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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이번엔 불륜이나, 사랑이나, 이별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 이야기이다.
우리집이랑 가족 구성원이 똑같아 공교롭다.
엄마, 아빠, 1남3녀(막내가 남동생이다.)
이 집도 가족이 한꺼번에 버스를 탈 일이 있으면
서로 모른 척하는 게임을 한단다.
(우리도 어릴 적 그랬는데.
아이 많은 게 부끄럽다고, 함께 외출할 일 있으면
멀찌기 떨어져 걷곤 했다.)
이 가족은 전형적인 부르조아 가정이다.
걱정거리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대기업 직원인 아빠, 전업주부 엄마.
엄마는 아빠를 출근 시키고 곱게 화장을 하고
아빠가 퇴근하기 전 말갛게 화장을 지운다.
우아함의 표본.
일년에 대여섯번 꽃시장에 나가 화분을 산다.
앵두나무, 금작화, 산사나무...
은행을 까거나, 만두를 빚거나 할 때에는
아이들에게 책 읽을래, 일을 할래 하고 선택권을 준다.
그럼 아이들은 물론 책읽어주기를 선택한다.
책갈피 꽂아 놓은 부분부터... 아이들이 낭독하면 일을 하며 듣는다.
'적과 흑' 같은 책
(이거 좋다. 책 읽어주는 아이들.)
식탁에 장식할 하얀 돌, 예쁜 나뭇잎을 주워 오라고 심부름도 시킨다.
(이 집 아이들은 엄청나게 말을 잘 듣는다.)
큰언니는 풍성한 베이지색 터틀넥에 길이가 긴 검정 플레어스커트에
검정타이츠를 신는, 보드라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조용한 여자.
1년6개월의 결혼 생활을 접고 돌싱이 되어 돌아온다.
이혼 사유는 가족 누구도 캐묻지 않는다.
돌아온 언니를 따뜻하게 받아 들인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이혼이 어떤 느낌이냐고 묻자
'반죽음 상태에서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반죽여 놓는 상태...
아기 가진 걸 알고 이혼을 결정한 여자.
그 아기에게 줄 유모차를 다 같이 사러 나가며
가족사진관으로 향하는 게 소설의 마무리다.
작은 언니는 자살과 왕따 이력이 있는 독특한 사람.
미혼모의 아이를 자기가 아빠인 양 키우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돈도 없고, 볼품 없는 유부남을 사랑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고교 졸업 후 빈둥거린다.
오랫동안 못 만나다가 만나면 키가 더 자란 듯 하다는 남자친구가 있다.
막내동생 라쓰는 약간 퇴폐적인 조그만 인형(이런 인형을 뭐라 하더라?)을 만드는 게 취미인
중학생인데, 그 일로 정학을 당하자 가족들은 모두 '문화가 없는' 학교를 탓하며
개의치 않는다.
형제들이 굉장히 우애롭고,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정적이다.
책읽기, 산책하기, 쿠키 굽기, 따끈한 물에 목욕하고 비누 냄새 퐁퐁 풍기기...
서로에게 마음을 항상 열어 두고, 차를 마시고 대화하되
결정적인 부분은 캐묻지 않는 것...
(몹시 맘에 든다.)
에쿠니 가오리의 간결하고 유리 같은 섬세한 문장.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는 것.
따사로운 목욕물 같은 책...
in book
"스무살 되니까 기뻐?"
후카마치 나오토가 물었다.
기쁜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되어보지 않고서는.
"포부는 있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올곧게 사는 것."
다 먹은 후 손을 놓고서 무릎에 펼쳐 놓은 냅킨을 들어 입을 닦으면서
나는 이제 두번 다시 남자와 손잡은 채 밥을 먹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 번으로 만족했다고 할까, 그러니까 한 번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 한 번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분수 옆 벤치에 앉아 마지막 전철을 보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모두들 아주 어른스러워 보인다.
나이를 먹으면 먹는 만큼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주변도 훨씬 질서정연해질 것이라고.
나는 마지막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과 함께 어른인 척 부지런히 걷는다.
하지만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소요 언니의 차분함이나 시마코 언니의 정열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긴 자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 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대개는 낮에 인생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날씨가 좋은 낮.
싸늘한 부엌에서, 전철 안에서, 교실에서, 아빠를 따라간 탓에 혼자서만 심심한 책방에서
그런 때,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자애의 발그레한 얼굴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