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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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몽夢' 자로 시작되는 낱말 중에 많이 쓰이는 것은 이렇다.
 
몽매夢寐, 몽매간夢寐間, 몽상夢想, 몽상가夢想家, 몽유夢遊, 몽유병夢遊病, 몽정夢精, 몽중夢中, 몽환夢幻.

'몽'은 '몽, 그대로'의 '몽'이기가 힘들다. '그때, 거기'의 '몽'이지만 이물스럽게도(!) '이때, 여기'의 살점을 묻히고 있다. '이때, 여기'에서도 '그때, 거기'의 체취가 심심찮게 풍기듯이. 이장욱은 이런 여-거기, 이-그때를 더욱 극대화시켜 마치 낡은 비디오 화면처럼 보여준다. 그저그런 이때와 (일상으로 삼지 않는 이상) 그저그렇지 않은(않을) 그때를 뒤섞어서 말이다. 그 와중에 거의 모든 시편에 '그녀'가 등장한다. 오호라! '그녀'는 '그때, 거기'의 편이라고 해야겠지.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시들은 덜 비애스러웠을 테고.

여기(거기)와 거기(여기)가 너무나 오래간만에 뒤섞이는 거기(여기)에서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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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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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라의 경전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붉은 눈, 동백>>(2000) 이후 9년 만이다. 그때와는 좀 다르게 송찬호 시인의 시는 어른-아이의 것이 되었다. 그사이 아이들하고 '고양이 학교'라도 다닌 모양이다. 재미났을 테다. 더욱, 다음 시집은 어떨지 기대하게 한다. 색다른 시의 숲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계절 탓만은 아니다. 설령 겨울이라 해도 이런 구절에는 사로잡힐밖에.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오직 탱자나무 가시만 홀로 아팠다 그리고 훌쩍 여름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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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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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벤야민을 읽다 웃었다. 

라시스를 품어보고자 그토록 많은 선물을 바쳤다니. 

라시스를 품어보고자 혁명론에 경도되기도 하였다니. 

끝끝내 그는 라시스와 그럴싸한 연인도 동무도 동지도 못 되었다.

'말'과 '살'을 어떻게든 같이해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던 것. 

이런 사람이 어디 벤야민뿐이랴 생각되어 한 번 더 웃었다.

 

그간 황망히 지나치기만 하던 '인간관계론'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 '아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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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화집
조선총독부 지음, 권혁래 옮김 / 집문당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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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동화집이다. 전국 각처의 인사들을 동원하여 소위 방치되어 있던 자료를 모으고 거르고 엮어 '최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총독부에서 한 건 한 것만은 사실인데, 썩 훌륭하지가 않다. 원텍스트가 일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고, 요즘 일간지의 <휴지통>에나 실릴 '일화'처럼 윤색까지 되어 전래동화 특유의 맛을 잃었다. 이런 전래동화들을 언제 읽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조선'이라는 '타자'를 주도면밀하게 재구성한 조선총독부, 그 괴물의 스타일로 잘 세탁한 '동화'를 읽는 재미가 있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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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한형조 지음 / 여시아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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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이 호랑이라면 <<무문관>>은 설표雪豹다. <<무문관>>은 그 정도로 몸매와 몸피, 몸집이 단아하다. 특히, 한형조 선생이 강해하신 이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는 아주 ‘현대적으로’ 잘 읽히면서, 오히려 선사 같은 기품까지 느껴진다.
내가 살아오면서 읽은 책 가운데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탄성을 터뜨리게 한 책은 몇 안 된다. 한데 한형조 선생의 <<무문관>>이 그 책들 중 하나다. 이 책과 함께한 장장 한 달에 이르는 독서시절에, 잡식하느라 변비를 앓던 머릿속이 탁 트이고 눈앞이 환해져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내가 다른 은하로 떠나게 될 때 이 책만은 반드시 챙겨 가리라.

百尺竿頭須進步백척간두수진보.
백 척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쉬 눌러앉고자 하는 나를 늘 추동推動케 하는 문장이다. 아흔아홉 번씩이나 다시 보아도 발끝이 다 찌릿찌릿하다. 사는 게 벽 같을 때 아무 데나 펼쳐 들고 읽기에 그만인 책,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 한형조 선생이 이런 책을 더도 말도 ‘딱’ 한 권만 더 펴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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