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의 한 항목에서 관련 항목으로 계속해서 옮겨가듯 반反/半계획적으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읽어나가는 건 나름 괜찮은 독서방법이다. 책 읽을 시간은 넉넉하고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을 때 도서관에서 해보면 딱이다. 그간 출간된 걸 모르고 있다가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를 신간서가에서 발견하였다. 벤야민, 들뢰즈, 보드리야르, 데리다의 철학을 사진, 책, 영화, 미술, 건축, 광고, 패션 등과 엮어나가며 즐겁게 읽다가 문득 저자를 번역자로만 알아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찾아보니 가장 가까운 서가에 <<시선은 권력이다>>가 꽂혀 있었다. 판옵티콘, 푸코 들은 건너뛰고 하다 보니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눈 이야기> 장이 눈에 띄었다. 이 장에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성경, 바타유의 <눈 이야기>에 이어 <<모래 사나이>>가 다루어진다(프로이트는 <섬뜩함>이라는 논문에서 안구 상실에 대한 공포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거세 콤플렉스’로 설명하는데, ‘눈 모티브’를 갖고 있는 <<모래 사나이>>도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관점에서 분석한다).

 

E. T. A. 호프만. 검색해보니 마침 다른 층에 <<모래 사나이>>가 있었다. 작품에 대한 해설과 지은이에 대한 소개 글은 건너뛰고 바로 소설을 읽어 들어간다. 소설의 지배적인 요소는 ‘광기’와 ‘눈 모티브’다. 이 두 가지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결합한다. 내면의 눈이 고장난 주인공 나타나엘은 끝끝내 자기 아닌 것을 바로보지 못하고 ‘광기’에 휘둘려서 파멸하고 만다.

    

1. <모래 사나이> 이야기
유모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어.
“어이구, 나타나엘. 넌 아직 그걸 모르고 있었어? 모래 사나이는 아주 나쁜 사람이지. 애들이 자러 가기 싫어하면 나타나서 애들 눈에 모래를 한 줌 뿌린단다. 그리고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그것을 주워서 자루에 담아 자기 새끼들에게 먹이려고 반달로 돌아가지. 달에 있는 새끼들은 둥지에 앉아 올빼미처럼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어린 애들의 눈을 콕콕 쪼아 먹는단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잔인한 모래 사나이의 형상이 떠올랐어. 그 뒤로 저녁에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무서움과 놀라움에 온몸을 떨었어. 어머니는 내가 눈물을 흘리며 “모래 사나이, 모래 사나이” 하고 떠듬떠듬 외치는 소리 말고 다른 말은 들을 수 없었어. 이어 난 곧 침실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거의 밤새도록 모래 사나이의 무서운 환영에 시달렸어.(51~52쪽) 

2. 안경
그러나 코폴라는 방 안으로 쑥 들어와서 찡그린 큰 입으로 흉측한 웃음을 짓고는 긴 잿빛 눈썹 아래 작은 눈을 쏘는 듯이 번득이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기압계가 필요 없어요? 기압계가 필요 없다구요! 멋진 눈도 갖고 왔어요. 멋진 눈 말이오!”
나타나엘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엄청난 분이군요. 아니 당신이 어떻게 눈을 가지고 있어요? 눈, 눈알 말이오?”
그런데 그 순간 코폴라는 기압계를 옆으로 내려놓고 커다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손잡이가 달린 안경과 보통 안경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 안경, 코에 걸치는 안경이오. 이것들이 내가 가져온 눈이오. 아름다운 눈이죠!”
그러면서 코폴라가 계속 안경을 꺼내놓자, 책상 위는 온통 이상한 빛을 띠면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눈알이 경련을 하듯 실룩거리며 나타나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책상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코폴라는 더 많은 안경을 꺼내놓았고, 번쩍거리는 안경알들은 이글거리는 눈알처럼 점점 더 사납게 서로 뒤엉켜 튀어 오르며 피처럼 붉은 빛을 나타나엘의 가슴에 쏘아댔다. 나타나엘은 끔찍한 공포에 휩싸여 소리쳤다.
“그만해요, 그만! 이 무서운 인간아!”(91~92쪽) 

3. 망원경(올림피아를 보는)
나타나엘은 매우 깔끔하게 제작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휴대용 망원경 하나를 골라 들고서 한번 시험을 해보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 무심코 그는 스팔란차니 교수의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올림피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그만 탁자 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 두 손을 포갠 채 앉아 있었다. 이제야 나타나엘은 올림피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이상하게도 경직되고 생기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타나엘이 망원경을 통해 더욱 선명히 바라보자, 올림피아의 두 눈에는 젖은 달빛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시력이 생생히 살아나는 것 같았고,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생기 있게 불타올랐다. 나타나엘은 마술에 걸린 듯 창가에 기대어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올림피아를 마냥 바라보았다.(93~94쪽) 

4. 검은 눈구멍, 두 개의 눈알
나타나엘은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올림피아의 밀랍 얼굴에 눈 대신 검은 구멍만 나 있는 것을 그는 또렷이 보았던 것이다. 올림피아는 생명 없는 인형이었다.(110쪽)
그때 나타나엘은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면서 그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알을 보았다. 스팔란차니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두 눈알을 집어 나타나엘에게 던졌고, 눈알은 그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 순간 광기의 맹렬히 불타는 발톱이 그를 움켜잡았고, 내면까지 파고들어 모든 감각과 생각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111쪽) 

5. 망원경(클라라를 보는)
나타나엘은 기계적으로 옆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는 코폴라의 망원경을 꺼내서 옆을 바라보았다. 망원경 앞에는 클라라가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엘의 맥박과 혈관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이 움찔했다. 그는 아주 창백한 얼굴로 클라라를 응시했다. 그러나 곧 이리저리 희번덕거리는 두 눈알 사이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으며, 나타나엘은 마치 쫓기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허공으로 뛰어오르면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무인형아, 빙빙 돌아라. 나무인형아, 빙빙 돌아라.”
그리고는 나타나엘은 거센 힘으로 클라라를 붙잡더니 탑 아래로 내던지려 했다.(116~117쪽)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E. T. A. 호프만은 유능한 법률가에다 작곡가, 음악비평가, 극장의 음악장, 캐리커처 화가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와 같은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그는, 낮에는 법률고문관으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거나, 문학을 논하는 ‘세라피온의 밤’이라는 모임에 참석하는 이중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다 그만 마흔여섯에 죽고 말았다. 

<<모래 사나이>>는 아주 흥미로웠다. 그러니 이제 전작주의자처럼 <호두까기 인형>의 기초가 되었다는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으로 다시 링크를 걸어봐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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