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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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희는 길상이를 사랑했을까?'

 

 

 집에 들어와서 멍하니 앉아 채널을 여기 저기 돌리다 보니, 방통대 이상진교수님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쯤이었는데, 사회자가 교수님에게 정말 궁금하다면서

'서희는 정말 길상이를 사랑했나요?'라고 물었다. 이상진 교수님은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하며서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사랑했지요'라고 했다.

 

 

  이윽고 혜관은 하직해야겠다면서 서희에게 들렀다.

"모레 떠나신다던가요?"

"네."

"가시면은 임씨댁에 묵으시렵니까?"

"저까지 폐를 끼쳐 되겠습니까? 여관에 들겠습니다."

"그러면 유모나 안자가 함께 가겠구먼요."

"유모랑 갈까 합니다."

"네에 ...... 임씨댁이 효자동이니까 가까운 곳에 잡으셔야겠습니다."

"네."

"효자동 어귀에 선일여관이란 게 있습지요."

  서희는 혜관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혜관도 서희의 눈을 응시했다. 서희는 그 여관에서 무슨 일이 있을것을

직감한다.

"아닙니다. 나는 거기 들지 않겠소자의 한계점이다."

  뒷걸음질치듯 서희는 말했다. 여자의 한계점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최서희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부딪쳐야

하는 한계점, 이제 다시 지어미이기 때문에 부딪치는 한계점을 보아야 한다. 서희는 거기 들지 않겠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환국이와 순철이 싸운 경위를 간략하게 얘기한다.

 

 

  삼월말의 철도 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 차기 때문에 봄은 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 환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엇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곤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명빈의 댁네 백씨가 펄쩍 뛰듯이 말했다. 서희는 몇 번 사양하다가 권에 못 이긴 듯

  "폐스러워서 어떻게 하지요?"

  미소하며 슬그머니 동의를 표한다. 여관에 가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굳힌 결심이었다. 그러나 서희는 위험이 따르는 환희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길상을 만나리라는 기대는 아니었다.

  나흘을 서울서 묵는 동안 서희는 환국의 입학식에 따라갔다. 유모와 함께 서울거리에 나가 물건을 사기도 했으며 창경원에는

환국이와 함께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러면서 그 여관 앞으로 오가는 동안 서희는 눈길으 돌리지 아니 했다. 이층 창가에 어느

사내가 서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 서희는 하루하루의 양식을 마련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깨달았을 때 서희는 가파로운 고갯길에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여관 옆을 차가 지나갈 때 차 속에서 서희는 처음으로 여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층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한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희는 갑자기 자신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상상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선일여관이 있다고 했지 그 곳에 누가 있을 것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확실하게 물어보지 못했을까? 어느쪽이든 확실하게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희망도 절망도 깡그리 뭉개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상속으로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없는 창문, 실제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절망, 차가 멎었을 때 서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밤에 잠자리에서 서희는 물었다.

 "환국아, 너 아버님 기억하느냐?"

 "합니다."

 "보고 싶으냐?"

 "네."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잠긴 목소리였다.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비로소 순철이가 환국이에게 던진 말에 대하여 서희는 아들에게 해답을 준 것이다.

 

 

 나는 서희와 길상이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이 장면이 생각난다.

 서희는 길상이를 사랑한다.

 어느날 부터 갑자기 '사랑해야지'하고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는 감정이 서서히 사랑으로 변해가는 거 아닐까? 그래서 어느날 문득 사랑으로 깨달아지는게 아닐까?

  그래서 길상이에 대한 서희의 사랑도 그런 모양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 프로그램을 잠깐 봤지만, '분석하기 보다는 느끼는 것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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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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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님보다는 황상 선생님이 더 훌륭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스승에 배운다고 모두 훌륭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황상 선생님의 스승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가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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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대 1
박경리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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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애`. 박경리 선생님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캐릭터이다. 맑으면서도 돌발적인 인물? 60년대 소설이지만 감각적이다. 서인애의 결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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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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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정대부 선생님 아니십니까? 어찌 사람을 이렇듯

  감쪽같이 속이십니까? 밤낮으로 공을 뵙고 싶어 애태웠는데, 어찌 이리하십니까?”

  다산이 빙글빙글 웃었다.

  “어쩌다보니 그리되었네. 미안하이.”

  “안됩니다. 이리는 못 가십니다. 오늘은 제 방에서 함께 묵어 가시지요.”

  혜장은 막무가내로 다산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왔다.

다시 자리를 갖추고, 대화가 오가는 중에 어둠이 내렸다.

  “듣자는 그대가 ‘주역’ 공부를 많이 했다더군. 공부하다 모르는 것은 없던가?”

  “정씨의 풀이나 소씨의 해설, 그리고 주자의 설명에는 모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문 내용은 알지 못하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다산은 ‘주역계몽’의 내용을 가지고 그를 슬쩍 격동시켰다. 물병에서 물을 따르듯

거침없는 언변이 쏟아져 나왔다. 다산은 그가 대답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혜장은 재를 깔아 둔 회반을 가져오개 해 그 위에 낙서의 구궁을 그리며

설명했다. 팔을 걷어붙이고젓가락으로 하도를 펼쳐놓고 그 위에 숫자를 늘어놓았다.

  문밖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들었던 제자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혜장의

사자후를 들었다. 제 스승의 거침없는 열변에 너나없는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개중에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혜장의 만면에 득의가 흘렀다.

  등불을 밝히고 나서도 혜장의 강의는 오래 계속되었다. 다산이 이따금 묻고,

혜장은 도도한 강물처럼 대답했다. 대단한 공부였다. 다산은 이따금 고개만

끄덕였을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혜장은 아까의 웃음기만큼이나 그의 침묵이

찜찜했다. 휘두르는 칼날이 번번이 허공만 베고 있었다. 서창으로 대낮같은 달빛이

들어왔다. 다산이 불을 껐다.

  “그만 자세. 밤이 늦었네.”

  “그러시지요.”

  둘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웠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보게, 혜장! 주무시는가?”

  “아닙니다.”

  “아까하던 얘기를 좀더 해볼까? 내가 하나 묻겠네. 건괘에서 말일세, 초구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구가 양수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그럼 음수는 어디서 끝나지?”

  “십입니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말일세. 곤괘는 어째서 초십이라 하지 않고, 초육이라고

  했을까?”

  다산의 검광이 돌연 혜장을 무찔러왔다. 혜장은 어수룩한 듯 툭 던진 다산의

질문에 그만 눈앞이 캄캄했다. 한마디도 뗄 수 없었다. 누워 눈을 멀뚱멀뚱하던 그

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깃을 바로 하고, 다산 앞에 무릎을 딱 꿇었다.

  “산승의 20년 주역 공부가 그저 헛된 물거품이올시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곤괘에서

  초육이라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미욱함을 깨쳐주십시오.”

  “나도 알 수가 없지. 기수가 되려면 끝의 숫자가 4나 2가 되어야 하네. 모두들

  기수인 줄 알지만 2와 4는 우수가 아닌가.”

  혜장이 땅이 꺼질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잘난 척할 수 없는 것을! 선생님, 마저 가르쳐주십시오.“

다산은 끝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단히 인상적인 대화의 장면은 마흔의 젊은 나이로 혜장이 세상을 뜨자,

그를 애도하여 다신이 지은 ‘아암장공탑명’에 그대로 나온다. 범처럼 포효하던

혜장이 다산의 한 방을 맞고 그만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초구와 초육에 대한

설명의 깊은 뜻은 필자의 공부로는 도무지 측량이 안 된다. 20년 공부한 혜장이

모르겠다고 무릎을 꿇은 사연이니, ‘주역’을 모르는 필자가 무슨 설명을 더

보태겠는가? 아무튼 다산은 간단한 질문 하나로 기고만장하던 혜장을 일격에

고꾸라뜨렸다. 혜장은 운이 나빴다. 하필 다산에 걸렸던 것이다. 안하무인의

교만이 한순가네 망연자실로 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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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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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은 18년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18년. 그 시간 동안 다산은

600여 권의 책을 쓰고, 글을 가르치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교류를 한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다보면 유배객이라는 사실도 잠깐씩 잊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해배가 큰 의미가 될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벼슬을 다시 한 것도

아니고, 명예를 다시 얻은 것도 아닐테고 오히려 더 숨죽여야 했을 것이다.

가족을 만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유배시절이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고향에 돌아온 뒤에 유배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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