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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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집 포스팅을 보고 미경이가 도서관에서 빌려준 책.

덕분에 억지로(?) 공부하다.

이건 뭐, 동생이 언니를 학습시키는 격이다.

학습을 강제 당하는 건 묘하게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ㅋㅋ

 

이해되든 말든 무조건 통독~

 

15개 명문가 고택을 답사하고 가문의 정신, 가풍, 교육 철학을 이야기하다.

풍수지리, 음양오행의 해박한 지식까지 엿볼수 있어 신선하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담양 소쇄원에 이르는 길의 아늑한 풍경과 정취를 마음에 그린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고택, 환경, 성정 역시 여러면에서 다른 것 같다.

그곳에서의 역사와 사람의 일들도 아득히 떠올려 본다.

 

경상도 대표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 전라도 대표 고봉 기대승의 이기일원론

둘은 지역, 나이, 정치 참여도 등 모든 대조점들을 극복하고

8여년에 걸쳐 사단칠정론으로 불리우는 서신 논쟁을 거듭하면서도

서로 흠모하고 사랑했다 한다.

 

아름다운 심교(心交)...

 

금욕적인 이황보다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주의자,

한국적 살롱 문화의 중심축 기대승에게 더 끌린다.

 

종가의 전통과 엄격함이 고루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인문학적 풍취와 지조가 향기롭다.

 

풍수지리는 미신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천문, 명리, 지리 모두 엄청난 과학이라는 생각도 얼핏 든다.

 

 

 

대숲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 대나무 이파리가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가 있다...일이 바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할 일 없는 건달이 되어야 들리는 소리다. 그 소리를 한참 듣다 보면 집착과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다. 이름하여 망우송(忘憂頌)이다.

 

계산풍류란 사대부들이 경치 좋은 계곡에다 누정을 지어놓고 문(文), 사(史), 철(哲)을 논하고 즐기던 조선시대의 고급문화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호남의 고급문화는 서원보다는 누정에서 먼저 출발했다는 말이다.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첫째는 적덕이요, 둘째는 명리를 통찰하는 것이요, 셋째는 풍수요, 넷째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라고 한다.

 

소요유(消遙遊)의 쾌감을 알아 버린 사람은 결코 조직사회의 속박에 묶이지 않는다. 고향에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 벼슬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 예술을 논할 때에는 김추사를 비켜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오늘날에도 인구에 회자되는 다음의 유명한 서예관을 피력한 바 있다.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券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추사 김정희 고택의 주련...

"서예는 외로운 소나무의 한가지와 같다.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만리와 같은 유장함에 있다.

세상에서 꼭 할 만한 일 두 가지는 밭 갈고 책 읽는 일 뿐이다.

문자를 통해서 깨달음에 들어간다.

오직 사랑하는 것은 그림과 책 그리고 옛 물건이다.

봄바람처럼 고운 마음은 만물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책은 이미 삼천권이 넘었다.

반나절은 정좌하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반나절은 책 읽는다."

 

옷도 대충 입고, 먹는 것도 되는 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는 집만큼은 푸른 소나무숲이 있는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싶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衣와 食이 주는 멋과 맛보다

住가 지니는 건축적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마도 의와 식에 비해 주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강력한 욕구 중의 하나인

문화적 욕구를 더 중층적으로 충족해 주는 속성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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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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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만큼 보인다' 손철주와 '그림에 마음을 놓다' 이주은이

듀엣곡을 부르듯 함께 쓴 책이다.

 

두 작가의 책을 이미 읽었었기 때문에

문장을 따라 가기가 더 편안하다.

 

책 편집과 구상을 참 잘했다는 생각.

김훈의 서문으로부터, 민트색 지면엔 손철주, 연보라 지면엔 이주은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키다리 아저씨'를 읽던 어린 시절부터

다감한 편지글을 좋아한다.

 

손철주는 동양화, 이주은은 서양화에 이야기를 덧붙이되

봄,여름,가을까지 왔다갔다 이어지는 편지글의 형식이라

다정하기 이를 데 없다.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의 시선의 미묘한 차이가

글을 읽는 잔재미를 더해준다.

 

자고 나며 날마다 빈 화폭과 마주서는 자들은 고통 속에서 복되다.

빈 화폭은 귀순하지 않은 자유의 황무지이다. 그 화폭은 인간의 세상 속에

펼쳐져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빈 화폭은 아직 경험되지 않은

낯선 공간이고, 태어나지 않은 의미의 잠재태이다.

그 잠재태의 공간이 인간을 손짓해 부른다.

 

거룩하고 위대한 것이 아름다운 것은 맞는데, 저는 아름다움에 깃든 슬픔 쪽으로

자꾸 마음이 갑니다. 바로 '비장미'입니다. 그림도 비장한 아름다움이 감지될 때 좋습니다.

 

'초속 5 cm'라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혹시 보셨는지요? 초속 5cm는 벚꽃의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땅위로 떨어지는 현기증 나도록 아찔한 순간의 속도랍니다.

 

자기보존적이면서 성애적인 것이 합해진 삶에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 하고,

자기파괴적이면서 궁극적인 소멸로 치닫는 충동을 타나토스(Thanatos)라고 합니다.

물론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살기 위해 자기 꼬리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뱀의 모습처럼

서로 둥글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제 모든 게 쉬워졌군. 이렇게 쉬운 건지 왜 몰랐을까' 헤밍웨이가 쓴 저 유명한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대사이지요.

 

동양의 감필법에 무슨 장점이 있을까요? 뜯어보면 서양화와는 결이 다른 본색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 거칠고 호방한 가운데 필과 묵이 살아있지요.

둘째, 서투른 가운데 법도를 지킵니다.

셋째, 괴상하고 허탄해도 이치에 맞습니다.

넷째, 허로써 실을 감당합니다.

다섯째, 평이하고 담담해도 의미가 깊습니다.

 

인상과 달리 환영은 이중적입니다.

완벽한 닮음이란, 그러니까 나를 대신하는 일종의 분신을 만든다는 것은,

거울 속의 세상처럼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세상은 둘로 갈리게 됩니다.

그림 안의 세상과 그림 바깥의 세상으로 말이지요.

서양의 그림은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른 세상을 향해 여는 창문이기도 합니다.

창을 가진 컴퓨터가 서양에서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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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비움의 미학 - 장석주의 장자 읽기
장석주 지음 / 푸르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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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5,000원이다.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깊은 사유에 비하면...

 

'10년 동안 장자를 읽으며 마음의 상처들이 아무는 것을 지켜 보았다.

마침내 고요해졌다. 고요해졌으므로 물 같은 사람이 되었다.

물은 유약하나 그 유약함의 덕성으로 세상의 강성한 것들을 능히 이긴다.'

 

장석주 시인의 책을 두번째로 읽다. '취서만필'에 이어.

이 작가도 리뷰를 읽지 않은 채, 그 이름만으로 독서목록에 추가한다.

 

심플하고 명징한 시 '대추 한 알'도 좋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절로 둥글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올해 들어 '장자'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나이는 언제일까.

난 올해 들어 그렇게 느낀다.

이제 삶보다는 죽음을 더 의식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여전히 나는 빛나는 삶을 사랑한다.

아이의 살 냄새, 달콤한 믹스 커피 향, 머리칼의 샴푸 잔향

또렷한 아이의 목소리, 이른 아침 출근길의 새 소리, 운전하며 듣는 심장 소리 같은 클래식 음악

단어를 알지 못하는 아이의 글자, 줄기차게 접어 대는 색종이...

 

그렇기에 더더욱 죽음이 두렵다.

모든 것의 부재, 종결... 필연...

 

'장자' 원문을 읽기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섣불리 읽지 못했는데

장석주 시인이 이런 책을 냈다 하니 바로 집어 들었다.

인천 출장길 케이티엑스에서 반을 읽고

오늘 심란하고 소란한 밥벌이의 고통으로 가득한  사무실을 못 견뎌 내리 마신 커피 때문에 잠 못 이뤄 마저 읽고 이 글을 쓴다.

 

장자의 도는 내가 미처 생각지도, 실행하지도 못할 지혜와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그걸 따라할 엄두는 내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그 자유로움, 경계를 넘나듬, 대범함, 현란한 비유는 실로 아름다워

그 자체로 글을 읽는 즐거움이 무한하다.

 

장석주의 문장도 마찬가지.

작가는 안성에 수졸재라는 집을 짓고 10년 넘게 책읽고, 글쓰고, 산책하며, 명상하며 지낸다. 

벽오동나무, 층층나무, 회화나무, 보리수, 산벚나무, 매화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들을 키우며...

 

그 10년 동안 머리맡에 '장자'를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읽었단다.

따라서 이 책의 가격은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5천권의 독서량이 녹아 있는 책이 아닌가.

 

이런 책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

생애에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수 없을 바에야

엄선된 책을...

 

올 겨울은 고독 속에 나를 밀어 넣고 자기극복과 궁구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생명들도 땅 속에 엎드려 움츠리는 계절이니...

(작가는 여자는 고독을 두려워한다고 했지만 말이다. 여자라고 쇼핑과 수다스러움과

우울함에만 빠져 있으라는 법은 없지... 요 부분은 조금 맘에 안 든다. ㅋㅋ)

탐욕을 그치고 마음을 지극한 고요에 이르게 할 일이다.

 

'나는 지난 10년동안 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읽었다.

이 암울함이 암종처럼 자라는 시대에 책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

오늘의 시대야말로 책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책은 삶과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책은 이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속에서 삶을 근본에서 짚어보고

최적의 생존에 맞는 자기혁신과 영감에 대해 말한다.

책에서 우리가 배우고 익힐 것은 존재의 기술이다. 존재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하느냐를 찾아야 한다. 이의 핵심은 자기 탐색과 자기생성의 기술이다."

 

잘 모르겠다. 난, 내가 미친듯이 책을 읽는 이유를...

그렇지만 그 이외에 달리 무얼 하겠는가?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혼몽한 중에 장주는 제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터.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라 한다.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미혹 아닐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어려서 집을 잃고 돌아갈 줄 모름과 같은 것이 아닐까? 미녀 여희는 래라는 곳의 변경지기 딸이었네. 진나라로 데려갈 때 여희는 너무 울어서 눈물에 옷깃이 흠뻑 젖었지. 그러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아름다운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픔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본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한 어둠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흐름과 맞먹는 일이네.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 우뚝하나 무너지는 일이 없고, 뭔가 모자라는 듯하나 받는 일이 없고, 한가로이 홀로 서 있으나 고집스럽지 않고, 넓게 비어 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엷은 웃음 기쁜 듯하고,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 뿐, 빛나느니 그 얼굴빛, 한가로이 덕에 머물고, 넓으니 큰 듯하고, 초연하였으니 얽매임이 없고, 깊으니 입 다물기 좋아하는 것 같고, 멍하니 할 말을 잊은 듯했습니다.

 

대저 생명을 얻는 것은 우연히 시절을 만난 것이요, 그것을 잃는 것은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니, 시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변화에 따르면, 슬픔도 즐거움도 마음에 들어올 수 없다네. 이것이 옛사람이 말한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물이 묶고 있기 때문일세. 사물이 자연을 이기지 못한 지는 오래되었네. 내가 어찌 그것을 싫어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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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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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하루키의 소설만 읽다 에세이를 읽으니 그의 개성이 달려들 듯 뚜렷하다.

 

마흔이 되기 전 3년을 그리스,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에서 보내다.

그 3년 동안 '상실의 시대'와 '댄스,댄스,댄스'를 쓰다.

 

마흔이 되기 전 어떤 예감과 같은 것에 의해 뭔가 보람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단다.

나도 마흔이 되면 뭔가가 크게 변하거나, 변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는 중인데...

책 앞부분에 이렇게 강렬한 동기가 튀어 나오니

나도 어떤 결단을 덩달아 내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은 예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30대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그 예감은

나의 몸 속에서 조금씩 부풀어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오기 전에,

즉 내 자신 속에서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뭔가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종류의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다.

(쓸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할 만한 작품을 써 놓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하루키의 글쓰기는 그에게 존재증명이고, 水準器이며, 계속 그렇게 사용해 나가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단다.

아침 커피 물을 올릴 때마다 신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장편소설을 쓰는 것은 내 경우 매우 특수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의미에서도 그것을 일상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깊은 산림 속에 혼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수목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거대한 가지는 겹겹이 뻗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거기에 어떤 동물이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장편소설을 쓸 때면 항상 머릿속 어디에선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의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치유행위로서의 번역을 하고

책을 읽고, 여행 스케치 같은 소품(?)을 쓰는 식으로

그의 모든 일상은 글쓰기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여행 에세이이긴 하나 여행 안내서(가이드북)는 아니다.

난 후자를 싫어한다.

어느 곳에 가면 어느 숙소에서 자고 어느 식당이 맛있다는 식의...

(대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실용문도 물론 유용하겠지만 그걸 엮은 걸 책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유럽 중에서도, 역사는 유구하나 현대엔 오히려 뒤쳐진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선택한 것이 흥미롭다.

뭔가 체계가 없고 어눌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생생한 경험담은 무척 흥미롭다.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까...

 

여행지에서도 그의 칸트같은 일상의 규칙성은 유지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조깅을 하고

오전 내내 소설을 쓰다가, 오후엔 맥주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난 이런 생활이 좋다. 칸트의 규칙성... 게다가 엄청나게 정적이지 않은가!

 

하나의 소설을 마무리한 뒤에는

여행을 가거나, 오페라를 보거나, 클래식 연주를 들으러 가거나

 

키안티 와인을 사러 가거나, 숲속의 개인 미술관 관람을 하기도 한다.

 

'인생의 양지' 같은 하루...

 

'누군가가 우리를 그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멀리 떠나 온 서른 여덟살의 작가와 그의 아내,

테이블 위의 맥주. 그저 그런 인생, 그리고 때로는 오후의 양지바른 곳을.

 

진정 부럽다.

유럽에 가면 미술관, 오페라, 와이너리는 꼭 가야지...

 

이 책을 읽은 후 '그리스인 조르바'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셋트로 구성하여

애프터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여년도 더 된 여행기인데 이 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하루키는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겐 맘에 드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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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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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불륜이나, 사랑이나, 이별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 이야기이다.

 

우리집이랑 가족 구성원이 똑같아 공교롭다.

엄마, 아빠, 1남3녀(막내가 남동생이다.)

 

이 집도 가족이 한꺼번에 버스를 탈 일이 있으면

서로 모른 척하는 게임을 한단다.

(우리도 어릴 적 그랬는데.

아이 많은 게 부끄럽다고, 함께 외출할 일 있으면

멀찌기 떨어져 걷곤 했다.)

 

이 가족은 전형적인 부르조아 가정이다.

걱정거리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대기업 직원인 아빠, 전업주부 엄마.

 

엄마는 아빠를 출근 시키고 곱게 화장을 하고

아빠가 퇴근하기 전 말갛게 화장을 지운다.

우아함의 표본.

일년에 대여섯번 꽃시장에 나가 화분을 산다.

앵두나무, 금작화, 산사나무...

은행을 까거나, 만두를 빚거나 할 때에는

아이들에게 책 읽을래, 일을 할래 하고 선택권을 준다.

그럼 아이들은 물론 책읽어주기를 선택한다.

책갈피 꽂아 놓은 부분부터... 아이들이 낭독하면 일을 하며 듣는다.

'적과 흑' 같은 책

(이거 좋다. 책 읽어주는 아이들.)

식탁에 장식할 하얀 돌, 예쁜 나뭇잎을 주워 오라고 심부름도 시킨다.

(이 집 아이들은 엄청나게 말을 잘 듣는다.)

 

큰언니는 풍성한 베이지색 터틀넥에 길이가 긴 검정 플레어스커트에

검정타이츠를 신는, 보드라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조용한 여자.

1년6개월의 결혼 생활을 접고 돌싱이 되어 돌아온다.

이혼 사유는 가족 누구도 캐묻지 않는다.

돌아온 언니를 따뜻하게 받아 들인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이혼이 어떤 느낌이냐고 묻자

'반죽음 상태에서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반죽여 놓는 상태...

아기 가진 걸 알고 이혼을 결정한 여자.

그 아기에게 줄 유모차를 다 같이 사러 나가며

가족사진관으로 향하는 게 소설의 마무리다.

 

작은 언니는 자살과 왕따 이력이 있는 독특한 사람.

미혼모의 아이를 자기가 아빠인 양 키우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돈도 없고, 볼품 없는 유부남을 사랑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고교 졸업 후 빈둥거린다.

오랫동안 못 만나다가 만나면 키가 더 자란 듯 하다는 남자친구가 있다.

 

막내동생 라쓰는 약간 퇴폐적인 조그만 인형(이런 인형을 뭐라 하더라?)을 만드는 게 취미인

중학생인데, 그 일로 정학을 당하자 가족들은 모두 '문화가 없는' 학교를 탓하며

개의치 않는다.

 

형제들이 굉장히 우애롭고,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정적이다.

책읽기, 산책하기, 쿠키 굽기, 따끈한 물에 목욕하고 비누 냄새 퐁퐁 풍기기...

 

서로에게 마음을 항상 열어 두고, 차를 마시고 대화하되

결정적인 부분은 캐묻지 않는 것...

(몹시 맘에 든다.)

 

에쿠니 가오리의 간결하고 유리 같은 섬세한 문장.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는 것.

 

따사로운 목욕물 같은 책...

 

in book

 

"스무살 되니까 기뻐?"

후카마치 나오토가 물었다.

기쁜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되어보지 않고서는.

"포부는 있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올곧게 사는 것."

 

다 먹은 후 손을 놓고서 무릎에 펼쳐 놓은 냅킨을 들어 입을 닦으면서

나는 이제 두번 다시 남자와 손잡은 채 밥을 먹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 번으로 만족했다고 할까, 그러니까 한 번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 한 번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분수 옆 벤치에 앉아 마지막 전철을 보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모두들 아주 어른스러워 보인다.

나이를 먹으면 먹는 만큼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주변도 훨씬 질서정연해질 것이라고.

나는 마지막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과 함께 어른인 척 부지런히 걷는다.

하지만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소요 언니의 차분함이나 시마코 언니의 정열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긴 자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 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대개는 낮에 인생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날씨가 좋은 낮.

싸늘한 부엌에서, 전철 안에서, 교실에서, 아빠를 따라간 탓에 혼자서만 심심한 책방에서

그런 때,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자애의 발그레한 얼굴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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