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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하루키의 소설만 읽다 에세이를 읽으니 그의 개성이 달려들 듯 뚜렷하다.
마흔이 되기 전 3년을 그리스,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에서 보내다.
그 3년 동안 '상실의 시대'와 '댄스,댄스,댄스'를 쓰다.
마흔이 되기 전 어떤 예감과 같은 것에 의해 뭔가 보람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단다.
나도 마흔이 되면 뭔가가 크게 변하거나, 변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는 중인데...
책 앞부분에 이렇게 강렬한 동기가 튀어 나오니
나도 어떤 결단을 덩달아 내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은 예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30대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그 예감은
나의 몸 속에서 조금씩 부풀어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오기 전에,
즉 내 자신 속에서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뭔가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종류의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다.
(쓸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할 만한 작품을 써 놓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하루키의 글쓰기는 그에게 존재증명이고, 水準器이며, 계속 그렇게 사용해 나가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단다.
아침 커피 물을 올릴 때마다 신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장편소설을 쓰는 것은 내 경우 매우 특수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의미에서도 그것을 일상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깊은 산림 속에 혼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수목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거대한 가지는 겹겹이 뻗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거기에 어떤 동물이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장편소설을 쓸 때면 항상 머릿속 어디에선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의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치유행위로서의 번역을 하고
책을 읽고, 여행 스케치 같은 소품(?)을 쓰는 식으로
그의 모든 일상은 글쓰기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여행 에세이이긴 하나 여행 안내서(가이드북)는 아니다.
난 후자를 싫어한다.
어느 곳에 가면 어느 숙소에서 자고 어느 식당이 맛있다는 식의...
(대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실용문도 물론 유용하겠지만 그걸 엮은 걸 책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유럽 중에서도, 역사는 유구하나 현대엔 오히려 뒤쳐진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선택한 것이 흥미롭다.
뭔가 체계가 없고 어눌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생생한 경험담은 무척 흥미롭다.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까...
여행지에서도 그의 칸트같은 일상의 규칙성은 유지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조깅을 하고
오전 내내 소설을 쓰다가, 오후엔 맥주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난 이런 생활이 좋다. 칸트의 규칙성... 게다가 엄청나게 정적이지 않은가!
하나의 소설을 마무리한 뒤에는
여행을 가거나, 오페라를 보거나, 클래식 연주를 들으러 가거나
키안티 와인을 사러 가거나, 숲속의 개인 미술관 관람을 하기도 한다.
'인생의 양지' 같은 하루...
'누군가가 우리를 그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멀리 떠나 온 서른 여덟살의 작가와 그의 아내,
테이블 위의 맥주. 그저 그런 인생, 그리고 때로는 오후의 양지바른 곳을.
진정 부럽다.
유럽에 가면 미술관, 오페라, 와이너리는 꼭 가야지...
이 책을 읽은 후 '그리스인 조르바'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셋트로 구성하여
애프터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여년도 더 된 여행기인데 이 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하루키는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겐 맘에 드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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