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땀 - 내 몸을 다시 켜는 순환 스위치
박민수 지음 / 유노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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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1일 1땀》은 우리가 도외시해온 "땀"을 건강 지료로 내세운다. 나 역시 땀을 쓸모없는 노폐물 찌꺼기로 똥과 비슷한 배설물로 취급했다. 하지만 25년 경력의 가정의학 전문의 박민수가 밝힌 땀의 정체는 잠복한 비밀 병기였다. 땀은 순환 스위치를 켜는 핵심 열쇠로, 땀이 끊기면 항상성이 무너지고 가속 노화가 시작된다. 땀은 결정적인 생존 시스템이었다.


땀은 살아있는 몸의 언어이자 합창이다. 땀은 99%가 수분이며 숨은 1%에 놀라운 생명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 '땀 한 방울은 혈액에서 뽑아낸 정제된 물의 결정체'로서 이 한 방울은 피부의 단독 작업이 아니다. 모든 장기가 제 역할을 하며 협력하고 온몸이 순환해야 땀이 흐른다.


"심혈관계, 근육계, 대사계, 신경계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한다.
능동적 땀을 흘릴 때는 심박수가 자연스럽게 상승하며
혈액이 더 빨리 순환하고,
근육이 수축하면서 림프관이 압착되듯 열리고,
노폐물 배출 통로가 열리며,
혈류가 심장에서 말초까지 힘차게 밀려 나간다.
이때 대사 효소가 활성화되며 에너지 소모량이 늘어나고,
미토콘드리아가 열을 만들면서 지방과 독소를
태우는 과정이 가속화된다."
- 48면



저자는 양이 아니라 "질 좋은 땀"을 강조한다. 사우나에서 흘리는 수동적인 땀은 어느 정도 유익이 입증되었지만 '외부 자극에 반응해 표피에서 수분을 배출'하는 수준이다. 반면에 운동으로 얻는 능동적인 땀은 심장, 근육, 뇌, 신경, 세포 속 에너지 공장이 모두 협력해 만들어 낸 신진대사의 결과물이다.


땀이 끊긴 몸은 체온 조절과 순환 시스템이 멈춘 '고장 난 엔진'이다. 자율신경 균형이 무너져 노화가 가속되고, 면역력이 약화되며, 뇌 기능이 둔화되어 정신 건강까지 해를 끼친다. 땀샘이 닫히면 미세혈관 순환이 막히고 노폐물 배출이 정체되어 피로와 염증이 쌓인다. "땀은 그저 몸이 열을 식히기 위해 흘리는 물방울이 아니라 대사와 면역, 호르몬, 자율신경이 조율하며 만들어 낸 살아 있는 몸의 언어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수록 더 빨리 병든다"는 대목에서 정말이지 내 몸에 미안했다. "Sitting too much kills." 오래 앉아 있으면 죽는다. 움직임이 사라진 자리에 병이 들어온다. 단순히 오래 앉아 있었을 뿐인데 심박수가 빨리지고 혈압이 높아지며, 말초 혈류가 정체돼 체온 조절에 방해가 된다. 몸 전체가 신경학적 불균형에 빠지는 것이다.



다행히 잠깐의 움직임으로도 몸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변화한다. 계단을 오르거나 10분만 걸어도 땀샘이 깨어나 손끝이 따뜻해진다. 하루 22분만이라도 시간을 쪼개 "운동 간식"으로 움직여도 사망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당장 일어나 물을 뜨러 가자. 목과 어깨를 스트레칭하고 서서 종아리를 들어 올리자.


"버린 만큼 채워야 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땀은 물을 마셔야 만들 수 있다.
그런 까닭에 1일 1땀을 위해 물 마시기보다 중요한 조건도 없을 것이다."
- 232면


세포가 노폐물을 배출하고 영양 성분을 흡수하는 데 물은 필수다. 세포가 건조하면 세포 산화와 만성 염증이 심화될 수 있다. 운동으로 땀이 나면 수분 배출로 혈액의 점도가 높아지고, 전해질이 빠져나간다. 수분과 전해질 보충이 중요하므로 운동 전후로, 운동하는 중에도 조금씩 계속 물을 마시자. 운동 후 30분 이내에 전해질 음료를 마시고 나트륨이나 칼륨, 마그네슘을 보충하는 것이 좋다.


이 책 덕분에 일상을 바꿨다. 방학인 아이들 식사와 추위를 핑계로 집콕만 고수하던 패턴을 드디어 깼다. 온라인 장보기를 줄이고 잠깐이지만 햇살을 받으며 근처 마트를 다닌다. 책상에 앉을 때면 30분마다 알람을 맞춰 움직인다. 집에서도 보이는 곳에 물통을 두어 수시로 물을 마신다. 반 년 만에 댄스 수업도 신청했다!



몸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흐름"이다. 몸은 흐르길 원한다. 하루에 한 번 땀을 내고 면역 시스템을 깨우자. 몸의 방어막을 새로 코팅하고 몸과 마음을 리셋해 주는 능력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땀이라는 축복에 감사하며, 오늘 흘린 땀 한 방울로 오늘도 잘 살았다고 매일의 하루를 긍정하리라. 이제 나는 땀 예찬론자다.

#1일1땀 #신간소개 #책추천 #책리뷰 #신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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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 100개의 물질로 읽는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 최소한의 지식 2
김성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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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은 우주와 생명, 인류 문명의 본질을 연결하는 핵심 틀이다. 이 책은 수소 원자에서 탄소나노튜브까지 100가지 물질을 통해 우주 탄생에서 미래 가능성까지 인류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냈다.


이 장대한 작업을 마주하니 경탄이 앞섰다. 저자가 서문에서 고백했듯, "나침반 없이 남극의 광활한 설원 위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세상을 화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물론 목차에 등장하는 물질명이 무척이나 생소했지만 꼭지마다 한두 장의 분량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왜 화학일까? 화학은 물질의 구성과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는 과정을 연구한다. 화학 지식이 없으면 인류의 광막한 서사를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화학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태양과 공기와 풀벌레, 선사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과 우주개발까지
충분히 아우를 수 있는 화학의 넓은 오지랖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학문 분야와도 연계되고 소통할 수 있는
화학이야말로 진정한 '중심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 6면


화학은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사회과학을 연결하는 '중심 과학'으로 분절된 지식을 통합한다. 물리학은 원자 법칙을 생물학의 분자 반응으로 연결하고, 지구과학의 광물 순환을 사회과학의 자원 활용으로 통합한다.


수소 원소가 우주 형성(물리학)에서 물 분자(지구과학)를 거쳐 생명 에너지(생물학)와 산업 연료(사회과학)로 이어지는 흐름은 화학만이 설명할 수 있다. 화학이 어려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


게다가 AI 시대인 지금은 화학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해졌다. 물질의 변화는 문명을 추동하는 핵심 동인이다. 이는 미래 사회 설계와 AI 구현에 필수적인 통찰이다.


AI는 효율적인 물질 합성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줄 수 있지만 실제로 실험실에서 반응을 확인하고 결과를 책임지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다. 암모니아 사례처럼 AI가 식량 문제를 예측해도 화학 지식 없이는 비료를 생산하지 못한다. AI와 화학이 결합해야 혁신이 시작된다.



가장 안정적인 원자핵 니켈(Ni)이 지구상에 3.63% 정도라는 사실은 세상이 불안정한 변화의 파도를 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구 내부의 외핵에서 액체 상태의 철과 니켈이 대류함으로써 자기장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구는 화성처럼 척박한 땅이었을 것이다.


탄소 원자가 생명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DNA와 단백질로 진화한 과정은 우연이 아닌 정교한 예술에 가까웠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핵심인 그래파이트 층이 고체 상태에서 이온을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구조를 이해하면, 전기차 혁명이 기술보다는 물질의 '움직임 법칙'에 뿌리를 둔 미래임을 깨닫게 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시세계의 100가지 물질 속에서 세상은 각자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 구성부터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변하며 균형을 이루는 관계망이었다.


아주 작은 미시세계의 물질들이 모여 이토록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화학은 보이지 않는 원소의 움직임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을 구현하고, 물질의 변화 속에 숨겨진 해답을 찾아내는 신비한 학문이었다.


혜안은 현미경 너머에 있었다. 찰나의 결합과 분리가 반복되는 작은 틈 사이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문명이 흐른다. 물질이 서로를 허용하고 공존하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듯, 인류의 생존 또한 변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가는 열린 태도에 달려 있다.


AI가 수많은 조합을 제시할지라도 그 안에서 가치를 선별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본질을 통찰하는 인간의 몫이다. 화학 안에 그 놀라운 힘을 발견하게 한 고마운 책이었다.

​#도서지원 #세상을이해하기위한최소한의화학 #김성수 #지상의책 #교양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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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것이 살아남는다 - 대전환의 시대를 건너는 진화론적 생존 법칙
대니얼 R. 브룩스.살바토레 J. 에이고스타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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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완벽함’을 도덕이라 삼게 됐을까.
더 빨리, 더 정확히, 더 많이 해내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 믿으며 떠밀리듯 스스로를 몰아왔다. 하지만 이 책은 진화의 연대기를 펼쳐 보이며 뜻밖의 위로를 건넨다. 사실 살아남은 것들은 모두 어설펐다고.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에서 fittest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한 자’를 뜻한다. "적자"는 우월한 개체가 아니라 환경에서 번식하고 회복하며 유지하는 종이었다.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망하지 않는 법, 거센 폭풍을 견디고 젖은 몸을 털며 다시 일어나 끝까지 생존하는 생명력. 그것이 핵심이었다.


완벽한 자동 시스템은 가장 먼저 무너진다. 작은 변화에도 유리처럼 깨지고, 환경이 바뀌면 곧바로 멸종해버린다. 반면 조금은 비효율적이고 빈틈이 있는 존재들은 그 여백 덕분에 변화의 흐름을 탄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하는 유연함. 그것이 지구라는 거친 환경에서 억척스럽게 생명을 이어온 진짜 비결이었다.


우리는 실패를 오답으로 여기지만 자연은 실패를 예산에 포함한다. 숲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장 쓰임새가 없어 보이는 풀꽃과 중복된 기능을 가진 수많은 개체들은 낭비가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대비한 영리한 자연의 보험이었다. 문명은 통제하려 하지만 자연은 다양성으로 조율한다. 생태계는 효율보다 여유와 낭비로 유지된다. 문명의 문제는 진화 원리를 거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변화를 어설프게라도 버티고 갈아타는 유연한 시스템이 진짜 적자라면 이를 적용한 적자생존형 사회 시스템은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방식에 올인하지 않고 다양한 길을 남겨 둔다. 효율과 속도는 떨어져도 충격이 닥쳤을 때 회복과 전환이 가능하다. 경쟁으로 약자를 쳐내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생하며 전체를 살찌운다. 단일한 완벽보다 여러 가능성을 품은 엉성함이 끝까지 지킨다.


생태학적 언어로 바라본 세상은 정말이지 흥미로웠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고, 인간을 우주의 생명 중 하나로 내려놓는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기만 하는 불필요한 존재도 아니다. 저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인간은 숱한 생물종 중의 하나일뿐인가.


나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자연을 다스릴 능력을 가진 책임자라고 생각한다. 자연은 스스로 책임지거나 옳고 그름을 묻지 않지만 인간은 매순간 선택하고 책임진다. 반성하며 분별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를 만큼 강한 최상위 주체다. 자연이 보호 대상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맡은 책임자인 것이다.


꼭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자연과 인간은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받은 ‘이복형제자매’ 같았다. 생명의 근원은 같은 뿌리이지만 둘은 분명 다르다. 같은 창조 질서 아래 유사한 원리로 작동되지만 동일시하면 문제가 생긴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부터 각자 맡은 역할이나 위치가 다른 것이다.


자연을 사랑해야 하지만, 삶의 기준을 대신 세워 달라고 세상을 자연에 맡길 순 없다. 자연이 계절의 순환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근거로 제시할 때, 인간은 그 안에서 자연을 거울삼아 현재를 읽어내고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을 보며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살면 안 되는가’를 해석하고 지혜로 삼을 수 있지만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목표가 아니다. 본보기도 정답지도 아니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도구이자 거울로 이용할 대상이다.


현장생물학자인 두 저자의 자연에서 나는 ‘겸손한 생존’을 배웠다. 다양성과 비효율성, 느린 변화와 통제불가능을 수용하는 자연의 방식을 배워야 하지만, 인간은 자연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기준은 자연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연에게 배운 어설픈 생존 기술을 배우는 동시에 그 빈틈을 무엇으로 채울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생존을 넘어 존엄을 향해 걷는 존재다. 자연 앞에서 겸손하되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어려운 균형잡기가 인류세라는 위기의 시대를 건너는 우리의 진짜 생존 전략이 되어야 한다.





#도서지원 #완벽하지않은것이살아남는다 #빌오한론 #다윈주의 #적자생존 #자연에게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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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없어 꿈꾸는돌 45
김지현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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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작가의 데뷔작이자 2022년 사계절문학상 수상작인 <우리의 정원>을 사랑한다. 울적할 때면 이 소설을 발췌하고 단상을 적어둔 메모장을 펼친다. 무해한 세상 속 멋진 어른들과 따뜻한 친구들이 살아 숨쉬고, 2023년의 내가 머무는 곳. 그 안온함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초록빛 충전이 된다.


신간 《유자는 없어》는 노란빛이다.
거제도에 사는 고1 유지안. 유자 빵으로 핫한 빵 가게 딸인데다 "유"씨 성을 가졌으니 찰떡같이 '유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교생아 30명인 작은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던 지안은 300명 규모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모범생 타이틀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이렇게 해서 1등을 지키면 그다음은?
다들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기 바랄 텐데.
거기 가서 뭐라도 하길 기대할 텐데.
내가 거기서 하루라도 숨을 편안하게 쉬고 살 수 있을까?"
-52면


친구 수영 역시 고민이 많다. 절친인 지안에게조차 차마 털어놓지 못한 채 방황 중이다.
"유자 니는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나.
이름 바꾸고 싶다고.

그냥 이름이라도 바꾸고 싶은 거지.
그럼 조금은 다시 태어나는 기분 아닐까?
인생 리셋한 것처럼. 아예 다시 태어나면 더 좋고."
- 54면


두 사람은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치며 정체성을 빚어가는 중이다. 가슴에 꽂힌 질문 하나가 이들의 상태를 잘 대변한다.
"나에게서 제일 마음에 들던 부분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있으니,
이제 나는 나의 어느 부분에서 위안과 긍지를 찾아야 하는 걸까.
지금 유지안을 이루고 있는 것 중에 그런 게 남아 있긴 할까?"
- 88면


전교 1등 출신 유자에서
이제는 전교 19등 유자가 된 지안.
자부심이자 가치이며, 위안과 긍지였던 성적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 학벌, 직업, 외모, 재력 같은 비교 우위의 성취 목족에 존재 가치를 의탁하곤 한다. 언제든 흔들릴 목록 위에 가치를 올려두고선 무너질까 조마조마해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간다. 그 이름표들이 자신이라 굳게 믿으며 헛된 바람을 잡는다.


존재 자체로 위안과 긍지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텨온 자신에게, 그럼에도 여기까지 살아낸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안 될까. '무엇을 하든, 뭘 가졌든 숨 쉬고 존재하는 생명 그 자체로 난 대우받을 가치가 충분해.'


"배경보다는 시야가 너른 사람이 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143면
부산 유학을 고민하는 지안에게 아빠가 건넨 말이다. 자녀가 탄탄대로 꽃길만을 걷길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이다. 누가 봐도 번듯한 조건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을, 편하고 쉬운 길보다 아프더라도 단단한 가치관을 우선하는 참부모의 모습이 뭉클했다.


오랜만에 소설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김지현 작가의 글을 읽으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가면을 벗게 된다. 더없이 진실하고 진솔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내 안의 진심까지 배어 나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줄 것 같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가상의 인물이라도 좋다. "어디에서도 꺼내 본 적 없는, 나도 알지 못하던 마음"을 (123면)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분명히 이곳에 살아 있으니까.


<우리의 정원> 속 대답처럼, "책 속에는 미운 사람들이 없어. 뭘 해도 밉진 않아. 그래서 좋아. 마음이 편안해져." 뭘 해도 밉지 않은데, 진심을 보이려 용기까지 내는 사람들이 여기 산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자는 없어》를 읽으면서 세 번 울컥했다. 두 번째까지는 자동 분석 시스템이 작동했다. '내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난 건 어린 시절 결핍이 자극되어 이러이러한 욕구가 충족된 거야.' 눈물 콧물을 닦으면서도 뇌는 복잡한 기억을 헤집었다.


세 번째로 글썽였을 때야 깨달았다. '감정이 요동친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어. ㅠㅠ 그냥 좋았던 거야. 함께 웃고 우는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상처도 알아주고 보듬는 관계 자체가 너무 예쁘고 따뜻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마냥 좋았던 거야.ㅠㅠ'


《유자는 없어》는 십 대나 읽을 법한 청소년의 방황기가 아니다. '유자'라는 껍데기를 벗고 온전한 '나'를 대면하는 여정이다. 소설은 묻는다. 사회적 성취와 이름표를 걷어낸 당신에게 무엇이 남았느냐고.


분석이나 이유를 내려놓는다. 그저 나로서 존재하며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는 인물들의 다정함에 기대어 충전한다. 조건 없는 안온함 덕분에 나의 정원에도 초록빛과 노란빛이 교차한다. 생기가 돈다. 숨이 한결 더 편안해진다.


#도서지원 #김지현 #유자는없어 #돌베개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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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장소
나희덕 지음 / 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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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의 《마음의 장소》는 이제 내가 특별히 아끼는 책이 되었다. 누군가를 글쓰기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작품이자, 내가 원하는 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 소중한 길잡이였다.


그동안 시인들의 산문을 읽을 때면 시적 언어의 오묘한 뉘앙스와 세심한 관찰력에 마음이 자주 들뜨곤 했다. 하지만 나희덕 시인의 글은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여행 에세이임에도 여정 그 자체보다 어느 찰나의 장면을 포착해 시처럼 풀어내는 힘이 무척 풍성했다. 동화나 영화처럼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문득 문학의 한 장면이 툭 튀어나오고, 그에 꼭 어울리는 시 구절이 이어질 때면 온갖 문학 장르를 가로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교수님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식까지 곁들여지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안의 교양도 함께 깊어지는 듯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쩜 이리도 취향에 꼭 맞는지. 따사롭고 여유로우면서도 쓸쓸하고 슬픔이 묻어나는 문장들은 눈앞의 풍경만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 이면과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시인만의 남다른 시선 덕분인 것 같았다. 멋 내지 않아도 품격 있고, 아름다움 속에 내실을 갖춘 글이었다. 고즈넉한 여운이 얼마나 향기롭던지 나는 한 편 한 편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아껴가며 읽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에게 포착된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는 내 뒷모습에서 때로는 쓸쓸함을,
때로는 차가움을, 때로는 경쾌함을 읽어냈으리라.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 85면


시인은 뒷모습이나 벽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읽어내는 이였다. 끌어안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에서 옛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홀로 앉아 있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파도 소리를 듣는다.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의 뒷모습에서 노동의 짙은 땀 냄새까지 맡아내는 시인의 감각에 감탄할 뿐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글 자체가 '뒷모습' 같았다. 꾸밀 수 없는 뒷모습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상의 소리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전해주는 뒷모습 말이다. 나는 그 뒷모습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의 나를 더 자주 마주하고 싶어졌다. 덕분에 이제 나도 타인의 등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졌다. 앞으로 내가 뒷모습에서 사람을 읽게 된다면 전적으로 나희덕 시인 덕분이다.


서문에서 시인은 말한다.
"산책과 여행, 삶을 견디게 하는 두 가지."
영국과 미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의 해외와 우리나라의 회산 백련지, 전주 한옥마을, 전남 백운동 별서정원, 소록도와 나로도 등 세계 곳곳을 다닌 기록이라 장대한 여행기로 볼 수도 있지만, 내게 이 책은 목적지가 없이 걷는 평화로운 산책에 더 가까웠다.


언어의 질감과 무게를 다루는 시인의 솜씨는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기에 능숙했다. 덕분에 고요하고 느린 글을 슬렁슬렁 쉬어가듯 음미하며 읽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즐기고 감탄하다 보면 잊혔던 옛 감정이 저기 있었고, 희미하게 꿈꿨던 소원이 여기 있었다. 미소 띤 얼굴로 시인이 늘 동행하는 것 같아 참으로 편안한 휴식이었다.


아름다운 문장을 입술로 낭독하는 재미도, 상상으로 그렸던 장면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어 쾌감도 있었다. 어원과 한자어 풀이로 단어의 속뜻에서 길어올린 통찰을 맛보는 기쁨도 컸다.


책장을 덮으며 비로소 내가 머물고 싶은 '마음의 장소'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화려한 랜드마크가 서 있는 광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쓸쓸한 뒷모습이 가만히 쉴 수 있는 작고 튼튼한 의자 같은 곳이다.


이 책은 내게 그 자체로 신선한 산책이었고 다정한 여행이었다. 목적지에 닿는 것보다 걷는 과정을 음미하는 법, 채우는 것보다 텅 빈 등 뒤의 진실을 읽어내는 법을 배웠다.
​내 글도 누군가에게 정직한 뒷모습이기를 바란다. 멋 부리지 않아도 품격이 느껴지고,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이면의 슬픔까지 보듬을 수 있는 그런 글 말이다. 시인이 비춰준 그윽한 여운을 등불 삼아, 나도 이제 나만의 ‘마음의 장소’를 향해 느린 산책을 시작하고 싶다.


#도서지원 #나희덕 #마음의장소 #에세이추천 #산문집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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