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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이 '운명을 품고' 있음을 아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1) 돈처럼 돌고 돌거나 2) 죄수처럼 갇히거나 3) 물, 불 등에 요절당하거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책은 1), 2)의 운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에 점점 더 미쳐가 주위 사람들에게 '책벌레, 독서광, 이야기광'으로 찍힌 남자. '여행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 점에 관해 친구들과 논쟁하고 날 때면
굳이 집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 책상에 머물러 귀를 기울여라. 귀기울 것도 없이 그저 기다려라. 기다릴 것도 없이, 완전히 조용히 그리고 홀로 있으라. 세상이 자청해서 너에게 본색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세상은 달리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황홀함에 취해 네 앞에서 몸을 뒤틀 것이다.(<<악은 인간을 유혹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다>>(프란츠 카프카, 솔, 1998), 191쪽)
이따위 카프카의 글로 갈음하는 남자. 책을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 그 남자(결혼했지만 별거 중이다), 이름조차 비블리Bibli(책Biblio에 가까운)다. '그 책'에 홀리고 만 그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듯) 책으로 변신해버린다. 그 후 청소부, 도서관장, 편집자, 소설가, 장서가 등을 만나며 '그 책' 나름의 운명을 겪게 되는데……. 동물성의 '벌레'(잠자)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죽은 데 반해 사물성의 '그 책'(비블리)은 도서관에서 시작하여 무덤 속까지 두루 돌아다닌다. 가히 놀랍다. 한데 '그 책'이 사람 생가죽 장정에다 펄펄 살아 있는 사람의 생각으로 들끓는 책이라니, 더욱 그로테스크하다. 이 점에 입각하여 적는다.
*제목: 너무 단편적이다. 원제 그대로 (좀 더 함의적으로) '그 책Das Buch' 정도로 붙이면 안 되었나? '그 책'에 사로잡힌 자는'책이 되어버린 남자' 비블리만이 아니다. 로마나 부크Buch(이 또한 책이다!)라는 여자도 등장하지 않나.
*삽화: 지나치게 많은 데다 톤이 제각각이다. 책 전체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그로테스크 미학의 관점에서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악한 책'의 천로역정은 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