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세계사
가와기타 미노루 지음, 장미화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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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책 추천은 참 좋다.

추천해 주지 않으면 약간의 학습 성향을 띠는 이런 책은 잘 읽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의 교육에 대해 가장 아쉬움이 남은 건

귀와 입을 막고 이루어졌던 엉터리 영어 교육이요,

그 인과관계를 전혀 떠올리기 어렵게 만드는 연대기적 나열인 국사 교육이다.

 

이 책은 '설탕'이라는 달달하고 친근한 상품을 주인공으로

세계사를 엮어 나간다.

 

뜬금없게만 여겨지던 영국의 산업혁명, 인클로져 운동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 전쟁, 프랑스와의 7년 전쟁, 보스턴 차 사건, 노예해방운동 등

역사적 사건을 입체감 있게 알 수 있게 한다.

 

차를 들여왔던 동쪽(인도, 중국)과 설탕 플랜테이션 서쪽(카리브해 연안의 남미)에 이르는

세계지도를 선연히 떠올릴 수 있는 매력적인 설명은 인상적이다.

 

살림지식총서 '커피 이야기'와도 그 맥락이 닿는다.

 

'상품'으로 조명해 보는 역사...

 

'남북 문제'

세계의 어느 한 쪽은 기아로 죽어가며

다른 한 쪽은 비만을 죄악시하며 다이어트 신화에 집착하는 것. 

어느 한 쪽의 아이들은 축구공, 축구화를 만드는 노동에 시달리나, 그것을 가지고 놀지는 못하며

카카오콩은 채취하나 그것이 자신들의 한달치 식량값에 버금가는 한 조각 초콜릿으로 만들어진다는 건

알지조차 못하는 것.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애플의 아이패드를 현지 생산하는 중국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애플 본부 직원의 몫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비율이라고 한다.

 

극심한 착취로 이루어지는 불균형.

 

'모든 역사학은 현대사다'

'설탕이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

 

아프리카, 남미가 가난한 것은 그들의 국민성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선진국의 주장은 무섭다.

강토 모두를사탕수수밭 천지로 만들어 버리는 폭력성.

모노컬처로 미래의 성장잠재력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

 

한비자가 말했듯, 사람은 도덕이나 의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노예해방운동을 들여다보아도 그 추동력을 인간애나 윤리의식에서 찾기는 어렵다.

 

로맨틱하게만 생각했던 영국식 아침식사(English breakfast)와 오후의 티타임(Tea Break)

이면에는 유럽인들에게 사냥되어 고향 아프리카와 엄마 품을 떠나 대서양 너머 카리브해 플렌테이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했던 흑인 노예의 비참한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럼주로, 흑인 영가로 달래어졌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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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책이다 -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들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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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영화 평론을 분명 몇번인가는 읽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해 그리도 멋지게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질투나 경외감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면, 얼마나 영화에 시간을 투자하면

그런 글이 나올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 이면에는 책에 관한 한 쇼핑중독자임을 자인하며

이제껏 만권의 책을 사들인, 책에 미친 사람이 있었던 거다.

만권이라니... 상상할 수 없는 숫자다.

 

결국 그 답은 또 '책'이다.

한 꼭지의 글에는 그 사람이 읽은 책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책날개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고 싶다'

 

한 문장만 보면 알 수 있다.

나와 동류인지...

이어질 문장에 대한 예감 같은 것.

 

빨간 안경을 선택한 것도 맘에 든다.

지금은 안경을 벗었지만, 안경 끼던 시절 내가 제일 좋아하던 색깔도

와인색, 아님 빨강색이었다.

이동진만큼 과감하지 못하고 끌리는 거와는 반대로

항상 무난한 갈색을 선택했었지만...

'Why not'

 

책날개를 읽고

책 마지막 부분의 인용도서목록을 복사하고

본격적으로 책읽기.

 

과학, 언어학, 문화사 , 통계학 등 다양한 책을 섭렵하지만

그 속에서 꼭 인문학적 통찰을 이끌어 내는 점이 좋다.

예를 들어 별이 빛나는 원리를 인용하면서

화려하게 빛나 보이는 삶도 알고 보면

소진되는 자멸의 과정이라는 것.

 

글쓰기와 사유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힘이

다양한 책읽기에 있구나...

 

라디오 DJ답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 준다.

'책 읽어주는 남자' 나의 로망 ㅋㅋ

 

나도 밤의 책읽기를 가장 사랑한다.

돈을 벌고 밥을 먹는 이유이기도. ㅋㅋ

비록 이동진처럼 야행성은 아니지만...

 

밤의 아이, 낮의 어른

밤의 개인적 자아, 낮의 사회적 자아 

직장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가 다른 건

내가 이중인격이어서가 아니다.

 

밤은 오롯이 나의 내면을 위한 시간...

 

 

변화의 순간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데, 말하자면 제게 그 의식은 빨간테

안경을 사는 일이었던 셈이지요. 삶에서 변화란 원래 그렇게 아주 작은 것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찾아오는게 아닐까요.

 

그래서 미국의 사상가 랠프 애머슨은 '명성과 휴식은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없다'고 했던

것이겠지요. 그러니 다시 한번, 업적 대신 일상이 있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요.

 

결과적으로 '무진기행'을 옮겨 적는 일은 그 시절 제게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일종의 발판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몇 차례에 걸쳐 이 소설을 필사하곤

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나날들을 통과할 때였지요.

 

독일어로 된 심리학 용어 중에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어로 '피해'를 뜻하는

단어와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가 결합된 이 용어는 번역하자면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감정을 일컫지요. 타인에게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남모르게 안도를 느끼고,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내게 일어나지 않은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월감을 느낀다고 할까요.

 

떨어져서 보면 무척이나 화려해 보이는 삶이라도,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 휘황함이 사실은

격렬한 에너지 소모와 붕괴의 흔적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빛은 결코 행복의 증거가

아닙니다.

 

결국 가장 진부하고 가장 상투적인 표현도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가장 신선하고 가장

효과적인 표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넌더리가 나도록 지겨워진 일도, 닳고 닳은 행동과

뻔한 습관으로만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사랑도, 그 시작은 두근거림이었겠지요.

 

순수함에 대한 강조는 종종 순수하지 않습니다. 순수는 분명 고귀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순수에의

확신과 순수로의 강요는 위험합니다. 일체의 뒤섞임이나 소통을 거부한 채 순도 100퍼센트를

지향하는 근본주의적 태도에는 항상 불길한 그림자가 일렁입니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진퇴양난의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해 볼 필요을 느끼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와 준엄한

눈빛으로 거듭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관전하며 비판의 과도한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구경꾼의 윤리는 또 어떨까요. 과연 누가 진짜 독수리일까요.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도 그게 단 하나의 덕목으로 추앙되거나 반드시 지켜내야 할 기준으로

강제될 때, 가치는 쉽사리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가치의 순도나

강도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가치들 사이의 균형과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종종 저는 제 책에 사인을 부탁하시는 분들께 '꿈보다 연민'이란 글귀를 함께 적어 드리곤

합니다. 연민보다 더 소중한 감정을, 저는 알지 못하니까요.

 

여행이나 산책이 삶에 유익한 것은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없어도 그 자체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쓸쓸히 인정한 뒤에도,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에 작은 탄성을 터뜨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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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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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아니더라도, 여러 작가들이 추천하는 필독서 '백년의 고독'.

 

라틴아메리카가 물리적, 정서적 배경이다.

나른한 더위와 낮잠. 끊임없이 공격하는 벌레들

그 먼 곳의 냄새를 상상하며 책장을 넘긴다.

 

길가메쉬, 오디세우스, 불멸의 연금술, 그리스 로마신화,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컴플렉스, 성경, 아라비안나이트 등

다양한 문학적 층위를 품고 있는 소설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백년 동안의 흥망의 기록.

호세 아르까디오와 우르술라는 아담과 하와.

마꼰도는 에덴 동산.

 

원시적이고, 자원이 풍부하고, 죽음을 모르던 마꼰도 에덴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카톨릭, 제국주의의 바나나 공장들이 들어서며 점점 변질되고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역시 식과 색에의 탐닉, 가문의 문장처럼 새겨진 고독의 힘에 의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책의 끝에 가 보면 허무하고, 씁쓸하고, 무력하게도

부엔디아 가문의 영욕은 집시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이미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는 묵시론적, 결정론적 운명의 행로다.

 

'가문의 첫사람은 나무에 묶여 사라지고, 가문의 마지막 사람은 개미밥이 된다'

 

6대에 걸친 여러 인물들의 성정, 삶은 당연하게도 각기 달라 개별성을 잃지 않으나

그것을 관통하는 섬뜩한 반복성은 책을 읽는 내내 전율을 일으킨다.

 

고독을 타고나든, 아니든 삶의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나 고독해지고

고독 속에서 홀로 죽는다.

 

고독의 양태들...

 

황금을 녹여 황금물고기를 만들고, 그걸 판 금화를 녹여 다시 황금물고기를 만드는, 사랑할 줄 모르는 부엔디아 대령

자신의 수의를 가장 정성들여 짰다가, 다시 풀고, 다시 짜는, 사랑을 한평생 거부한 아마란따.

노령으로 시력을 잃었으나 오히려 모든 걸 잘 볼 수 있게 된 우르술라

가장 아름다웠으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홀로 죽어간 페르난타

 

이름짓기로 운명 지어지는 것.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의 사내는 몸집이 크고, 모험을 좋아하며, 육체적이다.

아우렐리아노라고 이름붙인 아들들은 명민하고, 어둡고, 우울하며, 사색적이다.

 

그리고 마술적 리얼리즘

총살당한 아르까디오의 피가 어머니 우르술라에게로 가는 장면.

아우렐리아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는 곳마다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곳곳에 초현실적인 문장과 표현들이 있으나, 그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황당하지 않고

아름답게 소설의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 또한 책을 읽는 내내 감탄스러웠다.

 

사촌과 결혼한 우르술라는 돼지꼬리를 단 아이를 낳는 근친상간의 저주가 두려워

후손에게 늘 경고했으나, 가문을 관통하는 근친상간에의 끝없는 이끌림은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

 

가문 전체를 통틀어 사랑으로 아이를 낳는 첫 연인은 이모와 조카 사이로

열정적이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을 거부하지 못하고

돼지꼬리를 단 아이를 낳았으며, 그 어미는 하혈로,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개미밥으로,

그 아비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를 해독하며 그 방에 갇힌 채로 가문의 종말을 예고한다.

 

죽음의 양태들도 각기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장 소중한 추억을 현재인 양 떠올리며 죽음을 맞는다.

출생의 풋풋함과 순수함은 성애와 권력욕 등으로 퇴색되는데, 이 모든 게 계속 반복된다.

 

'시간은 둥그렇게 돈다'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 또한 있어 참으로 둔중한 무게감의 책읽기였다.

가격으로 따지면 ㅋㅋㅋ

백만원? 훗~

작가가 23년 동안 구상하고 18개월동안 쓴 책...

 

그만큼 정신의 소모량도 엄청나 이제 한숨 고르고

미경이가 빌려준 '해를 품은 달'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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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전미옥.김윤희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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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3장의 사진을 묘사한 서문에서부터 강하게 끌린다.

 

'퇴폐'와 '파멸'에 담긴 미의식.

데카당스, 무뢰파 문학이라 한단다.

 

순수하고 예민한 영혼의 요조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인간 세상을 견디기 위한 가면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성격형은 선천적인 것인가.

 

나도 아주 어릴적부터 우울함과 외로움과 섞여들지 못함

또는 섞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유치원에서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특히 쓸쓸했다.

거짓말이 아닌 게 아직도 그 쓸쓸함의 기억이 와닿으면 가슴 시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까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집에 와서도 이런저런 일을 조잘조잘 엄마한테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런 성격은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불편하다는 걸

학년이 올라갈수록 체득한 것 같다.

 

그렇기에 당연히 나에게도 짐짓 꾸미는 밝음이 태반이다. 

 

결정적으로 친구가 없고

외로움이 온 몸을 감싸는 사람은

'동류'를 금세 알아보기 마련이나,

그와의 관계 역시 파국으로 치닫기 일쑤이다.

 

때문에 밝고 선명한 사람, 대화가 끝없이 찰랑찰랑 이어지는 사람을

나 역시 바라게 된다. 생활 유지를 위한 본능?

그 와중에도 '너는 날 모르겠지' 하고

또 잘난 척을 하겠지...

 

5번의 자살기도, 결국 39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생에 대한 변명.

 

요조의 패배의 기록.

 

상처가 끝없이 그를 공격해

종국엔 방금 보고 나서도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존재로

소멸시켜 버리다.

 

한없이 어두우나

역시 거침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라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弔詞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그 사람은 말로는 '쓸쓸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무언중에 심한 적요감을 몸 외각에

한치의 두께는 될 기류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면 이쪽 몸까지도

그 기류에 휩싸여 내가 가지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울한 기류와 적당히 융합되어,

나의 몸은 공포에서도 불안에서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백치같은 매춘부 품 속에서 안심하고 푹 잠드는 그 느낌과는 아주 딴판이어서

- 저 창부들은 명랑했지요 -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 기 샤를 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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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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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 여름 휴가, 아침고요수목원 가는 길...

가평의 유명산 구비구비를 돌아야 했다.

왜 터널을 뚫지 않고 이렇게 돌아돌아 가게 만들어 놨나.

끝없이 이어지는 커브길에 어지러웠었다.

(김훈은 이를 산의 맥을 끊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에어컨 빵빵한 차 안에서 이런 푸념이나 늘어 놓는 사이

그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사람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저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미친 것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김훈이 바로 그 미친 사람이었던 거다.

 

자전거를 타고 노령산맥도 넘고, 소백산맥도 넘는다.

자전거와 도보 여행은 그 '직접성'으로 남다른 여행 방법이다.

여행지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여행지를 한껏 안고 돌아올 수 있는 방법...

 

여행기 속 역사 이야기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광주 망월동, 의상대사의 극락정토 부석사, 칼의 탈정치성 이순신 장군,

남한산성의 어찌할 수 없었던 치욕, 퇴계 이황의 마음결,

1801년의 배교에 대해 한평생 침묵했던 다산 정약용...

 

가본 곳들은 다시 아득히 떠올려 보고

가보지 못한 곳들은 김훈의 글을 따라 상상해 본다. 

 

신석기 시대의 바지락 캐던 갯벌,

의상과 선묘의 설화를 떠올리면,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새기고 안으로 숨어 들어간 나이테를 생각하면,

광막한 우주에서 유영하는 듯

이미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현재의 나도 사라진다.

 

광릉수목원의 나무, 꽃 이름을 들으니 또 기분이 좋다.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노랑어리연꽃...

 

달려가는 말의 형상으로 이어져 있는 소백산을 내려다 보는 영주 부석사

일생의 과업을 위해 수없이 넘나 들었던 선비의 한양길 문경새재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경인청에서 행복했던 이유가 아름다운 수원 화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1권은 2000년, 2권은 2004년에 썼음에도

빛 바래지 않았다.

 

빠르게 통독했지만 그렇게 지나치기엔 아까운 문장.

문장이 시간이 되고, 그림이 된다.

두고 온 소중한 그리움인듯 하여 끝내 손에서 놓기 아쉽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함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400년 후에 자전거를 타고 온 한 후인의 눈에 이 정자들과 낙원의 서늘함은 불우하다. 소쇄원, 식영정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정자들도 그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 소쇄원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그 앎의 힘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한다. 내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철새들이 태양의 기울기나 지구의 자장을 몸으로 감지해 가며 원양을 건너갈 때 철새는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알지 못해도 천체가 보내 주는 신호에 따라 방향을 가늠할 것인데, 인간의 몸에는 그 같은 축복이 없다.

그래서 선박을 움직여 대양을 건너가는 항해사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만 목적지 항구에 닿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나'의 위치는 물 위에서 항상 떠돌며 변하는 것이어서 항해사의 질문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 지나간 모든 위치는 무효인 것이다. 바다 위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미래의 시간과 함께 인간의 앞으로 다가온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호가 가장 아름답다. 신호는 나 자신을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자의 슬픈 울음과도 같다. 그 신호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의 상대성을 긍정할 때, 선박은 대양을 건너가고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고 자전거는 산맥을 넘어온다.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노랑어리연꽃이 열릴 때 여름의 연못은 찬란하다. 수련의 집안에서 노랑어리연꽃은 작은 꽃에 속하는데 그 꽃의 열림은 얌전하고도 영롱하다. 열려진 꽃 속에 여름의 빛이 들끓고, 그 들끓는 속은 맹렬하게 고요해서 꽃의 열림은 더욱 혼곤한 잠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련의 잠과 수련의 깨어남은 시간에 복종하는 꽃의 리듬일 뿐, 잠도 깨어남도 아닐 것이었다. 어리연꽃의 노랑색은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남한산성의 서문은 처연하다. 산성 내의 수많은 문루와 옹성과 전각들 중에서 서문은 가장 비통하고 무참하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는 모양이다. 모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결국 받아들여진다. 삶으로부터 치욕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겨누며 목통을 조일 때 삶이 치욕이고 죽음이 광휘인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보다도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 모양이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정의로운 것이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서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 대한 달레의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처럼 무자비하다. 그는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등을 모두 배교자로 규정했고 그들의 죽음을 순교에서 제외시켰다. 그들의 죽음에는 순교와 배교가 겹쳐져 있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기보다도, 순교와 배교, 순결과 치욕이 겹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더 두렵다.

 

이치와 현상에 대한 미혹이 '번뇌도'이고, '번뇌'가 가져오는 그릇된 언행과 생각이 '업도'이며, '업도'의 과오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 '고도(苦道)'이다. 미망과 고통은 서로 손짓해 부르고, 부르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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