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작년 여름 휴가, 아침고요수목원 가는 길...

가평의 유명산 구비구비를 돌아야 했다.

왜 터널을 뚫지 않고 이렇게 돌아돌아 가게 만들어 놨나.

끝없이 이어지는 커브길에 어지러웠었다.

(김훈은 이를 산의 맥을 끊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에어컨 빵빵한 차 안에서 이런 푸념이나 늘어 놓는 사이

그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사람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저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미친 것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김훈이 바로 그 미친 사람이었던 거다.

 

자전거를 타고 노령산맥도 넘고, 소백산맥도 넘는다.

자전거와 도보 여행은 그 '직접성'으로 남다른 여행 방법이다.

여행지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여행지를 한껏 안고 돌아올 수 있는 방법...

 

여행기 속 역사 이야기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광주 망월동, 의상대사의 극락정토 부석사, 칼의 탈정치성 이순신 장군,

남한산성의 어찌할 수 없었던 치욕, 퇴계 이황의 마음결,

1801년의 배교에 대해 한평생 침묵했던 다산 정약용...

 

가본 곳들은 다시 아득히 떠올려 보고

가보지 못한 곳들은 김훈의 글을 따라 상상해 본다. 

 

신석기 시대의 바지락 캐던 갯벌,

의상과 선묘의 설화를 떠올리면,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새기고 안으로 숨어 들어간 나이테를 생각하면,

광막한 우주에서 유영하는 듯

이미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현재의 나도 사라진다.

 

광릉수목원의 나무, 꽃 이름을 들으니 또 기분이 좋다.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노랑어리연꽃...

 

달려가는 말의 형상으로 이어져 있는 소백산을 내려다 보는 영주 부석사

일생의 과업을 위해 수없이 넘나 들었던 선비의 한양길 문경새재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경인청에서 행복했던 이유가 아름다운 수원 화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1권은 2000년, 2권은 2004년에 썼음에도

빛 바래지 않았다.

 

빠르게 통독했지만 그렇게 지나치기엔 아까운 문장.

문장이 시간이 되고, 그림이 된다.

두고 온 소중한 그리움인듯 하여 끝내 손에서 놓기 아쉽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함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400년 후에 자전거를 타고 온 한 후인의 눈에 이 정자들과 낙원의 서늘함은 불우하다. 소쇄원, 식영정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정자들도 그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 소쇄원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그 앎의 힘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한다. 내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철새들이 태양의 기울기나 지구의 자장을 몸으로 감지해 가며 원양을 건너갈 때 철새는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알지 못해도 천체가 보내 주는 신호에 따라 방향을 가늠할 것인데, 인간의 몸에는 그 같은 축복이 없다.

그래서 선박을 움직여 대양을 건너가는 항해사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만 목적지 항구에 닿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나'의 위치는 물 위에서 항상 떠돌며 변하는 것이어서 항해사의 질문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 지나간 모든 위치는 무효인 것이다. 바다 위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미래의 시간과 함께 인간의 앞으로 다가온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호가 가장 아름답다. 신호는 나 자신을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자의 슬픈 울음과도 같다. 그 신호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의 상대성을 긍정할 때, 선박은 대양을 건너가고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고 자전거는 산맥을 넘어온다.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노랑어리연꽃이 열릴 때 여름의 연못은 찬란하다. 수련의 집안에서 노랑어리연꽃은 작은 꽃에 속하는데 그 꽃의 열림은 얌전하고도 영롱하다. 열려진 꽃 속에 여름의 빛이 들끓고, 그 들끓는 속은 맹렬하게 고요해서 꽃의 열림은 더욱 혼곤한 잠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련의 잠과 수련의 깨어남은 시간에 복종하는 꽃의 리듬일 뿐, 잠도 깨어남도 아닐 것이었다. 어리연꽃의 노랑색은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남한산성의 서문은 처연하다. 산성 내의 수많은 문루와 옹성과 전각들 중에서 서문은 가장 비통하고 무참하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는 모양이다. 모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결국 받아들여진다. 삶으로부터 치욕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겨누며 목통을 조일 때 삶이 치욕이고 죽음이 광휘인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보다도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 모양이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정의로운 것이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서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 대한 달레의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처럼 무자비하다. 그는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등을 모두 배교자로 규정했고 그들의 죽음을 순교에서 제외시켰다. 그들의 죽음에는 순교와 배교가 겹쳐져 있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기보다도, 순교와 배교, 순결과 치욕이 겹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더 두렵다.

 

이치와 현상에 대한 미혹이 '번뇌도'이고, '번뇌'가 가져오는 그릇된 언행과 생각이 '업도'이며, '업도'의 과오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 '고도(苦道)'이다. 미망과 고통은 서로 손짓해 부르고, 부르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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