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주변국 지식인이 쓴 反중국역사
양하이잉 지음, 우상규 옮김 / 살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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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중화주의로 상징되는 한족과 중원 중심의 중국사는 5천년 전 황허문명에서 시작된 이어져 지금 중국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며 현재 중국정부의 입장이라고 알고 있다.  

책은 일반적인 중국사에 맞선다. 사실 동아시아 문명의 시작은 황허 뿐만 아니라 내몽골과 양쯔강 유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중국문명에서 유목민족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오히려 한족의 역할은 적었다고 한다. 원이나 청 같은 이민족이 세운 제국 뿐만 아니라 최고의 중화제국이라 일컫는 당 역시 선비 계열의 민족이 건국했다는 것이 근거이다.  

예전에 읽었던 '열린 제국, 중국'이 생각난다. 발레리 한센은 여러 국가로 난립한 격변기에 오히려 외부의 활력을 수혈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제목의 '열린 제국'에서 보다시피 중원은 여러 민족이 교차되는 장소이었음을 말하며 폐쇄된 제국이라는 이미지라는 기존 선입견을 깨뜨리려 했다.  

그러나 책의 몇몇 용어 선택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작가는 굳이 '중국' 대신 '지나'를 꿋꿋이 사용하고 있다. 작가가 거주하고 있는 일본에서 '지나'는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마치 한국인을 칭할 때 칸코쿠 대신에 조센징을 고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한 단락을 할애해 굳이 지나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설득력있지는 않다. 다른 많은 부분에서 중국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중국 국적으로 태어났지만 내몽골 출신의 몽골족이다. 베이징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다 일본으로 유학와서 그대로 눌러앉았다. 뒤바뀐 정체성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재 일당독재의 중국체제와 문화대혁명의 무차별적인 파괴를  비난하는 대목을 보면 대강 짐작된다.  
  
작가의 논리는 일반 대중인 내가 보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과거의 중국과 공산주의로 통치되는 현대 중국을 동일시하면서 현대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논한다. 또한 유목 제국에 대한 연구는 르네 그루세를 필두를 한 서구에서 대단히 활발하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작가가 인용하는 출처는 대부분 일본인 학자들 것이다. 더구나 그들 태반이 20세기 초의 제국주의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흥미로운 접근으로 시작되지만 결과적으로 학자라는 타이틀에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는 책이다. 날로 위축되는 국력으로 불안해하는 일본 내부의 심리에 기대어 현지에서는 잘 팔릴만 하다. 하지만 굳이 국내에 번역했어야만 했을까. 특정 국가에 대한 반감과 학문적인 접근은 분리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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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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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시체를 묻으면 되살아나오는 신비로운 장소가 있다. 그곳에서 딸이 아끼는 고양이가 돌아온 것을 확인했던 주인공은 어린 아들이 사고로 죽자 고민에 빠진다. 돌아온 고양이가 고양이의 모습을 한 기분 나쁜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 알지만, 슬픔으로 이성이 마비된 아버지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다.  

황당하지만 스티븐 킹 월드의 메인 주는 원래 그런 곳이다. 더구나 그 속에서 인물들이 시달리는 시험들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늘 그렇듯 가족이 된 고양이를 몸 위에 두고 책을 읽었다. 손길에 가르랑거리는 고양이를 보며 문득 우리 미래를 떠올려보았다. 녀석이 수명이 다되어 내 곁을 떠날 때도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종의 차이가 이렇게 야속할 수가. 하물며 더한 유대감으로 밀착된 부모와 자식은 어떠할까. 내가 만약 소설 속의 시험에 든다면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할지 확언할 수 없다.  

소설은 비극으로 맺는다. 작품마다 분명한 도덕적 선을 그어놓고 선을 넘으면 가차없이 벌을 줬던 작가 지론에 걸맞다. 하지만 죽음을 맞는 그들을 두고 감히 자업자득이라고 평할 수 있을까. 소설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나 역시 내면 한구석의 나약함을 인지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악은 인간의 나약함에 기초한다. 외부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파고들고 내 안의 무엇이 호응해가며 몰락해가는 스티븐 킹의 스토리는 본작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사춘기 이후에 오랜만에 집어든 스티븐 킹의 소설이 주는 감흥은 사뭇 다르다. 글은 그대로되 그동안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일테다. 클라이막스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단계에서 드러나는 작가적 역량은 1983년의 초기작에도 여전했음을 깨닫는다. 생과 죽음에 관한 글은 특유의 설득력 높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새삼스럽지만 스티븐 킹은 정말 대단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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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버지 - 아버지의 시대, 아들의 유년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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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버지'는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실상 작가의 회고록이다. 1942년에 태어난 작가는 다사다난했던 한반도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식민지의 끝자락에서 해방 직후에 이념 갈등에서 비롯된 혼란으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작품의 테마가 되는 작가의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좌익에 투신한 지식인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고 혁명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신념은 찬란하나, 서슬퍼런 세상에서 딸린 식구들의 고생은 가히 말할 수 없었다. 굶주림 정도가 아니었다. 사선을 수없이 넘나들었고, 아버지가 월북한 뒤 작가의 가족들은 살아남아 회상할 여유를 이제야 가질 수 있었다.  

심각한 내용임에도 긴긴 이야기를 뭣에 홀린듯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작가가 어린 아이였을 적 눈으로 바라보았던 김해군 진영읍의 산하는, 나 역시 진영읍에서 살았으므로 반갑고 생생하게 나의 머릿 속에서 펼쳐졌다. 또한 책 속의 그들이 나누는 동남방언들은 정겹고 따스했다. 삶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하는 작가의 진영은 나에게도 뭉클한 장소였고 기억이었음을 깨달았다.  

작가의 아버지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열정에 반비례해 가정에 소홀했다. 때문에 책에서 그려진 아버지는 10살 이전에 국한된 흐릿한 기억들과 가족들의 증언 혹은 작가적 상상력에 기반해 있다. 이러한 결과물은 경이롭다. 아이의 눈으로 당시에 이해되지 않았던 아버지의 비합리적이고 불가해한 삶의 흐름이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은 문학이라는 도구 덕분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힘이기도 하다. 작가는 당시 아버지보다 곱절의 나이가 된 70에 책을 썼다. 아버지를 향한 애증과 현대사의 거대담론은 빛바래있다.  

작가의 회고에 건방지게 비교나 평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통과한 어르신의 솜씨좋게 구성진 이야기에 말없이 푹 젖어들었을 뿐이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나지막히 한 마디를 건네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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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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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은 전 남편 에드워드에게서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평가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20년 만에 받은 연락치고는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녹터널 애니멀즈'라는 제목이 달린 에드워드의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별장으로 향하던 인적드문 길에서 마주친 무뢰한들에게 토니는 아내와 딸을 납치당한다. 다음날에 아내와 딸은 강간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토니는 무력감 속에서 손상당한 남성성을 회복하려 범인들을 찾아나선다.  

샘 페킨파의 영화에 등장하곤 했던, 빈약한 남성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토니는 글을 읽는 수잔의 회상과 맞물려 그저 허구의 일부가 아님이 밝혀진다. 수잔과 에드워드의 이혼은 수잔의 불륜에 의한 것이었다. 작가를 지망하지만 재능의 한계가 분명해보였던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속물적인 수잔의 불안은 이웃의 유부남과의 섹스로 이어졌다.  

토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과 수잔의 회상이 교차되며 전진하는 '토니와 수잔'에는 절묘한 구도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방향을 달리하면 새롭게 보이는 구도들은 날것 혹은 은유들로 보이면서 독자들로 무궁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해석의 여지가 많고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수잔이 에드워드의 글을 읽으며 삶이 변질되는 과정을 언급한다. 나는 반대로 창작자인 에드워드에 주목했다. 오쟁이 진 에드워드의 심정은 수잔의 입장에서 묘사되는 소설에서 직접 알 수는 없다. 다만 '녹터널 애니멀즈'의 토니의 심리로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아내와 딸을 몸싸움 한번 없이 빼앗기고도 격분할 수 없는 토니의 무력함과 위선은 20년 전의 에드워드의 바로 그것이었다.  

과거의 아픔이 예술로 승화되는 에드워드를 보며 창작의 고통을 떠올린다. 어쩌면 20년 만의 연락은 당시의 분노가 글로 숙성되기까지의 세월을 의미하는 바일 수도. 그렇다면 과연 은유의 실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잔에게 글을 보낸 에드워드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도 본 소설의 재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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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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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에는 3인의 화자가 있다. 각기 단락을 맡은 그들은 이상의 시와 일생과 닿는다. 죽은 직후에 남겼다던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둘러싸고 불륜에 휩싸인 기자와 어릴 적 이상과 만남 이후 일생을 이상 따라하기에 몸 바친 노인과 한국현대문학 연구로 한국에 온 동양계 미국인은 자신의 삶을 이상과 연관시키기 시작한다.  

본 책은 사실상 이상의 전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 그에 대해 알던 것이라곤 교과서에서 배운 시의 괴상한 인상과 일제시대에 요절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이상의 문학세계에서 따온 듯한, 화자의 심리에 따라 등장하는 파편화된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본래 김해경이었던 이상은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라는 출세길에서 이탈해 떠돌다 익히 알려진 괴상한 시를 남겼다.  

소설은 김해경이 아니라 이상이었던 그의 인생 최후반기를 조명한다. 소설 속에서 문학계에 몸담은 인물들이 '업계 용어'로 범벅된 이상의 시에 대한 해석들은 머리 아프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상의 내면의 중요한 화두는 김해경과 이상의 대립이었다는 거다. 단순히 출세지향과 문학으로의 길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둘은 양립할 수 있다. 모든 예술가들은 밥벌이로서의 예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절충할지에 대한 것 역시 모든 예술가의 고민이다. 작가 역시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테다. 고집스럽게 자신을 길을 가야할지, 어느정도 시류에 영합할지. 또한 더이상 새로운 스토리가 보이지 않을 때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파괴적 자괴감과 유혹들.  

앞서 읽은 김연수의 책들처럼, 매력적인 문장과 구성에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면 의미심장하게 끼워진 특정부분이 실마리를 준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끝머리에 붙여진 작가의 말이 인상깊었다. 대문호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읽으며 꿈을 꿨고, 지금은 꿈에서 읽은 그들의 책을 쓰고 있다는 작가의 고백은 묘하게 감동적이다. 겸손하면서도 문학적 이상을 지향하는 욕구를 근사하게 내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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