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의 시대 - 기록, 살인, 그리고 포르투갈 제국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4년 7월
평점 :
* 번개가 번쩍일 때 그 섬광 아래가 잠시 훤히 보이는 것처럼, 살인은 한 시대의 숨겨진 윤곽을 보여줄 수도 있다. 즉, 살해된 희생자가 자유롭게 숨 쉬며 세상과 함께하기에는 그 세상의 생활양식에 너무도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살해되고 말았다는 것을……. [18장 흩어진 낱장으로 존재하는 우리 315P]
추리소설 뺨치는
역사책을 만났습니다.
작년 이맘때, 까치 출판사에서 출간된 <빛의 시대, 중세>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어요~ 중세 역사를 오해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저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던 책이었는데요. 올해는 <물의 시대>로 포르투갈의 중세 역사를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기회에 ‘중세사 시리즈’로 <빛의 시대>와 <물의 시대>를 묶어볼 생각에 두근두근했죠♡
-
<물의 시대>는 16세기 말 벌어진 한 살인 사건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피해자는 포르투갈 왕립 기록물 보관소 소장이었던 ‘다미앙 드 고이스’였는데요. 사람은 불에 탔는데, 손에 쥔 종이는 타다 만 형태의 특이한 현장이었죠! 종이가 타다 말았다는 건, 누군가 그 종이가 다 타버리기 전에 불을 껐다는 것 아니겠어요? +ㅅ+ ㄷㄷㄷ
* 기록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다음 날 아침 불에 탄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손에는 그가 전날 밤 읽던 문서 조각이 쥐여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타버렸다. 발견된 시신의 상태가 워낙 기묘해서 의혹이 증폭된 탓에 시신에만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 외의 것들은 간과되었다. [1장 기록보관소에서의 살인 사건 17P]
‘다미앙이 죽기 전에 읽고 있던 종이는 과연 어떤 문서였을까? 살인자는 무슨 원한이 있기에 다미앙을 살해했을까? 불을 중간에 끈 것은 왜일까? 손에 쥔 문서는 왜 가져가지 않았지? ……’ 등등.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역사책, 맞아요. 소설로 치면, 절정-결말 가서 빵 터지는데 진짜 막판에 몰입도 최강이었습니다!
단, 발단-전개-위기 파트를
버티셔야 해요;
전 유럽을 누비는
대항해 시대의 방대한 기록이 펼쳐짐=ㅅ=;
-
* 다미앙은 무척이나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단순한 서사를 중단시키겠다는 환상을 품었다. 그리고 다성음악처럼 메아리와 대조의 메들리가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미앙의 환상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조류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고 있었다. [13장 개의 몸속 243P]
<물의 시대>는 총 18장으로 구성된 역사책입니다. 중세 포르투갈 역사를 두 인물의 삶을 교차 기술하여 소개하는데요. 먼저 위 살인 사건의 피해자 다미앙의 행적은 당시 전 세계 정보의 중앙 정보처리 센터인 ‘국립기록보관소(토레 도 톰보, Torre do Tombo, 톰부 탑)’를 기점으로 중세 유럽의 땅을 누빕니다. 다른 인물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는 중세 유럽의 바다를 누비죠.
두 인물의 행적이 교차하는 지점은 어디일지, 저자가 두 인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지, 다미앙와 루이스 중 어떤 인물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들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또는 후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상상하며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에요~ 본문에 자주 반복되는 ‘다성음악’이 서사의 축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 서로 거슬리는 상반되는 것들을 화해시키는 다성음악 안에는 거의 기적과 같은 무언가가 있어서, 혼란에 시달리는 세계에 뜻밖의 해결을 낳았다. 포르투갈인은 전 세계에 기독교의 경이로움을 알리기 위해서 다성음악의 신묘한 마법을 사용했다. [5장 인도 무역관 84P]
-
책은 부록 제외, 실제 본문은 300쪽 분량이에요! 역사책이라서 사진 자료와 인용문이 간절한데, 중간에 수록된 그림 외에도 책 중간에 컬러 도판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224쪽과 225쪽 사이.
그동안 포르투갈 하면 떠오르는 것은 ‘축구, 와인, 타르트’ 정도였습니다. 한데 이번 독서를 계기로 ‘중세 기록의 중심지’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어요. 지금까지 소개한 부분은 ‘빛의 시대’의 서사라면, ‘어둠의 시대’의 서사 또한 가득합니다. 이후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참혹한 실상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저자가 전하는 이면의 서사도 놓치지 마세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름은 빈칸 처리
* [---]는 몇몇 사람에게는 유용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 이상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형성된 지극히 개인적인 집착은 그의 서사시에서 식민지 환상의 원형이 되었다. 고결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명성과 정복에 따른 보상, 그리고 정서적, 성적 욕구의 충족이 전부 버무려진 식민지 환상의 탄생이었다. [16장 민족 이야기 288P]
-
* 르네상스는 인간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상에 집착하던 시대였다. 인간에게는 천사와 같은 위엄이 있다는 연설에 환호하면서, 인간을 그토록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논쟁하던 시기였다. (…) 다만 따져보면 정말로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고유의 것은 없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만이 배제되었다. [13장 개의 몸속 249P]
중세 포르투갈의 역사를 담은 함선을 타고, 육지와 해상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생생한 기록을 만납니다. <물의 시대>를 만나면 ㅡ 리스본 여행 가고 싶어집니다♡ 살인 사건 피해자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이 곧 16세기 말 유럽을 관통하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배움이 되는 독서 시간, <물의 시대> 읽기로 중세 포르투갈 책여행은 어떨까요? :)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