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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당신 자신이기를 멈추어라
'빵 굽는 타자기', '뉴욕3부작'에 이어 만나는 세번째 폴 오스터.
계장님이 빌려준 책인데, 빌려 준 사람의 말대로 앞의 두 책보다 더 쉽게 읽히고 재미있다.
원제는 'Mr Vertigo'
첫 문장이 '나는 열두살 때 물 위를 처음 걸었다'이다.
물 위를 걷다니. 예수도 아니고...
이건 내 취향이 아니다 싶다. 황당무계...
그렇지만 초반에 꾹 참고 읽다보면 나중엔 괜찮은 경우가
소설 읽기에서 비일비재하므로 책장을 계속 넘긴다.
폴 오스터는 젊은 날 스스로가 '사서 고생'을 한 작가이므로
소설 속 인생도 파란만장 부침을 거듭한다.
공중을 걷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천연덕스러움
그러나 중요한 건 부양을 했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가슴을 울리는 건 공중부양술을 가르쳐 준 예후디 사부와 주인공의 '사랑'이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겠지만, 그건 사제간의 사랑이기도 하고 부자간의 사랑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증오로 시작되었으나 어느 순간 그를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
혈연을 뛰어넘어 몸과 마음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랑
예후디 사부와 날기 위한 고통의 훈련을 함께 했던 공존의 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그를 떠나 보낸 뒤 사무치게 깨닫고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이별하는 것
책 한 권으로 인생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인생은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 것...
내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
in book
그래서 나는 그가 나를 묻도록 했다.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 일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지독해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땅 속에 묻혀 하루를 보내고 나면 세상이 다시는 전과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아름다워지기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덧없고 비현실적인 빛에 잠겨 있어서 어떤 현실감도 주지 못한다. 또 비록 늘 그랬듯 현실을 보고 만지더라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것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우리는 곧 그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채 열흘도 안 되어 우리가 잘 먹어여야 한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고, 그달이 끝나 갈 무렵에는 식량이 부족했던 날들을 기억조차도 하기 어려웠다. 결핍에 대해서는 그런 법이다. 뭔가가 부족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갈망하면서 속으로 <만일 그걸 가질 수만 있다면 내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될 거야>라는 말을 하지만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갈망하는 물건이 손에 들어오고 나면, 그것은 매력을 잃기 시작한다. 다른 욕망들이 고개를 들고, 다른 부족한 것들이 느껴지고, 우리는 어느 새엔가 조금씩 조금씩 원위치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그걸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우리보다 더 강해. 그게 세상 이치다. 우리는 한동안 이겼고 이제는 졌어. 그걸로 됐다.
내심으로 나는 몸을 띄워 올려 공중에서 떠다니는 데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건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내면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집중만 한다면 누구라도 내가 원더보이 윌트로서 달성했던 것과 똑같은 위업을 다시 이루어 낼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당신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을 증발시켜야 한다. 근육에서 힘을 빼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 다음, 눈을 감아 보라. 그것이 요령이다. 그러면 당신 몸 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팔을 펼치고, 당신 자신을 증발시켜 보라.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땅 위로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