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벤 앰브리지 지음, 이지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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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은 이야기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저자 밴 앰브리지는 완성도 있는 논문을 썼음에도 주목받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에게 한 교수가 말했다. "자네에게 필요한 건 이야기야." 논문의 구조와 내용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연구의 중심이 될만한 서사가 빠져있었다.


이야기의 구조적 핵심, 즉 마스터플롯에 답이 있었다. 마스터플롯은 반복적으로 소비되며 인간 보편의 정서가 녹아든 스토리텔링의 틀이다. 평범한 인물이 사건에 휘말려 위기를 겪지만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결국 성장해서 돌아오는 이야기나 피해를 입은 주인공이 복수를 다짐하거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결국 응징하는 이야기. 익숙하지만 강력한 이야기의 구조, 마스터플랫이다.


"마스터플롯은 인간 행동의 진수를 뽑아내
초집중된 형태에 담아낸다."
-19면


마스터플롯이 영화나 소설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인식 자체가 서사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뇌의 언어이자 작동방식이다. "인간은 모든 경험에 마스터플롯을 입힌다."


뇌는 본질적으로 예측 기계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끊임없이, 0.001초 단위로 예측한다. 불확실성을 줄여 선택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다. 모든 경험을 원인, 과정, 결말이라는 이야기 구조로 짜 맞춰 예측하는 것이 뇌의 생존 전략이다. 기억 역시 편집되고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저장된다.


인간은 인생을 '이야기’로 이해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플롯을 따라 세상을 해석하고 행동한다. 마스터플롯은 익숙한 방식이고 사실적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석하기에 알맞은 렌즈다.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무력하든,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든, 각자 고유의 장르에 속해 살고 있다. 심지어 뇌는 이야기의 결말까지 상정해두고, 감정과 행동을 그에 맞춰 조정한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점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뇌는 이미 내 인생의 결말을 설정하고, 나는 그것을 향해 살아간다는 것!


"내 삶은 어떤 마스터플롯 안에 있는가.
나는 어떤 이야기 구조를 믿는가."
이 질문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열쇠다. 자신의 플롯을 인식하는 건 자기 이해를 넘어 삶을 재구성하는 메타인지의 도구가 된다. 이야기 속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끝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과정’을 인식하며 오늘을 설계할 수 있게 된다.


똑같이 실패해도 ‘퀘스트의 시련 챕터’로 보면 다시 일어서고,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신호’로 보면 침몰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어떤 마스터플롯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은 달라진다.


결국, 인생은 이야기다.
당신의 인생은 어떤 이야기인가?
그 플롯은 당신이 선택한 것인가?
결말은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작가다.
이 책을 통해 마스터플롯을 이해하고,
인생을 구원할 이야기를 다시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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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심리학 - 복잡한 내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마음의 법칙
장근영 지음 / 빅피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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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바다를 잘 아는 분들은 다르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람 마음을 알기 어렵다는 데에는 모든 이가 동의할 것이다. 이 책 《위로하는 심리학》은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대표 심리학자들의 마음의 법칙을 소개한다.


"마음의 법칙을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선다.
마치 마음을 읽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 프롤로그


우리는 평생 나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마음들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마음은 물속처럼 변화무쌍하고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마음에도 세상의 원칙이 흐르고 있어 언어를 배우듯 공부할 수 있다. 풀리지 않던 감정의 매듭을 이해하고, 이유 없는 불안감과 우울감의 근원을 발견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어려움의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알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 대응할 수 있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 심리학의 대가 25인의 핵심 이론을 바탕으로 알쏭달쏭한 마음을 체계적으로 살펴본다. 생소한 심리학 용어들이 어렵긴 했지만 찬찬히 읽고 나면 확실히 달라진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탄탄한 논리가 붙어 생각과 감정이 다시 해석되는 변화가 생긴다.


"왜 열심히 사는데 힘들기만 할까?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 왜 지금 해야 할 일을 또 미룰까? 왜 저 사람이 싫을까?" 현실적인 질문을 앞세우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론이 다리로 기능하기 때문에, 심리학이 학문보다는 믿을 만한 해설서로 작용해서 좋았다. 지적 허세와 실용적 팁을 모두 얻으니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씨실과 날실"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 <여덟 단어>로 널리 알려진 박웅현 작가님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은 씨실과 날실의 직조다." 외부 환경, 사회적 요구 같은 시대적 흐름이라는 씨실과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라는 날실이 얽혀 우리 인생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작용만으론 살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의 물살을 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삶의 지혜였다.


특히 레빈의 장 이론이 그 말씀과 꼭 맞아떨어져 좋았다. "행동은 사람과 환경의 함수다." 사람의 개인적 특성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알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있다는 "위상심리학" 이론이다.


레빈은 환경을 밀고 당기는 힘의 크기를 환산해 방정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성을 지닌 쇠 구슬이고, 인간 주변에는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자석들이 널려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N극과 S극을 가지고 있고, 주변의 자기장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밀어내거나 당기고 있다는 것. 그러니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면 주변의 자기장을 그에 맞게 배열해야 한다는 것.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지 방법들은 책 전체에서 심리학 대가들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방어기제에 대한 이론도 재미있었다. 방어기제의 핵심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아가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진짜 욕망을 숨기거나 바꾸는 자동 반응이다. 겉과 속이 다를수록 강하게 작동하는 방어기제는 변명하고 회피하고 합리화하며 마음을 보호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져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방어기제는 나를 ‘지켜주는 기술’이지만, 지나치면 날실을 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방어기제로 깊이 숨긴 내 모습을 타인을 통해 맞닥뜨리니 감정이 튀고 분노가 솟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럴수록 날실은 꼬이고 굳어진다. 심리학은 날실을 들여다보는 돋보기가 되어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얼마나 건강하게 직조되고 있는지, 인생이라는 직물의 탄탄함과 무늬를 나 자신이 더 관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책이 전하는 심리학의 법칙들은 그 씨실과 날실의 작동 방식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넓고도 세세히 다각도로 정리한 비법서 같았다. 결국 인생은 주어진 씨실 위에 내가 어떤 날실을 어떻게 엮느냐의 선택인 것 같다. 그 사이를 잇는 방어기제는 때로는 보호막이지만, 때로는 마음을 잘못 번역하는 오역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인생이라는 직물에 나만의 색과 무늬를 입힐 수 있다.

《위로하는 심리학》은 마음의 풍랑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심리라는 유용한 언어와 마음의 구조, 내적 움직임의 원리를 선명하게 알려준다. 모양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있는 줄도 몰랐던 날실에 숨을 불어넣는 경험이었다.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내 마음을 어떻게 짜고 있었지? 그 옷감은 내 인생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을까, 아니면 나조차 옭아매고 있었을까?' 이 질문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자아 발견의 강력한 실용서이자 사유의 친구가 되었다.


#위로하는심리학 #빅피시 #장근영 #심리학책추천 #심리학책 #방어기제 #씨실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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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아이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8
김혜정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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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산에서 발견됐다. 기억뿐 아니라 시간도 잃어버린 양 나이도 먹지 않고 60년 전 모습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이 사건은 결말에서 다시 연결되어 모든 의문이 풀린다.


<헨젤과 그레텔>을 연상시키는 큰 그림 안에서 판타지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신선한 감각과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상상만 해보던 세계를 직접 경험하듯 인물들을 따라가며, 현실을 탈출한 해방감과 새로운 세계의 규칙과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엄마를 사고로 잃은 뒤 말을 닫은 아이, 담희.
큰 병으로 생을 잃을 위기 앞에서 시간을 버리고
12살에 멈추었다가 30년 후 돌아온 아이, 민진.
가정폭력을 피해 스스로 기억을 버린 후 다시 돌아온 보경.


세 인물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멈춘 자신과 마주하며, 서로를 통해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의 이질감 없이 신비한 설정을 납득시킨다. 몰입력이 굉장한 작품이다.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데 1시간 반 만에 완독해버렸다.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을 읽어서인지 정말 즐거웠다. 만약의 세계에서 바라본 현실의 당연한 관계들이 낯설게 보였다. 직선으로 체감되는 시간 구조에서 벗어나 미로처럼 시간을 오가며, 나 역시 시간에 대해 생각해봤다.


시간을 멈춘다? 젊고 아름답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건 곧 안전지대에 나를 고정시키는 일이란 걸 알았다. 그대로라는 것은 절대적인 안정 속에 묻히고 고여 정체된 상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그러한 욕심은 결국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되고 비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멈춘 시간에서 돌아온 인물들을 만나며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버티고 기다리며 결국은 돌아갈 선택을 하기까지 어느 때보다도 농도 짙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멈춰있는 동안 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키우고, 변화의 첫걸음으로 서로와 연결된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흐를 때에 삶은 돌아온다.


멈춤은 부정적이면서도 회복을 위한 정지일 수 있으며, 머무를 용기와 변화할 용기 모두가 성장을 위한 걸음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들은 것 같다. 덕분에 알았다. 안전과 성장, 그동안 나는 항상 전자를 택한 아이였지만 이제는 불안하고 두려워도 후자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장이다. 주인공들은 즐겁게 춤을 추던 아이들이 아니었기에 무슨 뜻인지를 한참 고민했다.


즐겁게 춤을 춰야 마땅한 어린 시절이 지나고 "그대로 멈춘 아이들"임을 뜻하는 걸까. 말과 시간과 기억이 멈춰 더 나아갈 수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다시 춤을 추는 삶으로 돌아가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동시에 일상에서 추던 춤을 멈추고 서서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달라는 독자를 향한 주문으로도 들렸다.


"너는 나의 아미야."
"아미가 뭐야?"
영랑은 아미라는 말이 뭔지 몰랐다.
아미는 마인계 말로 '옆에 서 있는 사람',
친구를 뜻한다.
-71면


멈추어서 옆에 서 있는 사람, 친구. 아미.
같이 멈춰 옆에 있어주고, 또 같이 걷다가 멈춰주는 사람. 그런 친구들이 곁에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구원한다.


"그래도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건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내 손을 잡아주는 이들이 있기에
끝까지 밀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


곁에 서 있는 사람. 함께 멈춰주는 존재.
재촉하면서도 기다려주던 시간들.
그 속에서 나도 누군가에게 아미였을까? 아니면 지금 내 곁에 묵묵히 서 있는 아미를 몰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멈춘듯 닫힌 세상에서 나를 끌어내손 내밀어준 수많은 존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멈춰선 시간도 시간이며, 그 곁에 서 있는 사람 하나가 다시 흐르게 도와주는 기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이야기였다. 멈추고, 기다리고, 다시 나아가던 그 모든 시간이 삶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돌아온 아이들》


#도서지원 #김혜정 #돌아온아이들 #소설추천 #현대문학 #현대문학핀장르 #시간 #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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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월드 - 심해에서 만난 찬란한 세상
수전 케이시 지음, 홍주연 옮김 / 까치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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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두어야 할 곳은 사물의 표면이 아니다."
- 테런스 매케나

우리는 바다를 안다고 말하지만, 실은 심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언더월드》는 그 무지를 경이로 바꾸는 책이다.


"심해에는 철을 호흡하는 생물,
유리 골격으로 이루어진 생물,
피부로 소통하는 생물들이 있다.
몸의 안팎을 뒤집을 수 있는 생물도 있다.
입이 두 개일 수도, 심장이 세 개일 수도,
다리가 여덟 개일 수도 있다.
수천 개의 작은 몸이 마치
군대처럼 모여 이루어진 생물도 있다.
노란색 불빛을 쏘는 심해 생물도
최소 1종 이상 있다. 어떤 생물은
속이 다 비치는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연약해 보이는 생물조차,
대형 트럭을 찌그러뜨릴 만큼의
수압을 견딜 수 있다."
- 32면


수심 200미터 아래의 바다, 심해.
심해는 지표면의 65퍼센트, 생물이 사는 공간의 95퍼센트를 차지한다. 지구의 모든 대륙과 섬을 태평양 안에 집어넣어도 남아메리카를 하나 더 집어넣을 수 있다니, 막연하게 가늠해온 지구의 크기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작았던 건지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언더월드》를 통해 만난 심해는 바다의 우주였다. 우주보다 더 알아낸 것이 없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화성 탐사용 로버는 3개인데 비해 잠수정은 1대뿐이라니 말이다. 압력은 사람 몸을 납작하게 누를 정도로 세다. 물은 냉장고보다 차갑다. 빛은 없지만, 많은 생물들이 스스로 빛을 낸다. 지구 생명체의 절반이 살고 있지만 대부분 미지의 존재다.


"미지의 물속 세상이 우리의 발밑에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 또다른 수중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일종의 마법처럼 나에게 경이와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22면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숨죽이게 만드는, 말 그대로 ‘깊고 어두운’ 세계. 《언더월드》는 내게 심해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심해로 연결되는 단 하나의 채널이었다. 저자가 전하는 심해의 경이로움과 기묘한 생물들,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형태로 파인 해구와 해곡 등 상상하지 못한 지질학적 구조들까지, 과학적인 지식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은 판타지처럼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지루하고 어려운 과학책일 거라 예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설인지 과학책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어진다. 전미 잡지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이자 <O, 오프라 매거진>의 편집장이었던 수전 케이시의 필력은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이었다.


챕터마다 인물들이 등장하며 플롯이 흐르고, 그 안에 과학 지식이 녹아있다. 팩트를 나열하기보다 저자가 보고 느낀 감각을 과하지 않은 시적 언어로 전달한다.


사실 심해보다 저자의 글솜씨에 홀려서 읽었던 것 같다. 담백하고 깔끔한 단문의 책들을 주로 읽다가 길고 복잡하지만 전혀 힘들이지 않고 술술 써내려간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글에 빠졌다. 나도 모르게 낭독하며 글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 책 자체가 어느새 내게는 심해로 보였다. 문장과 내용이 안팎으로 모두 신비롭게 살아있었다. 활자는 검푸른 수압 속을 유영하듯 흐르고, 문장은 생물발광처럼 어둠을 밝힌다. 모든 문장들이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메시지들은 찬란하고 역동적인 동시에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차갑고도 찬란하며, 삭막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치열하게 살아내는 존재들로 가득한 심해의 경이로움을 이보다 더 경이롭게 전달할 수 있을까. 활자들이 생명처럼 움직이며 지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하늘을 날면서 비행기를 고치고 있었던 셈이죠."
-221면
심해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그들 또한 심해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빛도 닿지 않는 그곳을 향해 생명을 걸고 묵묵히 나아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존재였다.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어떻게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이 책을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한 편의 긴 시이자 기도 같았던 시간이었다. 물 한 방울 없이도 물속으로 고요하게 가라앉는 듯한 경험이었다.


책을 덮은 뒤에도 여전히 심해에 잠긴 듯했다. 심해는 깊고, 어둡고, 멀다. 하지만 그 안엔 빛나는 생명들이 있고,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심해의 경이로움을 경이롭게 전하는 데 성공한 《언더월드》, 꼭 경험해보길 바란다.


#까치글방서포터츠3기
#도서지원
#언더월드 #수전케이시 #심해 #바다 #바다생물 #바다이야기 #과학책 #과학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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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줄, 나를 지키는 필사책 - 내일을 꿈꾸는 1020을 위한 문장들
구병모 외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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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모임 지원 이벤트 당첨!
창비 출판사에서 5권의 책을 제공받아
3년째 함께 하고 있는 독서모임 멤버들과 나누었다.
(*** 아래의 내용은 멤버들과의 모임 대화를 종합한 것입니다.)


필사책을 처음 접해본 분들도 계시고, 아끼는 마음에 책에 직접 쓰지 않고 노트에 따로 필사한 분들도 계셨다. "내일을 꿈꾸는 1020을 위한 문장들"이란 부제를 가진 필사책인만큼, 아이들이 따라 쓰면 좋을 문장이 그득하고 구성도 다채로워 자녀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분들도 많았다.


이 책의 첫 번째 강점으로 꼽고 싶은 점도 바로 그것이다. 구성이 다양하고 알차다. 십 대들도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챌린지 요소를 곳곳에 배치했다.


다이어리를 꾸미듯 다양한 활동을 유도하는 아기자기한 구성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교육적이기도 해서 엄마 입장에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책을 읽게 도우려고 실용적인 아이디어들을 총동원한 결과물 같다.


--- 마음 발견 테스트
순서대로 필사하지 않아도 괜찮다. 고민이 될 만한 상황을 목차로 구성해, 마음에 맞는 문장을 만날 수 있도록 화살표 테스트를 제공한다. 결과에 따라 마음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보는 기회가 된다.


--- 오늘의 단어, 오늘의 한 문장
본문에 표현된 단어 하나를 정확하게 뜻풀이해주고, 그 단어를 활용해 자신만의 문장을 써보는 공간이다. 그저 따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단어를 통해 속마음을 꺼내보는 훈련을 할 수 있다.


--- 필사 습관 기록
필사를 마친 후, 해당 칸을 색칠로 표시해 직관적으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 나만의 독서 기록
예쁜 책장 일러스트에 자신이 읽은 책을 기록할 수 있다. 완독한 책 제목을 한 권씩 채우며 책장을 완성해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투두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와 반대로 빈칸을 채우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구병모, 김려령, 김민서, 김중미,
백온유, 이현, 이희영, 천선란.
⁠창비청소년문학시리즈의 대표작에서 엄선한 문장들이야말로 이 책의 백미다.


긴 서사에서 빠져나와 문장 자체로 만나는 소설가의 언어는 더 세밀했다.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들은 언어의 미각을 날카롭게 다듬는 도구가 된다.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따라 쓰는 동안 그들의 어휘, 어순, 리듬을 민감하게 음미할 수 있었다. 뇌는 반복을 좋아한다. 좋은 문장을 자주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문장을 닮아갈 거라 믿는다.


다양한 작가들의 문장이 섞여 있어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문장, 각자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 '이 작가의 문장은 무겁고, 저 작가의 결은 부드럽네.' 문장을 감각적으로 구분하는 경험들이 나만의 문체가 만들어지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필사를 할 때는 무작정 베껴 써서는 안 된다. 문장을 왜 따라 쓰는지, 특정 문장이 왜 울림을 주는지에 초점 두어야 변화가 따라온다. 문장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시간. 번잡한 일상을 밀어두고 타인의 세계로 걸어들어가 보는 일. 필사는 독서와 쓰기를 높은 밀도로 만끽하는 활동이다.


하루하루 쌓인 필사를 돌아보며, 어떤 단어와 문장에서 힘을 얻었는지 보이지 않던 나의 흐름을 발견하게 하는 책이었다. 문장을 수집한 책을 통해, 문장에 비친 나를 수집해두는 책이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익숙하지 않던 단어와 낯설게 여겨졌던 문장들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앉아있다. 그 변화는 작지만 크다.


소설의 문장을 통해 자신만의 감각을 깨우고 펼치는 필사를 놀이처럼 즐겨보길 바란다.


#도서지원 #하루한줄나를지키는필사책 #창비 #청소년문학필사 #필사책추천 #필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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