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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정대부 선생님 아니십니까? 어찌 사람을 이렇듯
감쪽같이 속이십니까? 밤낮으로 공을 뵙고 싶어 애태웠는데, 어찌 이리하십니까?”
다산이 빙글빙글 웃었다.
“어쩌다보니 그리되었네. 미안하이.”
“안됩니다. 이리는 못 가십니다. 오늘은 제 방에서 함께 묵어 가시지요.”
혜장은 막무가내로 다산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왔다.
다시 자리를 갖추고, 대화가 오가는 중에 어둠이 내렸다.
“듣자는 그대가 ‘주역’ 공부를 많이 했다더군. 공부하다 모르는 것은 없던가?”
“정씨의 풀이나 소씨의 해설, 그리고 주자의 설명에는 모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문 내용은 알지 못하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다산은 ‘주역계몽’의 내용을 가지고 그를 슬쩍 격동시켰다. 물병에서 물을 따르듯
거침없는 언변이 쏟아져 나왔다. 다산은 그가 대답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혜장은 재를 깔아 둔 회반을 가져오개 해 그 위에 낙서의 구궁을 그리며
설명했다. 팔을 걷어붙이고젓가락으로 하도를 펼쳐놓고 그 위에 숫자를 늘어놓았다.
문밖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들었던 제자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혜장의
사자후를 들었다. 제 스승의 거침없는 열변에 너나없는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개중에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혜장의 만면에 득의가 흘렀다.
등불을 밝히고 나서도 혜장의 강의는 오래 계속되었다. 다산이 이따금 묻고,
혜장은 도도한 강물처럼 대답했다. 대단한 공부였다. 다산은 이따금 고개만
끄덕였을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혜장은 아까의 웃음기만큼이나 그의 침묵이
찜찜했다. 휘두르는 칼날이 번번이 허공만 베고 있었다. 서창으로 대낮같은 달빛이
들어왔다. 다산이 불을 껐다.
“그만 자세. 밤이 늦었네.”
“그러시지요.”
둘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웠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보게, 혜장! 주무시는가?”
“아닙니다.”
“아까하던 얘기를 좀더 해볼까? 내가 하나 묻겠네. 건괘에서 말일세, 초구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구가 양수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그럼 음수는 어디서 끝나지?”
“십입니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말일세. 곤괘는 어째서 초십이라 하지 않고, 초육이라고
했을까?”
다산의 검광이 돌연 혜장을 무찔러왔다. 혜장은 어수룩한 듯 툭 던진 다산의
질문에 그만 눈앞이 캄캄했다. 한마디도 뗄 수 없었다. 누워 눈을 멀뚱멀뚱하던 그
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깃을 바로 하고, 다산 앞에 무릎을 딱 꿇었다.
“산승의 20년 주역 공부가 그저 헛된 물거품이올시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곤괘에서
초육이라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미욱함을 깨쳐주십시오.”
“나도 알 수가 없지. 기수가 되려면 끝의 숫자가 4나 2가 되어야 하네. 모두들
기수인 줄 알지만 2와 4는 우수가 아닌가.”
혜장이 땅이 꺼질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잘난 척할 수 없는 것을! 선생님, 마저 가르쳐주십시오.“
다산은 끝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단히 인상적인 대화의 장면은 마흔의 젊은 나이로 혜장이 세상을 뜨자,
그를 애도하여 다신이 지은 ‘아암장공탑명’에 그대로 나온다. 범처럼 포효하던
혜장이 다산의 한 방을 맞고 그만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초구와 초육에 대한
설명의 깊은 뜻은 필자의 공부로는 도무지 측량이 안 된다. 20년 공부한 혜장이
모르겠다고 무릎을 꿇은 사연이니, ‘주역’을 모르는 필자가 무슨 설명을 더
보태겠는가? 아무튼 다산은 간단한 질문 하나로 기고만장하던 혜장을 일격에
고꾸라뜨렸다. 혜장은 운이 나빴다. 하필 다산에 걸렸던 것이다. 안하무인의
교만이 한순가네 망연자실로 껶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