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성의 소리영어 Plus - 영어를 우리말처럼 선명하게 듣는 가장 확실한 방법
윤재성 지음 / 스토리3.0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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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제는 글로벌 시대!"라고 모두가 외쳐왔다.

그래서일까 사진일을 하면서 기업과 기관에서 진행하는 각종 세미나, 전시회, 시상식, 워크샵, 프로모션 등의 행사촬영을 가면 항상 외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몇 년전부터는 주최측에서 동시통역이나 통역도우미, 통역사회자 등을 쓰지 않고 그냥 영어로만 진행하는 세미나가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외국인이 없을 때조차 한국인들끼리 영어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결혼식 촬영을 가도 이제는 외국인들이 하객으로 온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내게도 이렇게 만난 외국인들에게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고 감사의 답메일을 받는 일은 자주 있는 일들 중에 하나가 됐다.

 

이처럼 글로벌 시대를 피부로 느끼고 있어서인지, 영어를 곧잘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서 자극을 받아서인지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호시탐탐 어떻게 하면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계기를 만들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이번에 '윤재성의 소리영어 PLUS'를 만나게 됐다. 우연이지만 내겐 너무나 절실했던 선물이 되었다.

 

제목만 얼핏보면 중국의 크레이지 영어의 한국판인가 싶지만 윤재성의 소리영어는 그와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왔던 것처럼 영어를 공부나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소리를 본질로 하는 언어'로써 접근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즉 무작정 외우고 배워야만 하는 줄 알았던 영어를 유아가 모국어를 습득하듯 체득 해가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 언어의 본질은 '소리'입니다. 글은 소리를 기록하고 표현하기 위해, 즉 한참 후에나 생겨난 것이죠. 우리의 한글만 봐도 세종 25년인 1443년에 창제되었습니다. 더불어 글을 몰라도 과거 사람들은 말하고 듣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글은 단지 소리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기호에 불과한데, 우리가 영어라는 언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건 '알파벳'이라는 글자입니다. 영어라는 소리를 글로 배우려고 한 겁니다. 마치 음식을 입으로 먹지 않고 눈으로 먹으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76쪽)

 

 

독특하거나 획기적인 실천 매뉴얼을 자처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듯이 이 책도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강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영어를 '언어'의 본질인 소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강력하게 독자를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다만 책의 후반부에 있는 실천 방법을 빨리 읽고 싶어 조바심이 날뿐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반복강조하는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어는 평생 배우고 연마해야 하는 학문이나 무술이 아니라 소리로 전달되는 실용언어일 뿐이다. 한 번 체득하면 모국어처럼 평생 사용할 수 있게 된다.

 

-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몇 살까지 배우기만 할 건가요. 영어는 빨리 익혀서 바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생 배울 학문이 아닙니다. 학문으로서의 영어는 학자에게 맡기세요. 여러분에게 영어는 지금 당장 사용해야 할 실용적인 무기입니다. (44쪽)

 

 

2. 영어를 완벽하게 한다는 기준은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자막없이 완벽하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3. '듣기'가 먼저 되어야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다.

 

- 영어를 소리로 배워야 하는 이유는 아기가 말을 배우는 본능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말고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소리로 습득한 언어는 오래 기억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케팅의 고전이라 불리는 포지셔닝Positioning은 어떻게 하면 광고와 마케팅이 효과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책입니다. 사람들에게 제품을 널리 알리고 기억시키는 방법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사람의 기억에서 소리를 통해 흡수한 정보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소개합니다.

"소리 내어 읽지 않고 시를 외우려고 해보라. 두뇌의 작업 언어인 청각 요소를 동원한다면, 글을 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잭 트라우스&앨 리스, 포지셔닝Positioning, 을유문화사, 2006)

즉, 사람은 문자보다 소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더 잘 기억하기 때문에 광고를 통해 제품을 각인시키고 싶다면 문자가 아닌 '소리'를 활용하는 게 더욱 효과적입니다.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글 읽는 법을 배우기보다 훨씬 쉽다는 일반적인 현상을 통해 볼 때 소리가 글보다는 받아들이기 쉽고 오래 기억된다는 말입니다.(101~102쪽)

 

4. 그 동안 우리가 배운 영어공부는 이 과정이 거꾸로 된 잘못된 방법이다.

 

5. '듣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발음'과 '발성'의 차이 때문이다. 거기에 액센트와 호흡 효과가 더해지고 있다.

 

- 영어에는 사실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소리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센트'와 '호흡'입니다.(중략) 한국어는 성대를 중심으로 목의 윗부분에서 나는 소리인 것에 비해 영어는 목 아랫부분에서 강한 악센트를 주고 호흡을 넣어 음을 끊듯이 소리를 냅니다. 동양인의 소리 내는 방식과 서양인의 소리 내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이죠.(84~85쪽)

 

6. 제대로 된 '영어 듣기'를 위해서는 조용한 스튜디오에서 학습자를 배려하여 또박또박 녹음한 회화가 아니라 일상 생활 속 대화가 녹아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최적의 콘텐츠이다.

 

7. 영어의 '발성' 원리와 액센트를 알고 '듣기'를 반복하면 어느 순간 선명하게 들리게 되며, 이후에는 어린아이가 말문이 터지 듯 영어로 말하게 된다.

 

8.시중에 숱하게 많은 영어 비법대로 해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 사례는 없으나 '소리영어'로 학습하면 1년만에 귀가 열리고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게 된 사례가 실재한다.


이렇게 요약되지만 각 내용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저자는 '조기교육의 실효성','공교육과 사교육 문제', '영어마을의 정책적 실패원인', '토익, 토플의 범람과 실체적 문제점' 등에 대한 오랜 고민과 생각을 정리하여 조목조목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 중에서 영어 조기교육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학부모에게 많은 부담을 덜어줄 것이다. 

 

- 영어 조기교육은 효과적일까요. 정말로 영어는 어릴 때 배우지 않으면 잘할 수 없을까요.(중략)

어릴 때 영어를 배우는 게 효과적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유럽 사람들은 '영어 교육의 적기란 없다'고 단언합니다. 30~40대에 영어를 처음 배우기도 하고 심지어는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을 배우기 시작해 단기간에 원어민과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중략) 

중언어 전문가인 하버드 교육대학원 '캐서린 스노'교수는 (중략) 모국어(제1국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후에 외국어(제2국어)를 배우는 것이 이를 빠르게 습득하는 길이라 주장합니다. '하나의 언어에 대한 지식, 기술, 이해는 또 다른 언어를 대하고 배우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 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듣고 말하기에 실패할 것 같아요."라는 물음에는 '시기'의 문제가 아닌, '한국 고등학교의 수업 방식이 문제'라고도 지적했습니다. 덧붙여 그녀는 유럽 사람들이 영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몇 년간 관찰한 결과, 영어를 가장 빨리 습득하는 계층은 청년층이었고, 두 번째는 장년층이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가 아이들이었는데 이 집단은 영어의 소리를 가장 빠르고 흡사하게 흉내 내지만, 어휘력이 느는 정도가 부진하고 더불어 가장 빨리 모국어를 함께 잊어버리는 특징 때문에 습득 속도가 느리다고 강조했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4세든, 14세든, 40세든 영어를 배우겠다는 동기가 확실하고, 영어에 많은 시간 노출되면 나이에 상관없이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31~32쪽)

 

인터넷을 보면 언론사 기자마저도 '병이 낫다'를 '병이 낳았다'고 쓰는 요즈음의 세태이다보니 내 딸아이에게는 '한국말과 한글 먼저 제대로 배우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영어조기교육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저자의 글에서 더욱 안도하고 확신하며 심적부담을 확실히 덜게 되었다.

 

 

저자는 목을 기준으로 윗쪽 두성으로 '발음(두성법)'하는 우리말과 목 아래 성대로 '발성(발성법)'하는 영어와 소리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성악과 판소리를 예로 들고 있다. 평소 두성으로 발음하는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기 위해 발성법을 배우고 연마한다. 반면 평소 발성을 하는 영어권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두성법을 배우고 연마한다는 말이다.


요즈음은 노래경연대회 TV프로그램이 많아서 일반인들도 전문적인 음악비평을 수없이 많이 보고 듣게 된다. 음치인 나 역시도 노래경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 목소리는 미성이다'는 것과 '그 동안 소리내는 방법을 몰랐다'고 스스로 진단할 수 있을 정도이니 저자의 이런 비유는 너무도 이해하기 쉽다.

 

저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www.hearsayenglish.com 에 들어가면 책에 소개된 예제 파일들과 맛보기의 30개 강의 자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예제 파일을 다운받아 들어보면 정말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홈페이지에 있는 저자의 '쉬운 강의'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저자가 문장을 풀어줬다고 곧바로 내가 똑같이 발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저자의 주장을 직접 확인 할 수 있어서 조금 과장하자면 전율이 흐른다.

 

책의 후반부에는 '소리영어'를 통해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을 쌓은 평범한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다. 그 중에서 '영어에서 해방되어 행복하다'라는 인터뷰가 메아리처럼 공감되어 간다. 

 

또 중학교 중퇴 후 '소리영어'를 1년간 거쳐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에 진학한 후 영어만큼은 단 한번도 1등급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장 쉬운 과목이 됐다는 여고생의 인터뷰도 인상적이다. 물론 홈페이지에 가면 개그맨 정종철씨의 인터뷰 영상도 볼 수 있다.

 

책의 말미에는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은 30개 문장에 대한 스크립트를 싣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누구나 영어회화와 관련된 작은 경험들 몇 가지는 갖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몇 번의 일화들이 있다. 

 

90년대 중반 학창시절, 교대역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외국인에게 콩그리쉬로 '갈아타는 곳'을 안내하면 반드시 "Over here?" 또는 "Over there?" 라고 반문하는데 이해하지 못했던 일.

 

백인여성이 카세트 테이프Cassette Tape 판매하는 곳을 묻는데 Cassette가 "까쓸"이라고 들려서 알아듣지 못하고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일.

 

복학 후 처음으로 원어민 강사의 수업을 듣다가 나중엔 원어민 강사에게 영어로 웃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가 크게 웃었을 때 느꼈던 환희의 기억.

 

3년전 마카오에 출장 갔을 때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영어가 서툴러 예약자와 투숙자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숙박 보증금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해 입실하는데 1시간 이상 소요됐었던 일화. 

 

체크아웃하던 날 아침, 식당에서 서빙보는 여직원이 여행가방 보관증에 대해 설명하는데 알아듣지 못하자 그 마카오 여자가 면전에서 비웃었던 일.


각 종 행사장에서 외국인과 웃으며 대화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느껴지는 선망의 감정.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로 인식되는 인도 사람들마저 세미나에서 영어로 발표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자괴감.


솔직히 이 모든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각색해서 친구들과 함께 웃어 넘길 수 있다.


언젠가 내가 결혼식 촬영을 했던 신부가 미국 유학을 다녀왔거나 영어학원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하객 중 어느 아가씨가 들어와서는 신부와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재미교포인가 싶었는데 다른 하객들과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조선 원어민이었다.


어느 순간 신부대기실에 신부와 그 하객 그리고 나만 있을 때였다. 나를 의식한 듯 둘이 영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들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그 두 사람은 내게 허세를 내게 부린 것이다. 그런데 유창하게 보이던 그 대화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부가 결혼전날밤에 긴장돼서 잠을 몇 시간 못자고 새벽같이 움직이는 바람에 아침식사도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따위 내용을 촬영기사가 알아듣지 못하길 바라며 한국사람들끼리 굳이 영어로 말했어야 했나. 혼자서 모멸감을 느꼈다. 대놓고 무시한 것 아닌가. 촬영기사 따위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영어로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을 보니 당시 내게 모멸감을 줬던 그 영어회화가 사실은 원어민 발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영어회화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동기가 이런 자괴감이나 모멸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왕 영어를 하려면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 역시 강하다. 

 

영어회화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드디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원하던 영어 습득의 가장 확실해 보이는 길이 나타난 것이다. 

찌릿찌릿한 미세한 전기자극처럼 오랜만에 모든 혈관부터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설렘과 의욕으로 넘쳐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느낌이다. 책을 읽고 이렇게 의욕이 넘치기는 처음이다.

 

기존 영어 학습법처럼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냥 열심히 하면 언젠가 향상되겠지라고 기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누구라도 1~2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반드시 원어민 수준으로 된다는 목표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목표로 된다.

 

2014년을 마무리하는 12월.  2015년의 새로운 목표 하나를 선물 받았다. 정말 멋진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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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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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최근 배우 김혜자씨가 아름다운 이야기라며 시나리오에 반해 '마더' 이후에 5년만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개훔방. 2014년 12월 개봉예정)"의 원작 소설이다. 

 

직선적인 줄거리, 단출한 등장인물, 친절한 복선, 현실감있는 개연성 그리고 짧고 담백한 문장은 읽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다소 엉뚱하고 희극적인 제목마저도 내용 그대로이다. 

 

만약 적당히 당겨진 고무줄 같은 긴장감Tension이 유지되는 것을 '재미'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작품이다. 개를 훔쳐 사례금을 받아내기 위한 계획수립으로 시작해서 마무리까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독자는 졸지에 공범이 되어 버린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집을 떠나버리고 남은 가족은 집세를 내지 못해 말 그대로 거리로 나앉게 되어 자동차에서 주거하게 된 초등학생 소녀의 이야기다. 순진하게도 500달러만 있으면 셋집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개를 훔쳤다가 돌려줌으로써 사례금으로 500달러를 벌려고 한다는 발칙한 내용이다.


성장소설이라지만 주인공 조지나와 그 가족이 처한 상황이나 배경은 처절하고 처참하다. 조지나의 처지가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채 현실과 너무도 똑같이 그려져있다. 그래서 가슴마저 시리다. 

 

- 그런데 갑자기 루앤이 끼어들어 자기도 그 영화를 엄청 재밌게 봤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스파게티 가락만 계속 돌렸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점점 커졌다. 이대로 두둥실 날아올라 천장을 뚫고 새파란 하늘로 떠오를 수 있다면. 나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애들과 함께일 수 없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모두들 팔목에 하나씩 두른 팔찌도 나에겐 없다. 이 아이들이 쇼핑몰을 구경하며 팔찌 등을 사는 동안, 나는 월그린 할인매장 화장실에서 내 속옷을 빨고 있었다. (101쪽)



성장소설이나 동화라고 해서 알록달록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세상을 묘사해도 왜곡된 시선을 강요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현실에서는 좌절도, 괴로움도, 슬픔도 있음을 알려 줄 필요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현실의 암울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 두 방향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또 다른 면에서는 불쌍한 조지나의 처지에 대한 연민 내지 동정으로 흘러버려 자칫 감상感傷에 머무를 수도 있었겠지만 꿋꿋한 조지나의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이야기를 따라 가게 된다.

 

분명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가히 '잔혹한 리얼리티'라 할만한 현실 모사模寫때문에 나는 차마 아름답다고 말하기가 조금은 망설여진다. 등장인물들이 처참하게 피튀기며 죽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뚜렷한 현실감각으로 풍부한 개연성을 담아 그려낸  이 작품이야말로 '잔혹한 리얼리티'라고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작품에 대한 공감의 방향이 한쪽으로 치우쳐진 것일수도, 작가의 의도를 오해한 것일수도 있겠다.

 

 

나는 두 눈을 세차게 끔뻑인 다음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비참해도 남들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하지만 내 운동화 끝은 거의 헤져 있었고, 그 틈으로 늘어진 파란색 양말 끝이 보일락 말락 내비쳤다. (55쪽)

 



겨우 초등학생이지만 조지나는 힘들고 괴로워 몸부림치면서도 좌절하지는 않는다. 자책하지도, 자학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갖는 장점이며 의미이다. 괴롭고 슬프기 때문에 처참한 현재 상황을 하루 빨리 벗어날 목표를 세워서 실행한다. 조지나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재빨리 포기하거나 인정한다. 또는 외면 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버텨나간다. 성장소설이라지만 불혹을 넘긴 내게도 느껴지는 것이 많다. 

 

 

 

- 내가 지나갈 때마다, 애들이 내 이름을 들먹이며 킥킥대고 쑥덕쑥덕 하는 걸 들은 것도 같다. '흥, 누가 신경이나 쓴대?' 정말이었다. 나는 그 애들에게 관심을 끈지 오래였다. 심지어 루앤도 관심대상에서 지워버렸다. 요즈음의 나는, 차 안에서 살게 되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을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곤 했다.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나를 비웃는 것일 테지. 가령, 나는 멜리사 개빈이 반쯤 먹다 버린 그라놀라 바를 쓰레기통에서 꺼내 윌리용 음식봉지에 담았다. 제이크 샘슨이 나더러 거지라고 놀렸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133쪽)



갑자기 나타난 수상한 등장인물 무키아저씨. 작가는 무키아저씨를 통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조지나와 독자에게 따뜻한 조언을 하고 있다. 


- "하지만, 그런 일을 왜 공짜로 해주는데요?" "왜냐면 말이다, 때로는 나한테 돈이 필요한 것보다 그런 일을 해결하는 게 더 급하거든." 헛소리야, 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어쨌든 그에게 돈이 아예 없는 것 같진 않았다. 무키 아저씨는 야구 모자를 벗고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말이야, 이 아저씨한테는 신조라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알려주랴?" 나는 흥,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라는 거다. 너한테도 신조가 있냐?" "아뇨." (207쪽)



어처구니 없는 가난때문에 부숴진 가정이라는 처참한 상황을 설정해 두고 작가가 말하려는 주제가 무키 아저씨의 신조로 표현된 것이다. 


나는 약 15년전부터 주변 지인들에게 PC스펙과 견적을 상담 해주거나 직접 용산에서 부품을 구해 조립해서 설치하고 네트워크 구성까지 해 주고 있다. 무키 아저씨처럼 무보수는 물론 오히려 내돈으로 경비지출을 해오다가 3년전부터는 고맙다며 기름값이라도 억지로 주면 그 손이 민망할까봐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제는(11월27일) 내가 전날 설치해준 PC의 셋팅을 다시 해야 했다. 시간관계상 PC를 회수해서 용산에 세팅을 맡기면서 퀵서비스 착불로 보내게 했는데 항의전화를 받았다. 왜 착불로 보냈냐고. 반복되는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여 소위 '갑질'을 하는 경우다. 이것이 현실이다.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라는 무키 아저씨의 신조는 이런 현실을 유연하게 극복해야 한다는 충고다. 어떤 경우라도 신조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니까. 

 

 

작가는 특별한 미사여구나 늘어지는 문체를 빌어오지 않고도  상황에 따른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려내고 있다. 누구나 그 시절을 지나왔으면서도 어른이 되면 잊게 되는 감성을 작가만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조지나가 500달러에 셋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것을 동기삼아 개를 훔칠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가 어린아이답게 순수하다. 그리고 어렵게 훔친 개, 윌리와 정을 나누는 것 역시도 흐믓하다.

 

한편으로는 조지나가 개를 잃어 슬픔에 빠진 카멜라아줌마에게 접근하여 사례금이 적힌 전단지를 만들게 하고, 사례금은 500달러를 써야 한다고 제안하며, 카멜라아줌마가 그 500달러를 누군가에게 빌리도록 압박을 가하는 장면에서는 전혀 아이답지 않은 언행에 오싹하기도 하다. 

 

인간의 욕심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는 것이 보편적 사실이라지만 그것이 순수한 어린아이에게 투영되니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다. 작가의 뚜렷한 현실감각과 작품 전반에 흐르는 풍부한 개연성이 돋보인다고 할까? 불편하지만 이미 조지나와 공범이 되어버린 독자는 그 상황에서라면 이 발칙한 초등학생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공감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미리 말하자면 해피엔딩이다. 

공범이었지만 독자가 원하는 결말을 향해 조지나는 그 순수함을 되찾게 되고, 거처없던 가족은 드디어 셋집을 구한다. 

 

보통 해피엔딩에선 더 이상 독자가 등장인물을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해결 해 주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해피엔딩마저  디테일이 살아있는 리얼리티이다. 

 

집을 구했지만 조지나가 그토록 원하는 바를 모두 갖춘 집이 아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전전세를 들어가는 것이다. 엄마 친구의 친구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미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인데 아이를 돌봐주고 집세를 보탤 사람을 찾다가 조지나 가족과 조건이 맞아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엔딩마저 디테일이 살아있다. 그렇기때문에 독자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조지나의 희망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비틀즈의 음악들이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오래된 동요처럼 기본 코드 두세개로 작곡됐다는 것이다. 이런 비틀즈의 음악처럼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하고 직선적인 줄거리가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명료한 주제의식이 반영된 훌륭한 작품이다.

 

이제 이 작품이 곧 영화로 개봉된다니 한국식 '개절도'의 해석을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생길 것이다. 

제작진의 삼고초려 끝에 어렵게 출연 결정을 한  배우 김혜자씨가 개를 잃어버린 카멜라 아줌마로 분한다고 한다. 나머지 출연진을 살펴보니 아역 탈렌트 이레, 배우 최민수, 강혜정, 이천희씨이다. 원작의 등장인물이 단촐하다보니 배역이 눈에 보인다. 트레일러를 보면 기본 줄거리 외 나머지는 완전히 새롭게 각색된 듯 하다.

 

이 출연진들이 영화 홍보를 위해 SBS런닝맨에서도 뛴다니 더욱 기대가 된다. 트레일러를 보니 어쩐지 런닝맨과 영화 속 분위기가 비슷할 것 같다.


아름답고 훌륭한 소설 한편이 영화와 예능 프로그램으로 확대되니 원작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색다른 묘미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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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겠다 -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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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지도 않은 책들에 대한 서평을 서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더구나 작가도 아니면서 '써 나가겠다'라는 듯이 쓰고 있는 것은 또 무슨 하릴없는 짓인가 싶다.

 

아마도 부끄러워서 일 것이다. 미리 고백해 버림으로써 고민과 부담을 덜고자 함일 것이다.

 

부끄러운 첫 번째는 소개되는 스물세편의 작품 중에 내가 직접 읽어 본  책이 '어린왕자' 한편 뿐인데 그조차도 중학생 때 읽은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계몽문화사의 위인전기로, 중학교 때는 코난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 고교시절에는 심리학이나 철학입문서로 책읽기를 습관 붙여왔지만 언젠가부터는 소설을 비롯한 문학은 읽지 않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소설을 기피하게 된 계기가 군대시절에 있었다. 군대에서도 책읽기는 멈추지 않았는데 일병때부터는 정훈과 한켠에 있는 서고를 뒤지거나 휴가 복귀 시 원통의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곤 했다. 

 

당시에 나에 대한 오해가 생겼는지 어느 순간부터 작심한 듯 나를 괴롭혔던 사병식당의 취사병 고참이 있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연애소설을 끼고 살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경멸스러울 수 없었다. 아마도 그 후부터는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 차체를 기피했던 것 같다. 어리석었다.

 

이제서야 후회가 되는 것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읽었어야 했던 문학들을 너무나 많이 놓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불혹이 되어서야 줏어담겠다고 뒤를 돌아 쪼그리고 앉아 주섬거리고 있는데 '읽어가겠다'라는 책이 버럭 소리치고 있다. 

 

"네 마음대로 읽더니 고작 이거냐?!!! 어리석은 새끼! 독서도 너만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부끄러운 두 번째는 일기 형식 내지 독서 노트 형식의 서평일지라도 온라인에 게시하는 이상 타인이 읽는다면 소개된 책을 읽고 싶도록 써야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책의 서평을 찾아 읽는다면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다른 이의 생각'을 보고 싶다거나 '관심이 있는 책인데 어떤 내용인가?'라는 사전정보를 찾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나 잘났다.'는 듯이 분석만 해 놓는다고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고 감탄하면서도 정작 서평을 쓸 때에는 마치 스스로 객관화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분석만 하는 서평은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요즈음 말로 내가 뭐라고. 내가 전문 비평가도 아닌데.


이 책처럼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고, 그 책의 매력을 정확히 찾아 내어 소개한다면 서평을 읽는 이도 책을 꼭 읽고 싶을 것이다.

 

 

이제 '읽어가겠다'를 읽고 나니 내게는 스물세편의 필독서 목록이라는 숙제가 생겼다. 더구나 이름도 낯선 작가도 소개받았고, 이름만 알던 작가의 작품세계도 소개받았다. 


스물세편의 작품을 모두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 바로 '읽어가겠다'이다.



소개한 책들을 이미 최소 두번 이상은 읽었다는 작가는 라디오 방송을 하듯이 '오늘 소개할 작품은 누구의 어떤 작품입니다.'로 편안한 어투로 시작한다. 대화체나 문어체도 아닌데 마치 작가가 자상하게 얘기를 해주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책 제목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읽어야 했다'거나 '꼭 읽어라'도 아니고 이미 수차례 읽었다는 작가도 스스로의 결의를 담은 '읽어가겠다'라는 제목은 이 책을 접하고 느낄 독자의 미묘한 심리까지도 미리 어루만지는 듯하다.



스물세편의 작품들을 하나씩 섭렵하면서 이 책을 다시 한번 들춰본다면 또 다른 묘미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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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박물지 - 이어령의 이미지 + 생각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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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전통 생활용품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과 그 의미를 찾고 우리만의 문화 특성을 읽어가는 책이다.

 

작가는 특유의 문체로 가위부터 화로까지 모두 예순네개의 전통 생활용품을 풀어간다. 그 동안 누구보다 따뜻하게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바라보던 작가의 시선이 전통 생활용품이라는 사물에 머물게 된 것이다.


동서고금의 방대한 학식을 갖춘 저자 특유의 문체와 논리 전개는 언제나 읽는 이에게 공감과 이해라기보다는 감탄하며 그대로 물들어 가게 하는 힘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두 배의 수확을 위해서는 농토를 배로 늘리는 확장책을 썼다. 그 농사기술에서 생겨난 것이 개간법이고 그 개간법을 이념화한 것이 경작하다는 뜻을 지닌 문화Culture라는 말이다. 한때 유럽의 제국을 일으킨 팽창정책과 식민주의 그리고 이른바 미국의 개척정신이란 것이 그것이다." (본문 44쪽 '논길')


"물과 불은 영원히 상극하지만 그 사이에 냄비를 매달면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지듯이 나무와 무기질인 돌의 부딪침 사이에 옷감이 끼면 아름다운 율동과 윤택이 생겨난다. 다듬잇방망이, 다듬잇돌 그리고 그 사이의 천, 이렇게 이질적인 세 가지 다른 빛이 하나의 음향으로 통일된다. 이때 이미 다듬잇방망이는 곤봉이 아닌 것이다. 옛날 칼을 모아 보습을 만들고 포탄의 탄피를 주워다 교회나 학교의 종을 만들었던 그 슬기의 원류인 것이다." (본문 49쪽 '다듬이')


"그 담 그 울타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있는 한국인의 독특한 '우리'라는 집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울타리'란 말 자체가 일인칭 복수인 '우리'와 같은 뿌리의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나의 아내"라고 할 때에도 "우리 아내"라고 말하고, 서양 사람들이 "내 집", "내 나라"라고 할 때에 한국인은 "우리 집", "우리 나라"라고 한다. 따로, 그러나 함께 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힘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의 돌담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본문 53쪽 '담')


"한국인의 의상을 보아도 단추가 아니라 모두 끈으로 되어 있어 매도록 되어 있다. 한국의 저고리에서 옷고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실용적인 기능이요 장식이다. 인간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맺고 풀고 잇고 끊는 끈의 관계로 나타낸 것이 한국인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고립무원의 상태를 끈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본문 76쪽 '매듭')


서평을 통해 매번 하는 말이지만 이런 논리 전개와 문체가 작가 이어령 글의 매력이며 특징이다. 


특히 이번 책은 그 대상이 사물이기 때문에 오브제를 찾는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을 주게 된다. 사물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고 유려한 해석은 예술가들의 지리한 탐구과정을 단축시켜 주고 영감을 받도록 도움을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원래 사람의 허리는 재는 것이 아니다. 인체의 허리는 밥 먹었을 때 다르고 굶었을 때 다르며 건강할 때와 병을 앓고 있을 때가 모두 다르다. 아무리 치수를 정확하게 재어 만든 옷이라도 사람의 몸은 콘크리트 건축물이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의 몸을 잰다는 것은 흐르는 물에 표를 해놓고 떨어진 칼을 찾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생명체를 어떻게 자로 잴 수 있단 말인가." (104쪽 '바지')


치수없는 바지에서 시작해서 숭고한 생명에 대한 찬가로 다다른다. 오브제를 찾아 상징으로써 끄집어 내어 재창조하는 예술가의 그 고단한 작업과정이 이 세 문장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버선은 발을 감싸면서도 발의 생김새를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독자적인 형태와 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버선은 신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어도 그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발에 신는 양말인데도 버선은 실내장식으로 꾸며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이한 개성을 지닌다. 발목과 앞부리의 완만한 두 곡선이 기와의 추녀 끝처럼 기막히게 마주쳐 살짝 위로 솟아오른 버선코의 그 섬세한 형태 - 그것은 멋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 엄지 발가락과는 상관없이 디자인된 추상적 선을 그려내고 있다. 뒤축과 뒤꿈치의 비율이나 회목과 버선목의 길이나 둘레도 모두가 다 발의 인체공학에서 일탈된 형태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의 버선은 발의 미메시스가 아니라는 데 그 아름다움이 있다." (본문 112쪽 '버선')


버선이 갖는 선의 미학을 찬양하는 글과 말은 숱하게 보고 들었지만 이토록 분석적으로 설명한 것을 보고 들은 적이 없다. 모방과 모사를 극복한 미의 추구. 버선의 선이 갖는 함축적인 미학을 누가 또 다시 이처럼 풀어 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창호지는 빛을 걸러서 반쯤만 들인다. 빛은 은은한 그늘로 방안에 젖어들고 웬만한 먼지와 때 그리고 흠집들을 감싸준다. 조선조 백자의 아름다움은 창호지를 통해서 들어온 빛 속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 유리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밝은 대낮의 공간 속에서는 상처 투성이의 금간 그릇으로 보일 뿐이다." (본문 200쪽 '창호지')


번득 사진작가 구본창의 백자 작품이 떠오른다.  http://www.bckoo.com/sub_work11.html

 

이 글이 그대로 구본창 사진작가의 백자 작품들을 글로써 부연설명해 주고 있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선을 말할 때 예외없이 인용되는 것이 바로 용마루나 처마끝 선이다. 다 같은 기와지붕 양식인데도 한국의 그 처마는 직선적인 중국이나 일본 것과 달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그냥 곡선이 아니라 그 끝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치켜져 올라가 있다. 땅을 억누를 듯이 육중한 지붕의 무게가 갑자기 부력을 얻어 허공으로 떠오르려 하는 것이다.(중략)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선의 미라기보다 반작용의 역학적 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선은 운동을 나타낸다. 거기에는 방향성과 속도와 그리고 중력이 있다. 선처럼 인간의 욕망을 역학적으로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기와지붕의 선이 단순한 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용마루나 기왓골보다도 처마끝에 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처마끝은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이 만나는, 말하자면 수직선과 수평선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과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힘의 교차점, 거기에서 처마끝 곡선이 빚어진다. 그것은 의식의 표층을 뚫고 올라오는 무의식의 욕망이다. 그 억압된 욕망 그리고 분출하는 그 원색의 짙은 반작용의 운동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살짝 들어올린 처마밑을 장식하고 있는 단청이다." (본문203쪽 '처마')


사진을 처음 배울 때 이유도 모르고 민속촌의 장독대를 찍고, 경복궁의 처마와 단청을 찍었다. 무엇을 표현하고 찍을지도 모른 체 그냥 자주 보았던 이미지를 쫓아 흉내만 냈었다. 이제 버선과 처마가 갖는 선에 대한 저자의 탁견을 보고서야 나의 카메라 렌즈가 향했던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모방, 모사, 흉내만으로는 너무 머나 먼 길이다.

 


"조각의 아름다움은 물체성에 있다고 말한다. 같은 사람을 나타낸 것이라 해도 그림으로 그린 초상화는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조각으로 된 것은 그렇지가 않다. 하만R. Hamann의 말대로 물체는 물리학적으로 공허의 반대인 충실을 의미하게 되고, 그래서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압력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특징 때문에 딱딱하면 딱딱할수록 물체성이 높아진다. 조각가가 가능한 한 화강암과 같은 견고한 재료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문 255쪽 '항아리')


이즈음에서 내겐 영감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힌트라 할만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조각이 갖는 아름다움의 궁극인 물체성을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이것이 오브제 찾기의 시작이라면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이 연일 이슈다. 제왕적이고 독특한 리더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방법으로 빼어난 실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김성근 감독의 어록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그 중에 '돈을 받기 때문에 프로가 아니라 프로이기 때문에 돈을 받는 것이다.'라는 말은 단지 '사진쟁이'일뿐인 나의 치부에 콕 박혔다.


이어령의 '우리문화 박물지'는 어쩌면 내가 진정한 프로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길에 대한 수많은 힌트와 영감을 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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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 금학도 - 이외수 오감소설 '신비'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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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이야기가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시공간에 독자가 정서적으로 녹아들어 간다면 작품에 대한 몰입도가 증가하고 그 몰입 자체가 재미있는 꿈을 꾼듯 한 독특한 경험으로 남게 된다.


보통 잘 짜여진 이야기 하나만 있어도 독자의 몰입도를 증가시킬 수 있다. 이것이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이며 최근에 회자되는 '스토리 텔링'의 장점일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다른 문학보다 작가의 의도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게 한다. 


최근에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없거나 의도를 알 수 없이 단지 이야기만 빠르게 전개되는 소설도 있다. 하지만 이외수작가의 작품들은 독자의 몰입도를 극대화 시켜 작가의 의도와 내용을 효과적으로 심어준다.

 

벽오금학도는 이외수작가의 대표적 장편소설이다. 마치 오래 전 미국드라마였던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이야기와 시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속에 자연 본연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그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를 주장하고 있다. 또 6.25부터 80년대까지 암울했던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이루어진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네 할아버지께서는 세상만물 중에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아닌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느니라. 아주 작은 먼지 한 점조차도 우주의 절대적 요소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어.(중략)그리고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낮추어서 바라보아야 하느니라.(중략)마음보다 머리를 더 많이 써서 하는 공부인 것 같더라만 마음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 머릿속에 산더미처럼 들어차 있는 지식인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학교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더라도 너는 부디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본문 91쪽)

 

작가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글들과 최근 발표된 소설집 '완전변태'에 이르기까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풍요롭게, 인성 풍부하게'라는 일관된 작가의 주제이며 찰학이다. 

 

"갑자기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나더니 초가집들이 차츰 사라져버리고 천박하게 페인트칠을 한 슬레이트 지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중략)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대학은 다시 문을 닫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것이 생겨났고 국민은 이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는 주권을 상실했다.(중략)그러나 새로운 대통령은 언론을 통폐합시킴으로써 몇 개의 방송국과 신문사가 현판을 내렸다. 그리고 언론기본법이 공포되었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고 유비통신流蜚通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식자識者들은 언론을 믿지 않기 시작했다." (본문182쪽)

 

지금도 끊임없이 비판의 칼날을 멈추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7~80년대 군부독재정권으로 향한 것이다. 한국만의 기형적 민주주의를 생산한 과거 한국현대사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꿀이 달다는 정보를 전달받고 그것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상태를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꿀맛이 어떠냐."

"단맛입니다."

그러면 꿀맛을 아는 것으로 간주했다. 꿀을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그렇게만 대답할 수 있으면 꿀맛을 아는 것으로 간주했다. 꿀을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단지 꿀맛이 달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진정한 꿀맛을 안다고 간주될 수 있을까. 그들은 대부분 진리의 겉껍질을 잠시 매만져보고는 먹고 사는 일에 바빠지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그들은 같은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면서 꿀맛 모르는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끌고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끌려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었다."(본문 298쪽)

 

세태풍자이기도 하지만 교육문제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작가만의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영하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전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전쟁 이외의 마땅한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끊임없이 약탈을 하고 끊임없이 증오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살인과 방화, 강도와 강간, 권모와 술수, 중상과 모략 등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분명한 퇴화였다."(본문 299쪽)

 


이 책을 사두고 읽기 전에 팟캐스트 라디오 '진중권의 문화다방'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먼저 들었다. 이외수 작가 스스로도 이 벽오금학도를 기점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완전변태'까지 작가 이외수를 규정할 수 있는 특징들이 '벽오금학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곳곳에 선보이는 이외수식 감성문체도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은행나무들이 순금빛 해의 비늘들을 눈부시게 털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실행증 환자들처럼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사양의 그림자를 끌며 탑골공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목숨들을 가을 햇빛에 널어 말리며 지나간 날들을 회상해 보고 했다."

 

이런 감성문체나 표현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에 시종일관 반복적으로 쓰이면서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는 따위의 일은 없다. 이야기 진행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요리 위에 뿌려지는 양념처럼 작용할 뿐이다.


이런 시적인 문장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외수의 글쓰기 공중부양'을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을 보면 단어를 하나 선택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단어들을 유사한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구분하여 두툼한 단어장으로 정리하는 노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고투 속에서 단 한 줄이지만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벽오금학도는 인간 탐구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정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으며 독특한 자신만의 시공간을 창조하면서도 이야기의 전개에 소홀하지도 않는 문학작품이다.


독자를 몰입시키고 사색시키며 감동시키는 문학으로써의 재기능을 다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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