 읽는 내내 머리 한쪽은 엄마가 차지했다. 이런저런 일로 엄마의 삶과 거리를 두려는 나를 돌아봤다. 그 거리가 작가처럼 엄마를 더 깊게 느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말처럼 앞으로는 엄마가 나를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엄마를 이해해야 하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잘 이해하면서 엄마와의 우정이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잘 표현된다면 엄마의 얼굴도 많이 달라지겠지.

 

엄마의 달라진 얼굴, 엄마를 위한 것보다 결국은 나를 위한 얼굴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엄마가 더 애틋하다. 기록으로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를 만날 때마다 궁금한 것부터 하나씩하나씩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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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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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지만 소설과 세상을 연결짓지 못하는지라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처럼 문학에 천착하는 글은 같은 작가라면 부럽다는 말이 적당하겠지만 소설 바깥을 헤매는 독자로서는 아득히 멀다. 문학과 작가에 대한 동경으로 읽는다 내가 느낀 것을 글에서 발견하면 한 발 다가갔다 여기며 희망을 지속한다.

 

소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휘저을 때 '소설이 뭐길래, 문학이 뭐길래 이런 비애를 느껴야 하나' 싶다. 비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다. 깊이 절망할 만큼 깊이 사랑하지못했기 때문이다.

 

1<절망을 말하다>를 읽는 동안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가 머리를 맴돌았다. 탈곡기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저녁. 어린 작가는 마루에 앉아 마당에 내려앉는 컴컴한 어둠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뒤에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버지, 작가는 집게손가락이 비어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마당에 내려앉는 컴컴한 어둠과 탈곡기에 빨려 들어간 아버지의 집게손가락이 작가의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였다.

 

79.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 걸. 나는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일 뿐이다. 걸을 때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전설의 인물처럼 살아온 걸음마다 이야기를 남겨둔 당신들이 있어 행복했다.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

 

작가의 시선은 고향과 피붙이들로 이어지고 다시 가련하고 고독한 자들. 절대적으로 고독하여 고독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새없이 몸을 놀려 식구를 먹여 살리고 살림을 재탱하고 놋대야와 놋그릇을 닦듯 삶을 닦아, 윤이 나게 닦은 자들. 언제나 절망했으되 절망에 진 적 없었던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작가는 이 땅의 내력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4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이 바로 그 자리다. 작가는 그 슬픔과 고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 딛은 모든 이들의 슬픔과 고통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거기에서 인간과 세상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213.

아이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이 많아지리라. 몸이 멀쩡해도 마음이 아프다는 걸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을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마음을 치유하는 일도 전적으로 아이에게 속하고 말 것이다. 아이는 혼자 고통과 불안을 감내해야하고 이 모든 걸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

 

그럼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말인 문학은 무엇을 해야할까? 슬픔과 고통이 모두의 일임을 말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 같우물에 미숫가루를 푸는 아름다운 테러’가 문학이 할 일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인간을 흔한 인간이 아니라 그래서 아름다운 인간으로 드러내 달라는 바람도 얹는다.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많다. 다시 읽으면 처음 읽는 듯 새롭다. 문학만은 동경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러 주길 .....!

이제는 문학을 달리 읽게 되리라. 문학이 건네는 말에 올라타 인간과 세상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비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리... 그렇게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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