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루스 과학사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인문학 1
정인경 지음, 강응천 기획 / 다산에듀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앞으로 미술, 전쟁, 영화, 의학, 여성, 문학, 철학, 경제사 등이 출간 예정이라니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 중 첫 번째가 바로 '과학사' 인듯하다.


기획의 글을 보면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좁디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동서양의 역사를 인문학적 주제로 풀어간다고 한다.


즉 유럽의 역사 따로, 아시아의 역사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이 서로 주고받았던 인문학적 영향을 주제별로 소개하는 것이다.


이 책은 과학에 대해서만큼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주는 과학사책이다.


일반 역사에 관한 책들은 역사학자와 그에 따른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출간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 및 해석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과학사에 대해서만큼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 이외에 색다른 것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숨겨져 있던 야사野史들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여느 역사책도 그렇지만 여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역사 속 결정적인 순간들에 대해서 '만약 ~했더라면'이라는 식의 가설을 소개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정도뿐이다.


내 가 가장 최근에 읽었던 과학책은 데이비스 보더니스의 '일렉트릭 유니버스'였는데 이 책 역시 전기電氣라는 주제로 과학사의 숨겨졌던 이야기나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실들을 찾아 소개하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많아서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지만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즉 한 개인의 인성에 대한 평가는 있지만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가치적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는 프롤로그에서 애초에 과학적 발견과 가치가 별개일 수 없다는 논거를 제시하며 앞으로 전개해갈 내용이 앎-과학적 지식-이 삶과 역사를 바꿨던 것들을 중점으로 살펴볼 것이라는 것과 기존에 잘못 인식되어 온 유럽중심의 과학사를 비평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입장에서 과학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자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저자가 주체적이고 전향적인 역사 인식을 갖고 있어서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 해 준다는 점이다. 책을 통해 배움의 재미를 추구한다면 이보다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 우리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이행을 자연스러운 역사적 발전으로 이해하고 있다. 과연 농사짓기가 환경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일까? 인간은 농사짓기가 수렵채집보다 더 수월했을까? 그렇지 않다. (중략) 최근 몇몇 연구는 구석기인들이 농사짓는 법을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농사법을 알고 있었지만 수렵채집의 생활 방식을 바꿀 절박한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농사짓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다. 자연환경이 변한 것이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도 변화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살아남기 위해서 적응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진화적 압력을 받았던 것이다.(28~29쪽)



위 내용이 새롭지만 공감된다면 우리는 그 동안 교과서 내용을 비판없이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 지구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시점은 세 번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도구를 제작하는 인류가 출현한 뒤부터 20만 년 전까지, 인구가 100만 명에 도달했을 때이다. 두 번째는 신석기혁명을 계기로 1만년 전에 5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7세기까지 5000만 명으로 늘어났던 때이다. 세 번째는 산업혁명이었다. 17세기 5000만 명이었던 인구가 오늘날 70억 명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처럼 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역사적 사건에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있었다.(32쪽)


- 바빌로니아인들은 달의 모양이 변하는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을 불길한 날로 생각하고 집에서 쉬었다. 7일을 일주일로 삼는 전통은 이때부터 생겨났고 로마시대에 이르러 휴일로 지정되었다. 일주일은 천문 주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임의로 정한 유일한 천문단위이다.(42쪽)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런 방식의 역사적 접근을 계속 경험하고 유익한 정보도 얻게 된다.


최 근에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로 서점가는 때 아닌 호황을 누린 듯 보인다. '인터스텔라가 개봉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정도가 아니라 '인터스텔라가 없었다면 우린 다 굶어죽었을 것이다.'라는 듯이 책마다 인터스텔라를 우려먹고 있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상대성이론과 블랙홀 이론이 요즘처럼 대중의 관심을 받은 적도 없지 않나 싶다.


이 책은 과학사를 다루기 때문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빠질 리가 없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방식과 관점도 일반적인 설명과 다르다.



- 이러한 고전역학의 관점에서는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린다면 빛의 속도는 0 이 되고 멈춘 것처럼 보여야 옳다. 그런데 빛의 속도는 어디에서 관측되든지 일정하고 불변이었다. 실험적 결과를 보든,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을 보든 빛의 속도가 줄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움직이는 관측자가 빛의 속도를 수도 없이 측정했지만 그 결과는 한결같이 1초에 30만 킬로미터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전역학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을 깨 버렸다.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면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운동 법칙에서 속도는 물체가 이동한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이므로, 속도는 시간과 공간에 연결되어 있다.(중략) 만약에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면 빛의 속도는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우주에서 빛의 속도는 불변이었고 이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운동도 상대적이고, 시간과 공간도 상대적이다! 공간, 시간, 물질은 서로 단단히 얽혀 있어서 각각의 양은 다른 것에 대해 관점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다. 아인슈타인은 3차원 공간에 1차원의 시간을 합쳐서 '4차원 시공간'을 구성했다. 시간과 공간이 얽혀 있는 4차원 시공간에서는 공간에서 빠르게 이동하면 시간이 느려지고, 공간에서 느리게 이동하면 시간이 빨라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279~380쪽)


- 그 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중력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중력의 정체는 뉴턴이 말한 원격 작용하는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휘어짐이 초래한 힘이라는 것이다.(385쪽)




저자는 과학 발달의 역사를 물질-운동-힘(에너지)에 대한 탐구로 정리하고 풀어가면서 각 시기의 유럽과 아시아의 과학사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


먼저 이슬람문화의 역량과 과학사에 대한 공헌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편협한 사고와 제한된 정보만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상큼한 방향제 같은 역할을 한다.


사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해야 한다 것을 '스페인은 가우디다'(김희곤, 오브제)라는 책을 만났을 때 처음 느꼈다. 이 책은 스페인의 건축양식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슬람의 건축양식을 소개하던 책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 정도의 이해만 있던 나에겐 지금의 중동, 즉 이슬람의 문화가 과거 역사 속에서 찬란하게 꽃피웠다는 것조차 새롭게 다가왔었다.


이 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유럽의 과학사에 이슬람의 찬란한 문명이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낱낱이 소개하므로써 유럽인이 자신들 것이라고 자부하는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실은 이슬람 문명이 없었더라면 결코 유럽에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 칼리프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그리스 문헌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등을 철저히 연구하고 지적사업의 초석으로 삼았다. (중략) 900년 이슬람 세계에서는 갈레노스의 저술을 129편이나 가지고 있었는데 유럽에서는 고작 3편밖에 없었다. 넘쳐나는 책들은 도서관 서가를 채우고 학자들을 키웠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 설립된 도서관은 수백 곳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만 70곳의 도서관이 있었고 수십만권의 장서가 소장된 도서관도 여러 군데였다. 10세기 이집트 카이로의 '지혜의 집'에는 200만 권의 책이 있었고 그중에 과학 관련 서적만 1만 8000여 권이 있었다.(112~113쪽)


- 이슬람의 천문표 중에는 알콰리즈미al-Khwarizmi, 780~850가 만든 것이 가장 유명하다. 알콰리즈미는 알마문의 후원을 받고 활약한 이슬람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다. (중략)우리에게 낯익은 대수학, 알고리즘, 0이란 숫자 또한 알콰리즈미의 업적들이었다. (115~117쪽)


- 이렇게 12세기 번역의 시대가 찾아왔다. (중략)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알콰리즈미의 『대수학』, 아비센나의 『의학정전 등 70여 권의 아랍어 원전들을 번역했다. (중략)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인지도 몰랐던 유럽인들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 하면 '철학자'로 통할 만큼 번역서가 널리 퍼져 나갔다.(162쪽)



저자가 시종 주의하며 당부하는 것은 유럽중심적 역사인식과 사고방식이다.


- 유럽인들은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배워 대포와 범선을 만들었다. 대포와 범선은 유럽에서 '화약혁명' 또는 '군사혁명'을 일으켰고 유럽 밖으로 군사력을 팽창하기에 이른다. 주경철은 그의 책 『대 항해의 시대』에서 이러한 15세기의 상황을 '폭력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럼버스의 '지리상의 발견', '신대륙의 발견'이 얼마나 잘못된 용어인지를 이 책에서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15세기 유럽의 화학혁명, 다시 말해 유럽의 과학기술적 혁신을 진보로 간주할 수 있을까? 유럽인들은 대포와 범선을 개발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든 것을 '발견의 시대' 또는 '탐구의 시대'라고 자평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착취와 수탈의 시대', '인종 학살의 시대'라고 불러야 옳다.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과학기술의 방향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켰는가? (171~172쪽)


 과학이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방향성에 대한 가치평가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우리는 인류의 직립보행에서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의 과학적 사실들을 기본상식으로 알고 있다. 더불어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강요받아 왔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자기검열에 충실했었다.


이 책에선 이것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 이유가 과학이 항상 기독교와 대립해왔기 때문이라고 알 수 있게 된다. 즉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강요받았던 가치중립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는 저자가 유럽의 과학혁명이 왜 동아시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일상의 모든 것을 잠식하고 결정하던 유럽은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는 과학혁명이 모든 것을 뿌리채 뒤흔드는 사건으로 되었다면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며 기독교적 세계관이 없었던 동아시아에서는 그 파급력이 미미했던 것이라고.


과학사에서도 역시나 피비린 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기독교의 역사는 반복된다. 카톨릭의 부폐에 의한 살육,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구교와 신교간의 살육,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원정 살육 등. 이에 비하면 카톨릭 선교사가 중국에 유럽의 과학서를 전하면서도 교리에 반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숨긴 것은 귀여운 측에 속한다.


이러한 암울한 역사였기에 이제부터는 누구를 위한 과학이냐고 계속 물어야 하는 것이다.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가스를 만든 독일 과학자 프리츠 하버 Fritz Haber, 1868~1934가 전범 재판에 회부되려 하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하버를 옹호했다고 한다. 독가스를 처벌한다면 독가스가 발명되기 이전에 나온 고성능 폭약과 탱크, 잠수함은 어찌해야 하는가? 전쟁 무기 중에 무엇이 더 사악하고 나쁜 것인가? 이렇게 반문하면서 살상 무기를 만든 과학자가 사악한 것은 아니고 전쟁이 사악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402쪽)


- 놀라운 사실은 1915년 독가스를 만들어 실전에 사용한 하버에게 1918년 노벨화학상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마비되어 있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했고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않았다. 반면 하버의 아내였던 클라 임머바르 Clara Immerwahr, 1870~1915 는 과학자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누구보다 절망했다. 그녀는 독일 여성 중에 몇 안되는 박사 학위 소지자이며 유능한 화학자였다. 과학자로서 양심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남편의 행동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선택했던 것이다.(406쪽)




이 책의 또 다른 묘미 중 하나는 유럽의 역사와 동아시아의 역사를 동시에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역사책에서 '유럽의 이 때는 우리로 치면 조선의 영조 시대 때에 해당한다.'는 정도로 소개했다면 이 책에선 유럽과 동아시아의 교류를 중점적으로 찾아 소개 해 주고 있어서 해당 시대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자긍심을 높여 줄 조선시대 김석문과 홍대용의 우주론과 철학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원시시대부터 원자폭탄까지 과학사를 망라한 이 책은 '사람이 중심이다.'라는 소제목을 단 에필로그를 통해 주제를 다시 한번 정리 해 준다.


-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으면 '이것이 세계다'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이것은 브라질의 교육개혁가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 가 쓴  『폐 다고지』에서 농부가 하는 말이다. 농부는 자신이 없다면 세계도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세계를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주체임을 자각했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과학이라는 언어를 창조했다.(중략) 인간이 없다면 세계에 대한 앎으로서 과학도 없는 것이다.(418쪽)


- 한국사람들 대부분은 과학기술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략)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무조건적으로 인간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우리는 과학의 역사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략)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킨 만큼, 불행도 증대시켰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418쪽)


- 브라질의 농부처럼 우리는 자신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중략) 과학기술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묻고 그 다음에 과학기술의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419쪽)



과학사를 다룬 책에서 이토록 명징한 주제의식과 함께 전향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다.


정치적 이슈와 비교하자면 무상보육하자고 했더니 나라에 돈이 어딨냐라고 되묻는 사람에게


'이제 우리나라 경제력도 세계 13위 수준인데 그 정도 경제력은 됩니다.'라고,


학생들 무료급식하자고 했더니 부잣집 아들까지 공짜로 주자는 말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부자라 세금 많이 냈으니까 그까짓 한끼 공짜로 줍시다.'라고 하는 것 같다.


이제는 과학이든 복지정책 분야이든 발전에만 쫓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되어 삶의 질과 자연의 가치가 우선 논의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는 이러한 시대에 부합하는 세련된 과학사라 할 수 있다. 출간 예정인 시리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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