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가겠다 -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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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지도 않은 책들에 대한 서평을 서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더구나 작가도 아니면서 '써 나가겠다'라는 듯이 쓰고 있는 것은 또 무슨 하릴없는 짓인가 싶다.

 

아마도 부끄러워서 일 것이다. 미리 고백해 버림으로써 고민과 부담을 덜고자 함일 것이다.

 

부끄러운 첫 번째는 소개되는 스물세편의 작품 중에 내가 직접 읽어 본  책이 '어린왕자' 한편 뿐인데 그조차도 중학생 때 읽은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계몽문화사의 위인전기로, 중학교 때는 코난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 고교시절에는 심리학이나 철학입문서로 책읽기를 습관 붙여왔지만 언젠가부터는 소설을 비롯한 문학은 읽지 않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소설을 기피하게 된 계기가 군대시절에 있었다. 군대에서도 책읽기는 멈추지 않았는데 일병때부터는 정훈과 한켠에 있는 서고를 뒤지거나 휴가 복귀 시 원통의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곤 했다. 

 

당시에 나에 대한 오해가 생겼는지 어느 순간부터 작심한 듯 나를 괴롭혔던 사병식당의 취사병 고참이 있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연애소설을 끼고 살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경멸스러울 수 없었다. 아마도 그 후부터는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 차체를 기피했던 것 같다. 어리석었다.

 

이제서야 후회가 되는 것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읽었어야 했던 문학들을 너무나 많이 놓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불혹이 되어서야 줏어담겠다고 뒤를 돌아 쪼그리고 앉아 주섬거리고 있는데 '읽어가겠다'라는 책이 버럭 소리치고 있다. 

 

"네 마음대로 읽더니 고작 이거냐?!!! 어리석은 새끼! 독서도 너만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부끄러운 두 번째는 일기 형식 내지 독서 노트 형식의 서평일지라도 온라인에 게시하는 이상 타인이 읽는다면 소개된 책을 읽고 싶도록 써야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책의 서평을 찾아 읽는다면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다른 이의 생각'을 보고 싶다거나 '관심이 있는 책인데 어떤 내용인가?'라는 사전정보를 찾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나 잘났다.'는 듯이 분석만 해 놓는다고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고 감탄하면서도 정작 서평을 쓸 때에는 마치 스스로 객관화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분석만 하는 서평은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요즈음 말로 내가 뭐라고. 내가 전문 비평가도 아닌데.


이 책처럼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고, 그 책의 매력을 정확히 찾아 내어 소개한다면 서평을 읽는 이도 책을 꼭 읽고 싶을 것이다.

 

 

이제 '읽어가겠다'를 읽고 나니 내게는 스물세편의 필독서 목록이라는 숙제가 생겼다. 더구나 이름도 낯선 작가도 소개받았고, 이름만 알던 작가의 작품세계도 소개받았다. 


스물세편의 작품을 모두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 바로 '읽어가겠다'이다.



소개한 책들을 이미 최소 두번 이상은 읽었다는 작가는 라디오 방송을 하듯이 '오늘 소개할 작품은 누구의 어떤 작품입니다.'로 편안한 어투로 시작한다. 대화체나 문어체도 아닌데 마치 작가가 자상하게 얘기를 해주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책 제목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읽어야 했다'거나 '꼭 읽어라'도 아니고 이미 수차례 읽었다는 작가도 스스로의 결의를 담은 '읽어가겠다'라는 제목은 이 책을 접하고 느낄 독자의 미묘한 심리까지도 미리 어루만지는 듯하다.



스물세편의 작품들을 하나씩 섭렵하면서 이 책을 다시 한번 들춰본다면 또 다른 묘미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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