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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엔 영원한 사랑도 없고 결혼은 미친 짓이 되었으며, 위세를 떨치며 인간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공산주의도 무너지고, 그래도 믿을 만 했던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논리도 이제는 답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일체의 신뢰의 대상을 잃어버린 지경이 되었다. 가족, 공동체, 학문, 애국심, 이타주의 등 사람들이 가치를 두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희화되거나 진부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오직 맹위를 떨치는 것은 돈을 벌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이 부러워하는 신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기심만이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유가 되었다. 이 이기심에 잘 부응하는 것이 짝퉁들이다. 명품은 곧 신분의 의미하므로 값싸게 신분상승을 도모하는 이 싸구려 제조업이 성업 중이다.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의 자세나 진리를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며 이타적으로 살려고 하는 노력은 결코 전근대적이거나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인의 노력이 다만 무력해져 있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기애와 이기주의를 억제하고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임을 깨닫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왜 이렇게 날로 괴이해 지는지 그 이유에 대해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비관적인 세계관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이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공익광고를 무심코 보며 여태 살아온 까닭일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성숙은 사회 정의의 실현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곰곰 곱씹으며 새로운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예수님이 영혼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지 모든 사람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란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일 수 없는 것처럼 모두 영적일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는 승리한 사랑을 의미하지만,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왕권을 잡는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개인이 아무리 이타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그 이타심을 집단에서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니버는 자신의 저작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 사람은 좋은데 한국은 싫다’는 식의 논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가장 극심한 집단 이기심은 국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애국심도 결국 변형된 이기심, 영웅화된 이기심이라고 니버는 말한다. 국가 이기주의는 국제회의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로 인해 외교관들은 세계 기후변화를 안건으로 회의를 하지만, 그들은 인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전쟁터의 용사들일 뿐이다.
개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자기 부정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개인이 모인 집단 사회에서는 결코 이러한 이타심이 용납되지 않으며 구성원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불완전한 지상에서의 삶의 조건이다. 이 양립할 수 없는 개인과 사회의 도덕에 대해 니버는 솔직하게 둘을 화합하기 보다는 이원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세상을 모든 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왜 선구자적인 위대한 인물이 있음에도 사회는 계속 경쟁을 위한 경쟁을 하며 미친 듯이 돌아가는지는 이유는 인간사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비도덕적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니버의 긴 논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려는 것이 이타심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더 나은 삶을 포기하라는 메시지는 아닌 것 같다. 유토피아적 사회 개혁이나 이상 실현이라는 만용을 버리고 오히려 오늘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사랑과 무한한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기 부정을 이끌어내실천적 용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