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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최근에 기업 마케팅은 물론 SNS 및 대인소통에 관해서도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 주목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의 힘, 그 자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의 힘은 고전이 소설의 형태이든 구전口傳의 형태이든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며 영향을 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문학에서 시詩가 함축적 미美라는 소쿠리에 가치를 담는다면 소설은 이야기라는 광주리에 재미와 가치를 함께 담는다.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독자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루한 논문보다는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 훨씬 유용하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이 소설을 집필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연인 심청’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심청전을 원전原典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된 소설이다. 이렇게 고전을 재구성한 작품에 작가만의 새로운 해석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더 나아가 사건과 등장인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함께 원전의 빈 공간을 문학적 상상력과 감성으로 채웠을 때 독자는 만족하게 된다. 이미 독자는 원전의 줄거리를 비롯해 등장인물과 사건, 주제까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가에게는 커다란 리스크Risk일 것이다. 리스크 없는 기회란 없듯이 작가의 선택이기에 스스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가란 황무지에 자기만의 꽃을 심는 존재가 아니었다. 길고 깊은 문학의 전통 속에서 나타나 그것에 한 줌 흙을 더하고 사라지는 존재였다. 나 또한 그런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를 뒤늦게나마 깨달았고, 그것이 이 긴 여행의 출발점이었다.] 397쪽
작가로서 사명감을 말하는 부분이지만 일면에선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야 하는 리스크를 오히려 잘 알려진 고전을 재구성함으로써 생기는 리스크로 전환시킨 명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 속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탐구가 전제되어 있다. 고전을 새롭게 구성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만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관점으로 인간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탐구를 제시해야 한다. 그 점에서 ‘연인 심청’은 그 시작이 매우 훌륭하다. 장님인 심봉사를 통해 육안보다는 마음의 눈이 먼 현대인으로 상징하고 심청으로 하여 이타적 사랑의 표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 쓴맛을 어려서 몰랐던 탓에 심봉사는 철부지 같은 자기를 단련시킬 수 없었다. 동네 처녀를 농락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심봉사는 장가를 들고도 애어른 같은 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덜컥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세상은 눈이 감김과 동시에 아예 닫혀버리다시피 했다. 심봉사는 그런 자신을 살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의 눈이 없었다.] (78쪽)
책의 앞부분부터 작가가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동기는 작가의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그 동안 철저히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 왔지만 사실은 상상적인 것, 환상적인 것, 마음 속에서만 작용하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세상을 바꿔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을 위한 질문은 생명과 인생의 근원적 질문에 다가가고 있다.
[왜 사람은 세상에 나고, 사람은 또 왜 세상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사람은 이 세상에 나서 춥고 배고프고 외롭게들 사는가. 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가.] 6쪽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이다. 누구나 답을 찾고 있는 이 본원적 질문을 통해 작가가 마음이라는 추상적 가치와 그 가능성에 눈을 떴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작가는 책의 도입부는 물론 본문에서도 다시 한 번 이 질문을 던진 후 책의 말미에서 작가가 깨달은 바의 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 우주의 어딘가로 돌아와 새로운 생명의 꽃을 피우게 되리니, 이 부조리한 세상에 태어나 절망과 고통을 맛본 것을 원통해하지만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승에서의 우리들의 삶은 이 무한한 우주의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연출하고 있는 하나의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죽어 나를 잃어버리게 됨을 슬퍼하지 말자. 나라는 것이 본래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설적인 것이 아니던가. 나는 나의 뿌리로부터 피어난 하나의 꽃송이에 불과한 것이니 꽃이 져도 꽃나무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381쪽)
불가佛家의 법화경法華經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대우주와 일체인 영원한 생명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와 차원은 다르지만 작가는 깊은 성찰에서 얻은 –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힘에 대한 깨달음을 심청전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그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길게 다 살아도 살아온 시간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인생을 감각으로밖에 느끼지 못한다. 감각은 아프거나 뜨거운 한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는다. 감각의 기쁨을 쫓아다니고 감각의 아픔을 피해 다니며 사는 사람들은 한평생을 뜬구름처럼 헤매고 다닌다. 그런가 하면 인생을 초목처럼 사는 이들도 있다. 자기에게 부는 바람을 잎맥과 나이테에 새기며 삶이 다하는 날까지 상념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88쪽)
이처럼 깨달음에서 출발한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본문에 그대로 녹아있다.
[예부터 없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이 내려주는 떡고물만 먹어도 살 수 있는 법이다. 세상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분별없는 곳으로 천지개벽을 하면 좋겠지만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65쪽)
이 문장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는 아직도 구시대적 불평등이 존재하며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관점을 달리하면 이 부분은 자유주의 시장체제를 강조하는 보수정치인들의 소위 ‘낙수효과’라는 경제용어가 봉건체제부터 유래됨을 또, 그것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어쨌든 책의 첫 머리부터 작가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니 본문을 읽기도 전에 대략의 윤곽이 그려진다. 역시 원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작가의 의도가 명징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제 문학적 상상력과 감성까지 바라는 욕심을 내게 된다.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작가는 마치 판소리인 듯 자신이 스스로 화자話者로 자청한다. 그래서인지 직설화법에 전체적으로 만연체를 선택했다. 이미 감성적 표현과 글을 배제하고 출발한 것이다. 문제는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화자의 문체가 독자의 감정선을 끊어 감정이입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50년 세월도 화살같이 흐르거늘 봄날의 닷새 시간이야 오죽이나 할까.] (104쪽)
심청이가 인당수에 가는 날을 받아놓고 신변을 정리하던 5일간의 시간이 빨리 지나갔음을 말하는 부분이다. 50년? 심봉사 나이는 267쪽에 가서야 오십대 중반이라고 나오니 앞부분에서 뜬금없이 50년 세월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 표지의 작가소개란을 봤더니 작가의 나이가 50세이다. 죽는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의 심정을 굳이 작가의 나이와 비유했어야 했는가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설령 50년이 작가의 나이로 비유한 것이 아니라 해도 이 부분에서 50세미만 독자의 감정이입은 환기되어 버린다. 이에 비하면 다음에 제시 한 부분들은 좀 더 적극적이다.
[나무하러 가던 사람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난 후의 이야기는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심봉사는 도화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50쪽)
[이것은 앞에서도 이미 말했던 바이다.] (276쪽)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심봉사의 처참한 모습에.] (346쪽)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생각할 것 같다. 이 이야기꾼이 심봉사가 장님인 것을 깜빡 잊은 게 아닌가 하고.] (366쪽)
[그러면 독자들은 과연 심청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유리 선녀의 본모습으로 돌아갔는지 궁금할 것이다. (중략) 이 문제는 독자들 각자의 상상에 맡겨두려 한다.] (395쪽)
발췌한 부분만을 보더라도 소설에서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표현들이다. 전후 문맥을 보면 더욱 더 사족蛇足으로 된다. 어쩌면 작가가 스스로 화자를 자청하고 판소리와 같은 분위기를 위한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 이야기꾼이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든지 ‘어찌어찌해서’라는 표현만큼은 삼가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 동안 내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왔더라도 이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가치의 힘과 가능성을 이제 인정하겠다. 그럼에도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운명론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우리들 현대인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다. 나 또한 늘 있을 법한, 그럴 법한 일들로 소설을 써야 한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소설론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바뀌었다. 상상적인 것, 환상적인 것, 마음속에서만 작용하는 것, 이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97쪽)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힘이란 비단 사랑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작가의 깨달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론까지 치달은 듯 보인다.
[뜻을 만들기도 전에 운명이 자기들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다른 점이 있다면 윤상이가 자기 운명을 바꾸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면 청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129쪽)
[서신을 받아들고 청이는 이 또한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달았다.(중략) 청이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리라 했다.] (287쪽)
[사람은 자기 뜻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이 많다. 그 이룰 수 없음, 자기보다 크고 높은 것이 있어 자기를 마음대로 굴려나가는 큰 힘을 가리켜 운명이라 한다.] (304쪽)
[이런 때 사람의 의지는 지친 날개를 접는다. 대신 바야흐로 운명의 나침반이 결말의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이 자침의 힘 앞에서 사람의 투쟁은 무효화된다.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무자비한 이치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결박 지어서는 모든 것을 끝맺는 운명극의 마지막 무대로 끌고 가는 것이다.] (345쪽)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심청이는 정작 운명에 순응하던 조선의 대표적인 여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쉽다. 심청전을 재해석한다고 해서 심청이 잔 다르크가 되어 세상을 개척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랑이든, 혁명이든 세상을 바꾸려면 적어도 자신의 삶부터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운명부터 개척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저는 이제 가려 하오. 오라버니, 너무 슬퍼 마세요. 그리고 뱃님네들 부디 먼 곳까지 무사히들 건너가세요. 이 한 목숨 바쳐 제 아비의 눈먼 생애를 건져 올리고 뱃님들의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면 비록 짧은 생애였으나 제가 이 세상에 온 것도 귀한 뜻이 있겠지요.] (139쪽)
인당수에 빠지기 전 심청의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운명에 고꾸라진 체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심청의 사랑은 그 대상도, 종류도 어떤 것이지 형체가 없이 두루뭉술하다.
심청과 심봉사는 전생에 선계仙界에서 몰래 만났던 연인이었고 그에 따른 벌로써 현세에 부녀관계로 태어난 것으로 설정됐다. 또한 원전에는 없던 심청의 현세의 연인으로서 윤상이 등장하여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도 다루어진다.
심청이 용궁에서 전생을 깨달은 후 속세에 두고 온 심봉사를 그리워하고 죄책감을 갖는 장면에선 심봉사를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것인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도 않다. 작가는 오히려 사랑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사랑을 보다 큰 울타리로 말하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나기를 각기 운명에 따라 타고나니 사람이 너나없이 평등하다는 윤상이 오라버니 말씀은 맞지 않아. 내 나이 열다섯 살 되도록 세상에 나서 모진 고생을 했지만, 그것이 누가 나를 해코지한 게 아니요, 아버지가 스무 살에 안맹하신 것도 누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건 아니었어. 세상에 태어나보니 왕후장상이 따로 있고, 천민과 노비가 따로 있었으니 그건 필시 잘못된 거지만, 이걸 바꾸려면 평생을 다 바쳐도 못 이룰 거야. 세상을 향한 윤상이 오라버니의 포한진 마음은 내가 꼭 품어주고 싶어.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처럼 위태로운 것도 없어. 꼭 세상을 바꿔야 한다면 사랑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거야.’] (74쪽)
여기서 심청이 말하는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 아니라 운명의 벽 앞에 강제된 ‘희생’으로 보인다. 극복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앞에 좌절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희생하는 것을 이타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의도된 아이러니라고 할까? 카오스라고 할까? 결말부에 가서 심청은 심봉사를 살리기 위해 현세의 연인인 윤상을 희생시킨다. 윤상은 그것도 아주 참혹하게 죽어간다.
[그것은 결국 윤상이 오라버니의 목숨을 바칠 테니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걸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372쪽)
고문을 당하는 윤상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왕에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말만 하면 100%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반면 전의마저 포기한 채 죽어가는 심봉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냉수 한 사발 떠 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심청은 잠시 고민하다가 심봉사를 선택하고 기도를 시작한다. 죽어가는 윤상이는 내버려 둔 채로.
작가가 깨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이제야 운명을 넘어 기원하는 인간의 마음에 다다른다. 미신이라는 것에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원하는 인간의 간절한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대척점이 잘못 설정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생명과 맞바꿀 수 없지 않나.
심봉사가 기사회생하고 눈을 뜨는 장면에선 심청이가 곁에 있지도 않았다. 기도를 하러 갔기 때문이다. 심청전의 클라이막스인 심봉사가 눈뜨는 장면은 애먼 궁녀인 신비와 전의가 목도하게 된다. 결국 원전보다 감정이입하기 어려운 새로운 구성이 되고 말았다.
정리해 보면 소설 ‘연인 심청’의 주인공은 심청이 아니라 심봉사라고 할 수 있다.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마음의 눈마저 닫혔던 심봉사가 깨달아가는 과정을 자세히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이타적 사랑은 작가의 피조물인 윤상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과연 자기는 죽으려 하느냐고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묻는다. 무엇을 위해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 하느냐고, 돌이켜보면 한 번도 자기에게 흡족한 사랑을 바치지 않은 여인이 아니었더냐고, 전생에 맺어질 인연을 쌓지 못한, 잊어야 할 여인이 아니었더냐고 묻는다. 그랬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윤상이는 자기 목숨을 바쳐 심청을 구하려 하고 있다.] (376쪽)
책의 말미, 작가의 말에서 작가 스스로 다음과 같이 주제를 정리하고 있다.
[실로, 인간은 자기가 처한 상황보다 항상 더 큰 것을 욕망하며, 현대는 그 극심한 욕망이 충돌하는 아비규환의 쟁투장이다. 여기에 나오는 심봉사는 바로 우리 현대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이타적 사랑밖에 없다. “연인 심청”은 이타적 사랑의 이야기다. 그것을 실현해가는 운명 개척의 이야기다.] (399쪽)
주제에 비추어 보아도 윤상의 사랑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바의 이타적 사랑이며, 윤상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에서 우러나온 희생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기대하는 독자입장에선 ‘연인 심청’이 아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고전의 현대적 해석을 도출하여 현재를 시사하는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한 것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특히 작가는 이 책의 출간 직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고 회고하며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이 소설을 가다듬는 동안 이 나라에 밀려든 슬픔, 고통, 원한, 절망, 분노, 무기력감 같은 것을 생각하면, 소설로써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거칠고 차가운 바다에서 스러져간 어린아이들에게, 그날 이후 함께 슬퍼하고 괴로워해온 이들에게, 그리고 이 수렁 속에서 건져올려져야 할 이 나라의 모든 이들에게, 이 작은 정성을 바친다.] 399쪽
이제 이 소설은 21세기인 지금, 어처구니없게도 304명의 심청을 차가운 바다 속에 던져버린 대한민국 어른들이야말로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심봉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오래된 이야기라 작자마저 미상인 심청전의 내용이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시사된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인간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가 오늘날 시의적절하게도 심청전의 심봉사를 현대인의 상징으로 소생시킨 바로 이 지점에 이 소설의 가치와 작가의 탁월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기 위해 세상에 난다. 그런데 세상의 모습은 마치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이 죽어야 하는 형세를 취하기 쉽다. 각자가 자기를 위해 자기 아닌 존재를 삶의 나락으로 빠뜨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저마다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일이 사람의 유구한 역사에 걸쳐 되풀이되어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의 비극성은 이것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집단이 그 집단의 생존이나 이익을 위해 어떤 한 사람의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때 그 어떤 절정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집단에 속한 이들은 자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대의를 위해 희생시키고야 만다. 그리고 그 행위를 쉽게, 편안히 잊어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실은 그 과거의 일을 망각한 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단 말이냐. 내가 바로 그런 처지에 빠질 수도 있었던 것을.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고 그자는 나빴을 뿐인 것을. 하지만 모두가 벌인 일은 그들 각자의 심중에 잔상처럼 남아 있다. 그 과거의 일은 서서히 잊혀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잊어버리지 못했다.] (212쪽)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