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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양장)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다윗하면 우리는 골리앗을 물리친 목동과 밧세바와 동침하는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는 왕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실 이 두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골리앗을 물리치는 시골 양치기가 영웅이 되는 드라마와 간음, 살인, 거짓말로 이루어진 불륜 드라마. 이 두 드라마틱 한 이야기로 우리는 다윗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인생의 단편을 알고 있을 뿐 다윗의 삶 전체를 조명하며 묵상하는 기회는 많지 않다. 다윗의 인생 전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유진 피터슨의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삶>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대단한 왕이었다는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다윗의 삶에는 단 한번도 기적이 없었던 그의 삶의 격동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떻게 현실 조건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지 알 수 있었고, 그 깨달음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오늘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교훈을 주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인물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이상형이고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다라는 태도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아주 작은 일상까지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도 영성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다윗이 시작은 정말 대단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다윗은 목자였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의 일은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왕업이 된다. 저자는 “본디 모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주권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요 거기에 참여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단지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거룩하다는 주장이라기 보다 우리가 생업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함 안에 거해야 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일이 왕업이라는 소식은 직업적 복음, 정말 기쁜 소식이다.
또 재미 있는 발견이 하나 있다. 저자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러 갈 때 사울이 입으라고 했던 갑옷에 대해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고 말한 점을 지적한다. 전투하면 사울이 전문가이니 그의 조언을 따라야 하지만 다윗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의 권위보다 전문가의 권위를 따르는 실수를 한다. 특히 자녀 교육이나 의료적인 문제에서 더 그런 것 같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받은 교훈을 온전히 적용하며 아이를 키우지 못하면서, 좀 더 다양한 정보를 얻으려고 설명회나 교육 실용서를 너무 많이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전문가의 조언대로 갑옷을 입지 않고 물멧돌을 집은 다윗의 경우처럼 아이를 짓누르는 교육의 갑옷을 벗게 해주어야겠다고 다짐 했다.
로마서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진정으로 명료하게 깨달았다. 늘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말에 익숙했지만 개인적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 속에서의 의미로서 복음과 하나님의 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마태복음을 20장을 묵상하면서 본 포도원 주인의 비유도 함께 떠올랐다. 아침부터 일한 일꾼과 저녁 늦게 온 일꾼에게 똑같이 품삯을 주시는 주인을 보면서 세상의 합리적인 경제논리를 넘는 은혜의 원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가 다윗의 생애에서도 발견되는데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에피소드를 저자는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무자비한 사울왕에 쫓겨 광야생활 하고 있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 군대가 형성된다.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이 그들의 기지였던 시글락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사이 아말렉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마을이 초토화 된다. 약탈자를 추적하기 위해 군인들은 공격에 나섰으나 블레셋과의 전투로 너무나 지친 상태여서 정말 출전 할 수 없는 200명은 브솔 시냇가에 남겨진다. 아말렉 병사들이 버린 어린 소년의 도움으로 작전에 성공하고 돌아온 400명의 군인들은 시냇가에 남아있던 200명의 군인들과 전리품을 나누자는데 반발한다. 전리품 단 한 개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공정한 분배’를 요구한 주동자들을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삼상 30:22)라고 부르고 있다. 공정한 분배를 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그야말로 변두리 인생을 살다가 다윗을 만나 구원받아 시글락까지 온 사람들이 아닌가.
공정한 분배를 요청하는 군인처럼 우리도 그런 함정이 빠질 때가 많다. 인생을 마구 살다가 혹은 범죄자로 살다가 복음을 알게 된 사람들보다 모태적부터 교회에 다녔던 내가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묵상을 아침마다 하는 내가 다른 교인들보다 더 믿음이 좋지 않을까 하는 우월감, 부모님이 기도 많이 해주셨으니 그 기도발(?)이 좀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 우리는 공로 없이 받은 구원의 소식, 이 한없는 주님의 관대함을 공정한 분배라는 세상의 논리로 흐리고 있지는 않은지, 공정한 분배의 논리가 피곤한 생업을 왕업으로 바꾸는데 방해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돌아본다. 은혜로 주님을 알게 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며, 거기에 보너스로 공동체를 통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실을 살아가야 할지 알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 드린다. 이 감사는 입으로는 잘 안되지만 마음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내면의 휘파람을 불며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