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는 없어 꿈꾸는돌 45
김지현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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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작가의 데뷔작이자 2022년 사계절문학상 수상작인 <우리의 정원>을 사랑한다. 울적할 때면 이 소설을 발췌하고 단상을 적어둔 메모장을 펼친다. 무해한 세상 속 멋진 어른들과 따뜻한 친구들이 살아 숨쉬고, 2023년의 내가 머무는 곳. 그 안온함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초록빛 충전이 된다.


신간 《유자는 없어》는 노란빛이다.
거제도에 사는 고1 유지안. 유자 빵으로 핫한 빵 가게 딸인데다 "유"씨 성을 가졌으니 찰떡같이 '유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교생아 30명인 작은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던 지안은 300명 규모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모범생 타이틀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이렇게 해서 1등을 지키면 그다음은?
다들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기 바랄 텐데.
거기 가서 뭐라도 하길 기대할 텐데.
내가 거기서 하루라도 숨을 편안하게 쉬고 살 수 있을까?"
-52면


친구 수영 역시 고민이 많다. 절친인 지안에게조차 차마 털어놓지 못한 채 방황 중이다.
"유자 니는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나.
이름 바꾸고 싶다고.

그냥 이름이라도 바꾸고 싶은 거지.
그럼 조금은 다시 태어나는 기분 아닐까?
인생 리셋한 것처럼. 아예 다시 태어나면 더 좋고."
- 54면


두 사람은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치며 정체성을 빚어가는 중이다. 가슴에 꽂힌 질문 하나가 이들의 상태를 잘 대변한다.
"나에게서 제일 마음에 들던 부분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있으니,
이제 나는 나의 어느 부분에서 위안과 긍지를 찾아야 하는 걸까.
지금 유지안을 이루고 있는 것 중에 그런 게 남아 있긴 할까?"
- 88면


전교 1등 출신 유자에서
이제는 전교 19등 유자가 된 지안.
자부심이자 가치이며, 위안과 긍지였던 성적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 학벌, 직업, 외모, 재력 같은 비교 우위의 성취 목족에 존재 가치를 의탁하곤 한다. 언제든 흔들릴 목록 위에 가치를 올려두고선 무너질까 조마조마해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간다. 그 이름표들이 자신이라 굳게 믿으며 헛된 바람을 잡는다.


존재 자체로 위안과 긍지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텨온 자신에게, 그럼에도 여기까지 살아낸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안 될까. '무엇을 하든, 뭘 가졌든 숨 쉬고 존재하는 생명 그 자체로 난 대우받을 가치가 충분해.'


"배경보다는 시야가 너른 사람이 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143면
부산 유학을 고민하는 지안에게 아빠가 건넨 말이다. 자녀가 탄탄대로 꽃길만을 걷길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이다. 누가 봐도 번듯한 조건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을, 편하고 쉬운 길보다 아프더라도 단단한 가치관을 우선하는 참부모의 모습이 뭉클했다.


오랜만에 소설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김지현 작가의 글을 읽으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가면을 벗게 된다. 더없이 진실하고 진솔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내 안의 진심까지 배어 나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줄 것 같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가상의 인물이라도 좋다. "어디에서도 꺼내 본 적 없는, 나도 알지 못하던 마음"을 (123면)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분명히 이곳에 살아 있으니까.


<우리의 정원> 속 대답처럼, "책 속에는 미운 사람들이 없어. 뭘 해도 밉진 않아. 그래서 좋아. 마음이 편안해져." 뭘 해도 밉지 않은데, 진심을 보이려 용기까지 내는 사람들이 여기 산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자는 없어》를 읽으면서 세 번 울컥했다. 두 번째까지는 자동 분석 시스템이 작동했다. '내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난 건 어린 시절 결핍이 자극되어 이러이러한 욕구가 충족된 거야.' 눈물 콧물을 닦으면서도 뇌는 복잡한 기억을 헤집었다.


세 번째로 글썽였을 때야 깨달았다. '감정이 요동친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어. ㅠㅠ 그냥 좋았던 거야. 함께 웃고 우는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상처도 알아주고 보듬는 관계 자체가 너무 예쁘고 따뜻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마냥 좋았던 거야.ㅠㅠ'


《유자는 없어》는 십 대나 읽을 법한 청소년의 방황기가 아니다. '유자'라는 껍데기를 벗고 온전한 '나'를 대면하는 여정이다. 소설은 묻는다. 사회적 성취와 이름표를 걷어낸 당신에게 무엇이 남았느냐고.


분석이나 이유를 내려놓는다. 그저 나로서 존재하며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는 인물들의 다정함에 기대어 충전한다. 조건 없는 안온함 덕분에 나의 정원에도 초록빛과 노란빛이 교차한다. 생기가 돈다. 숨이 한결 더 편안해진다.


#도서지원 #김지현 #유자는없어 #돌베개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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