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장소
나희덕 지음 / 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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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의 《마음의 장소》는 이제 내가 특별히 아끼는 책이 되었다. 누군가를 글쓰기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작품이자, 내가 원하는 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 소중한 길잡이였다.


그동안 시인들의 산문을 읽을 때면 시적 언어의 오묘한 뉘앙스와 세심한 관찰력에 마음이 자주 들뜨곤 했다. 하지만 나희덕 시인의 글은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여행 에세이임에도 여정 그 자체보다 어느 찰나의 장면을 포착해 시처럼 풀어내는 힘이 무척 풍성했다. 동화나 영화처럼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문득 문학의 한 장면이 툭 튀어나오고, 그에 꼭 어울리는 시 구절이 이어질 때면 온갖 문학 장르를 가로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교수님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식까지 곁들여지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안의 교양도 함께 깊어지는 듯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쩜 이리도 취향에 꼭 맞는지. 따사롭고 여유로우면서도 쓸쓸하고 슬픔이 묻어나는 문장들은 눈앞의 풍경만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 이면과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시인만의 남다른 시선 덕분인 것 같았다. 멋 내지 않아도 품격 있고, 아름다움 속에 내실을 갖춘 글이었다. 고즈넉한 여운이 얼마나 향기롭던지 나는 한 편 한 편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아껴가며 읽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에게 포착된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는 내 뒷모습에서 때로는 쓸쓸함을,
때로는 차가움을, 때로는 경쾌함을 읽어냈으리라.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 85면


시인은 뒷모습이나 벽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읽어내는 이였다. 끌어안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에서 옛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홀로 앉아 있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파도 소리를 듣는다.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의 뒷모습에서 노동의 짙은 땀 냄새까지 맡아내는 시인의 감각에 감탄할 뿐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글 자체가 '뒷모습' 같았다. 꾸밀 수 없는 뒷모습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상의 소리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전해주는 뒷모습 말이다. 나는 그 뒷모습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의 나를 더 자주 마주하고 싶어졌다. 덕분에 이제 나도 타인의 등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졌다. 앞으로 내가 뒷모습에서 사람을 읽게 된다면 전적으로 나희덕 시인 덕분이다.


서문에서 시인은 말한다.
"산책과 여행, 삶을 견디게 하는 두 가지."
영국과 미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의 해외와 우리나라의 회산 백련지, 전주 한옥마을, 전남 백운동 별서정원, 소록도와 나로도 등 세계 곳곳을 다닌 기록이라 장대한 여행기로 볼 수도 있지만, 내게 이 책은 목적지가 없이 걷는 평화로운 산책에 더 가까웠다.


언어의 질감과 무게를 다루는 시인의 솜씨는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기에 능숙했다. 덕분에 고요하고 느린 글을 슬렁슬렁 쉬어가듯 음미하며 읽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즐기고 감탄하다 보면 잊혔던 옛 감정이 저기 있었고, 희미하게 꿈꿨던 소원이 여기 있었다. 미소 띤 얼굴로 시인이 늘 동행하는 것 같아 참으로 편안한 휴식이었다.


아름다운 문장을 입술로 낭독하는 재미도, 상상으로 그렸던 장면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어 쾌감도 있었다. 어원과 한자어 풀이로 단어의 속뜻에서 길어올린 통찰을 맛보는 기쁨도 컸다.


책장을 덮으며 비로소 내가 머물고 싶은 '마음의 장소'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화려한 랜드마크가 서 있는 광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쓸쓸한 뒷모습이 가만히 쉴 수 있는 작고 튼튼한 의자 같은 곳이다.


이 책은 내게 그 자체로 신선한 산책이었고 다정한 여행이었다. 목적지에 닿는 것보다 걷는 과정을 음미하는 법, 채우는 것보다 텅 빈 등 뒤의 진실을 읽어내는 법을 배웠다.
​내 글도 누군가에게 정직한 뒷모습이기를 바란다. 멋 부리지 않아도 품격이 느껴지고,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이면의 슬픔까지 보듬을 수 있는 그런 글 말이다. 시인이 비춰준 그윽한 여운을 등불 삼아, 나도 이제 나만의 ‘마음의 장소’를 향해 느린 산책을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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