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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 제2회 퍼플로맨스 대상 수상작
박소정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2월
평점 :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화사한 표지에 제목마저 이토록 예쁘다. 책을 펼치면 차례에 소개되는 소제목도 꽃이름으로 채워져 그 향기 가득하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마치 시나리오처럼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들을 보는 듯 잘 짜여진 구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자칫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오가는 구성은 독자가 각 사건들의 유기적 연결을 쫓아 갈 수 있도록 하여 지루할 틈이 없다. 이런 구성은 최근 출간되는 소설들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화가가 점을 찍어 커다란 그림으로 그려나가는 점묘화처럼 흩어져 있는 듯 보이는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전체 이야기를 구성 해 가고 있다.
주인공 수연은 신분은 낮지만 다방면에 걸쳐 손재주가 좋으며 생활력이 강한 아가씨이다. 그 중에서도 꽃을 말려 가루로 만들거나, 솥에 넣고 찌거나, 기름을 짜내서 향수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여 궁궐 내에 있는 향장香匠이 되는 꿈을 꾼다.
이야기는 수연이 독립을 하고, 궁에 들어가 향장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랑, 희열, 질투, 오해, 배신, 희생을 담아내고 있다.(이렇게 단어로 나열하니 제법 거창하다.)
조선시대가 배경인만큼 작가의 방대한 자료조사가 돋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사회상을 담아 내기 위한 생경한 생활용품과 용어들이 등장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수고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 디딤돌 위에 놓인 수연의 낡은 운혜를 본 민아는 당혜를 도로 가져와 수연의 운혜와 맞대어 보았다. 길이가 꼭 맞았다.(221쪽)
단지 자료조사만 하여 나열했다면 문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창고에서 찾아낸 소재들을 먼지를 털어내고 감성의 옷을 입혔기에 아름다운 문학소설이 될 수 있었다. 작가가 구사하는 어휘 역시 옛스럽고 고즈넉하다. 원래 수많은 민요와 판소리 내용에 음담패설이 많기야 하지만 작가가 구전 민요를 가져와 풀어가는 것을 보면 능글맞기까지 하다.
- 넝출넝출 호박넝쿨 담장 안에 손을 주고
우리 님은 어디 가고 내 품 안에 손 안 주네 (53쪽. 경북 구미 전승 민요.)
- 엎어지고 엎어지고 인삼 밭에 엎어지고
아해들은 물럿거라 우리 임자 엎어진다
엎어지고 엎어지고 그 위에 내 엎어지고 (92쪽)
사실 간결한 문체 속에 담겨있는 감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기때문에 소설의 앞부분만 보면 단지 소녀감성의 예쁜 로맨스 소설일 뿐이라고 넘겨짚게 된다.
- 작은 잔 하나에 술이 담기고, 한이 담기고, 어미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도 눈송이가 되어 담겼다. (62쪽)
- "그거 아세요? 새벽 세 시진이 되면 아무도 안 보는 사이에 옥천교 해치가 다리에서 내려와 물장구를 친대요.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를 깨물어 먹기도 하고. 물 위로 올라오면 찹찹찹 발자국을 찍기도 하고. 하긴, 원래 물에서 사는 영물인데 돌다리 위에 붙여놓았으니 얼마나 놀고 싶었을까. 이다음에 옥천교에 살구가 떨어져 있으면 잘 살펴보세요. 반쯤 베어 먹은 게 있을지 몰라." (198쪽)

그런 관점에 덧붙이자면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수연의 주변인물들이 대체로 평면적이다. 더구나 이런 등장인물들이 수연에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가 한 순간에 부질없이 사라지고, 또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전반부에 나오는 경쾌한 이야기들, 개성과 비중 약한 주변인물들, 꽃과 약재의 향기가 진동하는 분위기, 고즈넉하면서도 산뜻한 감성. 사실 이런 것들때문에 작가가 앞부분에 치밀하게 준비 해 둔 복선을 놓치고 만다.
- 양반이라던 아비는 아기에게 이름만 지어주고 모녀를 떠났다. 물처럼 아무 곳에나 스며들어 연을 맺으며 살라는 뜻이었다. 네 어미가 그렇게 내게 왔으니, 아이에게도 어울리는 복이라 했다.(13쪽)
- 자유연애를 하는 처자들의 모습이 혹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장옷은 경박해 보이니 내 오래된 쓰개치마라도 하나 주어야겠다. 주홍색 고름이 달린 장옷을 느슨하게 쥐고 있는 수연이 퍽 은근해 보여 민아는 얼굴을 붉혔다. (35쪽)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내가 남자라서 놓쳤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이라면 민감하게 포착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솔직히 '수연이 퍽 은근해 보여'라는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토록 짧은 어휘로 정확히 감각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싶어서. 이 부분이 복선일 것이라곤 차마 예상치 못했다. 그러니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작은 반전은 잠시간 읽는 이를 혼란에 빠뜨린다. 더구나 소설 앞부분이 동화였다면 후반부에서는 증오와 암투때문에 피튀기는 분위기로의 반전도 이어진다.
- "하나가 살면 하나가 죽는 게 궁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강씨와 네 벗을 살리는 대신 그에 합당한 것을 내게 주겠느냐." 상처를 입겠지만 내 곁에 붙들어둘 수는 있겠지. 정연은 그의 손도 같이 베이는 걸 모르고서 기어코 비수를 들었다.(186쪽)
그리고나서 소설의 거의 끝부분에 도달해서 작가는 또하나의 반전을 선물한다.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작가가 독자를 감정이입 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주요기법인 점증법이다. 조악한 내 기억으로는 점증법이 효과적으로 쓰인 곳은 모두 세 번이다.
첫 번째는 수연이 어머니 무덤을 찾아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한잔, 두잔, 세잔, 네잔'으로 표현하며 잔수가 거듭될수록 수연의 한을 독자가 마시고 취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수연과 봉림대군인 정연의 추억을 표현하기 위해 '천 일간의 사랑'을 선택한다. 날수를 '천 일'에서 시작하여 '하루'로 끝내지만 사랑의 농도로 보자면 점증법이다.
세 번째는 수연이 정연의 시체를 반함하기 전에 기원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망자가 저승까지 갈 동안 먹을 식량인 따뜻한 쌀밥을 정연의 입에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넣어주는 상상을 하는 장면이다. 백 석이요, 천 석이요, 만 석이요라고 점증적으로 표현하지만 오히려 애틋한 사랑을 점점 절제된 한으로 담아내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 혼자였던 시간은 견딜 만했다고 생각한다. 미련, 누구나 무심히 외면할 그 감정들을 수연도 툭툭 버려두었다. 그 폐기에 익숙해지니 그 곳에 사랑이 있었다는 어떤 증표를 보아도 무덤덤하게 되었다. 수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완전히 끝났다고, 더 이상 힘들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우스웠는지. (181쪽)
- 사랑 때문에 힘들어서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 못난 생각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구나. 수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201쪽)
- 수연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아마 우리 중에 서로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결별을 못 버티고 지고 말겠지. 그럼에도 그에게 견디라, 말할 수밖에 없는 어폐에 가슴이 쓸렸다.(205쪽)
이처럼 작가는 이 작품에서 수연의 사랑, 단의 사랑, 정연의 사랑 그리고 민아의 사랑 등 사랑에 대한 다각도와 다차원적인 관점을 제시 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우리네 인간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성찰도 곳곳에 보여주고 있다.
- 철저하게 하나를 가져가면 다른 하나를 돌려주는 게 세상인데 모든 초목마다 공평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따스하게 달궈진 조약돌에 수연은 다시 마음이 녹고 말았다. (170쪽)
- 아주 작은 열쇠 하나면 된다. 한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문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180쪽)
- 사필귀정, 인과응보라. 세상사는 아주 간단한 원리에 의해 돌아갔다. 균형은 아름답다는 것 또한 그 원리 중 하나겠지.(210쪽)
- 말을 섞고 살을 부비면 헤어나올 수 있는 고독에 오래 잠겨있다 보면, 궁지에 몰렸다 착각하게 되는 법이다. 극단적인 선택은 그러한 순간에 만들어진다. (230쪽)
- "학문에 적을 둔 자들이 보편적인 관념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또 판단하는 건 그들도 지각하기 어려운 뿌리 깊은 방식이다. 그런 지점이 때로는 그들의 시야를 좁게 만들지." (261쪽)
이런 철학적 성찰에 이어 고전문학 시간에나 들어 봄직한 문화적 언어적 유례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 "청 세조가 무엇을 주었느냐." 왕이 물었다. 내전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황제는 제게 원하는 것을 한 가지 고르라 했습니다." 세자가 답했다.
"그래, 무엇이 그리도 탐났더냐." 세자는 고개를 들어 왕의 눈치를 살폈다. 아비의 말에 뼈가 있었다.
"용연석입니다. 황제가 아끼던 벼루로 매우 귀한······"
"용연석!" 왕은 서안 위의 벼루를 집어들어 세자에게 던졌다. 벼루는 세자의 가슴 정중앙을 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자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수리들은 물동이에 물과 함께 왕의 말을 퍼 담았다. 그때부터일까, 민가에서는 안하무인인 자식을 두고 요녀석이라 부르는 말이 퍼진것이. (166쪽)
- 청국에서 돌아온 여인들은 사흘 밤낮 동안 홍제천에서 몸을 씻은 후에야 남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은방울꽃더러 화냥년 속고쟁이 가랑이라 불렀다. (244쪽)
그런데 책 표지 안쪽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을 보니 무려 1992년생이다. 스물두살이라는 말인데 오타인가? 서강대 신방과 재학중이라니 사실이군.
문득 요즘 방송되는 개그콘서트의 '쉰밀회'코너가 생각난다. 94년생 유아인역의 김대희씨 스승으로 나오는 김지민씨의 대사처럼 박소정 작가가 나보다 정확히 스무살이나 어린데 왠지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음악을 하는 내 형님도, 음치인 나도 '가수는 타고난다'는 가수 이승철씨 말에 절대 공감한다. 스티브 잡스도 철저하게 차별 대우했던 천재적 예술가는 역시 타고 나는가보다. 박소정 작가는 타고난 글쟁이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또 향수도 좋아하는가보다.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을 통해 '조선에 술을 증류하여 얻은 주정으로 알코올 향수를 만든 여성 장인이 있었다면?'이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향수를 좋아해서인지 향기에 감성을 싣는 여성이기 때문인지 향수에 대한 작가의 생각도 녹아있다.
- 결국 당신을 울게 하는 것. 그것이 향이고, 향이 가진 힘이라 믿었다. 그립다는 게 무언지 뼈저리게 배우고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 힘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웃고, 당신을 울리 수 있도록. 그 힘에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81쪽)
- 다시 만난 수연에게 전의감 교수는 향의 유혹이 제일 참기 쉬운 것이라 말했다. 없어도 애달프지 않고 있어도 싫지 않은, 단지 그뿐이라며. 몽상과 사치에 빠져 있던 수연을 위한 말이었다. (268쪽)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책을 읽어가면서 주인공 수연이 점점 영화배우 하지원씨로 구체화 된다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천민에서 시작하여 궁에 들어가 귀족의 정점인 왕족과 사랑하게 된다는 플롯이 드라마 '대장금', '다모', '기황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소설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아마 하지원씨를 주인공으로 쓰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앞부분만을 겨우 읽었을 때 - 아직 봉림대군인 정연이 등장하기 전에 부산 출장을 갔다. 분명 이 책에서는 꽃이 피어나 향기가 넘치는데 지금은 초겨울이다.
부산엔 겨울에 피는 꽃 동백꽃이 있다. 동백꽃을 찾아 남는 시간에 감천문화마을에 올랐다. 정말 있다.
사진 몇 컷을 찍고 집에 와서 책을 마저 읽어보니 소설에서 동백꽃은 수연과 정연을 연결해주는 특별한 꽃이었다. 내게도 더욱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 그나마 동백나무에 매달린 작은 꽃봉오리들이 그의 눈요기가 되어주었다. 봉오리는 작더라도 꽃잎의 붉은 빛은 만개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68쪽)
- 심양의 겨울은 유독 길었다. 동백나무는 봄비를 맞고서야 작은 꽃망울을 보여주었다. (161쪽)
- 그의 말에 뾰로통한 수연은 꽁꽁 언 눈을 툭툭 찼다. 순간, 수연은 강렬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멍울진 붉은 동백꽃이 눈에서 아른거렸다. 걸음을 우뚝 멈춘 수연은 야릇한 기분으로 정연을 돌아봤다. 틀림없다. 당신, 오래전 겨울 내 꽃신을 찾아준 사람.(163쪽)
추운 겨울 눈 속에서도 뜨거운 빛을 잃지 않은 꽃 동백꽃. 겨울의 문턱에서 만난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이 소설이야 말로 동백꽃 같은 작품이다.
박소정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