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문화박물지 - 이어령의 이미지 + 생각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인의 전통 생활용품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과 그 의미를 찾고 우리만의 문화 특성을 읽어가는 책이다.
작가는 특유의 문체로 가위부터 화로까지 모두 예순네개의 전통 생활용품을 풀어간다. 그 동안 누구보다 따뜻하게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바라보던 작가의 시선이 전통 생활용품이라는 사물에 머물게 된 것이다.
동서고금의 방대한 학식을 갖춘 저자 특유의 문체와 논리 전개는 언제나 읽는 이에게 공감과 이해라기보다는 감탄하며 그대로 물들어 가게 하는 힘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두 배의 수확을 위해서는 농토를 배로 늘리는 확장책을 썼다. 그 농사기술에서 생겨난 것이 개간법이고 그 개간법을 이념화한 것이 경작하다는 뜻을 지닌 문화Culture라는 말이다. 한때 유럽의 제국을 일으킨 팽창정책과 식민주의 그리고 이른바 미국의 개척정신이란 것이 그것이다." (본문 44쪽 '논길')
"물과 불은 영원히 상극하지만 그 사이에 냄비를 매달면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지듯이 나무와 무기질인 돌의 부딪침 사이에 옷감이 끼면 아름다운 율동과 윤택이 생겨난다. 다듬잇방망이, 다듬잇돌 그리고 그 사이의 천, 이렇게 이질적인 세 가지 다른 빛이 하나의 음향으로 통일된다. 이때 이미 다듬잇방망이는 곤봉이 아닌 것이다. 옛날 칼을 모아 보습을 만들고 포탄의 탄피를 주워다 교회나 학교의 종을 만들었던 그 슬기의 원류인 것이다." (본문 49쪽 '다듬이')
"그 담 그 울타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있는 한국인의 독특한 '우리'라는 집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울타리'란 말 자체가 일인칭 복수인 '우리'와 같은 뿌리의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나의 아내"라고 할 때에도 "우리 아내"라고 말하고, 서양 사람들이 "내 집", "내 나라"라고 할 때에 한국인은 "우리 집", "우리 나라"라고 한다. 따로, 그러나 함께 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힘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의 돌담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본문 53쪽 '담')
"한국인의 의상을 보아도 단추가 아니라 모두 끈으로 되어 있어 매도록 되어 있다. 한국의 저고리에서 옷고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실용적인 기능이요 장식이다. 인간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맺고 풀고 잇고 끊는 끈의 관계로 나타낸 것이 한국인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고립무원의 상태를 끈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본문 76쪽 '매듭')
서평을 통해 매번 하는 말이지만 이런 논리 전개와 문체가 작가 이어령 글의 매력이며 특징이다.
특히 이번 책은 그 대상이 사물이기 때문에 오브제를 찾는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을 주게 된다. 사물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고 유려한 해석은 예술가들의 지리한 탐구과정을 단축시켜 주고 영감을 받도록 도움을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원래 사람의 허리는 재는 것이 아니다. 인체의 허리는 밥 먹었을 때 다르고 굶었을 때 다르며 건강할 때와 병을 앓고 있을 때가 모두 다르다. 아무리 치수를 정확하게 재어 만든 옷이라도 사람의 몸은 콘크리트 건축물이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의 몸을 잰다는 것은 흐르는 물에 표를 해놓고 떨어진 칼을 찾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생명체를 어떻게 자로 잴 수 있단 말인가." (104쪽 '바지')
치수없는 바지에서 시작해서 숭고한 생명에 대한 찬가로 다다른다. 오브제를 찾아 상징으로써 끄집어 내어 재창조하는 예술가의 그 고단한 작업과정이 이 세 문장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버선은 발을 감싸면서도 발의 생김새를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독자적인 형태와 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버선은 신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어도 그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발에 신는 양말인데도 버선은 실내장식으로 꾸며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이한 개성을 지닌다. 발목과 앞부리의 완만한 두 곡선이 기와의 추녀 끝처럼 기막히게 마주쳐 살짝 위로 솟아오른 버선코의 그 섬세한 형태 - 그것은 멋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 엄지 발가락과는 상관없이 디자인된 추상적 선을 그려내고 있다. 뒤축과 뒤꿈치의 비율이나 회목과 버선목의 길이나 둘레도 모두가 다 발의 인체공학에서 일탈된 형태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의 버선은 발의 미메시스가 아니라는 데 그 아름다움이 있다." (본문 112쪽 '버선')
버선이 갖는 선의 미학을 찬양하는 글과 말은 숱하게 보고 들었지만 이토록 분석적으로 설명한 것을 보고 들은 적이 없다. 모방과 모사를 극복한 미의 추구. 버선의 선이 갖는 함축적인 미학을 누가 또 다시 이처럼 풀어 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창호지는 빛을 걸러서 반쯤만 들인다. 빛은 은은한 그늘로 방안에 젖어들고 웬만한 먼지와 때 그리고 흠집들을 감싸준다. 조선조 백자의 아름다움은 창호지를 통해서 들어온 빛 속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 유리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밝은 대낮의 공간 속에서는 상처 투성이의 금간 그릇으로 보일 뿐이다." (본문 200쪽 '창호지')
번득 사진작가 구본창의 백자 작품이 떠오른다. http://www.bckoo.com/sub_work11.html
이 글이 그대로 구본창 사진작가의 백자 작품들을 글로써 부연설명해 주고 있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선을 말할 때 예외없이 인용되는 것이 바로 용마루나 처마끝 선이다. 다 같은 기와지붕 양식인데도 한국의 그 처마는 직선적인 중국이나 일본 것과 달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그냥 곡선이 아니라 그 끝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치켜져 올라가 있다. 땅을 억누를 듯이 육중한 지붕의 무게가 갑자기 부력을 얻어 허공으로 떠오르려 하는 것이다.(중략)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선의 미라기보다 반작용의 역학적 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선은 운동을 나타낸다. 거기에는 방향성과 속도와 그리고 중력이 있다. 선처럼 인간의 욕망을 역학적으로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기와지붕의 선이 단순한 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용마루나 기왓골보다도 처마끝에 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처마끝은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이 만나는, 말하자면 수직선과 수평선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과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힘의 교차점, 거기에서 처마끝 곡선이 빚어진다. 그것은 의식의 표층을 뚫고 올라오는 무의식의 욕망이다. 그 억압된 욕망 그리고 분출하는 그 원색의 짙은 반작용의 운동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살짝 들어올린 처마밑을 장식하고 있는 단청이다." (본문203쪽 '처마')
사진을 처음 배울 때 이유도 모르고 민속촌의 장독대를 찍고, 경복궁의 처마와 단청을 찍었다. 무엇을 표현하고 찍을지도 모른 체 그냥 자주 보았던 이미지를 쫓아 흉내만 냈었다. 이제 버선과 처마가 갖는 선에 대한 저자의 탁견을 보고서야 나의 카메라 렌즈가 향했던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모방, 모사, 흉내만으로는 너무 머나 먼 길이다.
"조각의 아름다움은 물체성에 있다고 말한다. 같은 사람을 나타낸 것이라 해도 그림으로 그린 초상화는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조각으로 된 것은 그렇지가 않다. 하만R. Hamann의 말대로 물체는 물리학적으로 공허의 반대인 충실을 의미하게 되고, 그래서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압력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특징 때문에 딱딱하면 딱딱할수록 물체성이 높아진다. 조각가가 가능한 한 화강암과 같은 견고한 재료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문 255쪽 '항아리')
이즈음에서 내겐 영감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힌트라 할만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조각이 갖는 아름다움의 궁극인 물체성을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이것이 오브제 찾기의 시작이라면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이 연일 이슈다. 제왕적이고 독특한 리더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방법으로 빼어난 실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김성근 감독의 어록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그 중에 '돈을 받기 때문에 프로가 아니라 프로이기 때문에 돈을 받는 것이다.'라는 말은 단지 '사진쟁이'일뿐인 나의 치부에 콕 박혔다.
이어령의 '우리문화 박물지'는 어쩌면 내가 진정한 프로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길에 대한 수많은 힌트와 영감을 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