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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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수십 년의 간격을 둔 3개의 장으로 이뤄진 소설이다. 제각기 다른 인물들의 사연이 펼쳐지지만, 과연 실재하는지 의심스러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거론되며 그들이 모두 그곳에서 유래했고 돌아갈 것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얀 마텔의 다른 장편소설 '파이 이야기'에서 목격한 바대로 환상과 실재를 섞어내며 전진하는 작가의 솜씨는 여기에서도 여전하여 손에서 책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3개의 이야기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가족을 포함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은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아픔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세상을 떠나보내는 순간부터 일상에 복귀해서도 그의 빈자리를 두고두고 체감해야 하는 당사자에게 삶은 고통이며 저주이다.  

소설은 그런 상실감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글로 담아낸다. 앞서 말한대로 환상과 실재를 절묘하게 섞는 작가의 장기는 가슴을 찢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다. 2장을 보자. 60년을 같이 산 남편의 사체는 부검대 위에 배가 갈라진 채로 놓여져 있다. 아내는 남편의 배 속으로 들어가 부검의에게 살을 꿰매줄 것을 요구한다. 3장에서는 아내를 잃은 노인이 침팬치와의 묘한 인연으로 캐나다에서 포르투갈의 시골로 흘러온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위에서 500년 전에 멸종한 이베리아 코뿔소를 목격하는 순간 노인은 침팬치의 품에서 숨을 멎는다. 얼마나 강렬하며 절묘한 그림인가. 소설의 많은 부분은 이렇듯 독창적인 구도와 시각적인 장치로 책을 덮고서도 내 머릿속에 끈질기게 남아 은유의 근원을 탐구하게 한다.  

내가 책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왔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엇을까. 내 지난날의 슬픔이 책으로 인해 다시 상기되서였을까. 아니면 상실로 초래된 슬픔을 흔하디 흔한 수사로 위로하려 들지않는 태도가 느껴져서였을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삶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준다. 지구 반대편의 지역색이 잔뜩 묻어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장소가 이렇듯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사실도 곱씹어볼수록 불가사의하다. 나의 남은 인생에서도 회귀할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남아있기를 진심으로 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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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의 역사 - 매일 5억 명의 직장인이 일하러 가면서 겪는 일들
이언 게이틀리 지음, 박중서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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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오랜동안의 방랑을 끝내고 규칙적인 루틴으로 하루를 여는 자신의 아침일과에 대한 묘사로 책의 서두를 연다. 일찍 일어나 셔츠를 다림질하고 자가용에서 기차로 갈어타며 런던의 직장을 향하는 매일의 반복에 작가는 즐거워한다. 나로서는 세상 어디든 사람사는 건 비슷하다고 느끼면서도 출근시간을 즐기는 작가가 다소 놀랍기도 하다.  

집과 직장을 이어주는 길에서의 시간, 통근은 문명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책은 산업혁명이 시작될 때의 영국에서부터 통근의 역사를 되짚어나간다. 지붕이 없는 객차로 런던 인근을 이어주던 원시적인 철도는 시민의 활동범위를 넓혀주었다. 직장과 집의 분리가 가능해지면서 교외의 안락한 주거지구의 출현을 불러왔고, 도시는 확장되어 거대해졌다. 이같은 패턴은 산업혁명이 촉발된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특히 미국은 광대한 영토와 부유함과 특유의 자유로운 사상 덕분에 철도보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되어 현재의 미국적인 라이프스타일이 만들어졌다.  

꼼꼼한 작가는 출퇴근의 역사 뿐만 아니라 운송수단의 발달로 출퇴근을 '당하는' 인간에게도 주목한다. 앞서 말했듯 먹고사니즘에 지친 많은 이들이 작가처럼 출근을 그리 달가워하진 않는다. 자동차로 막히는 흐름 앞에서, 보기싫은 상사와의 대면을 상상 앞에서, 열차 앞으로 뛰어드는 자살자에 대한 기억 앞에서 분노하고 슬퍼하며 길 위에 서있는 이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세계 곳곳의 예시를 들어가며 학구적으로 파고드려 한다.  

하지만 본 책은 제목이 주는 이끌림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직장으로 향하고 집으로 향하는 반복적인 행동이 우리 일상에서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답을 너무 철학적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책의 내용은 운송수단의 발달과 도시의 확장의 연관관계에 가깝다. 오히려 내가 찾는 출퇴근의 본질은 예전에 읽었던 로알드 달의 글에 담겨있었던 것 같다. 통근열차에서 어릴적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과의 만남으로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며 전전긍긍하던 소시민의 심리를 그렸던 단편소설 말이다. 

즉흥적이고 모호한 소재가 키워드가 된 잡학책이 가진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재치있고 풍부한 묘사가 곁들어진 작가의 문장에도 불구하고 통찰과 일관된 주장이 결여된 글의 나열은 지루하기 그지없다. 마치 동일한 주제로 연재되는 칼럼을 퇴고없이 이어붙인 책을 읽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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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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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메블루트는 사촌의 결혼식에서 한 소녀에 반한다. 사촌의 배우자의 여동생이었던 소녀의 눈동자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결심한다. 둘은 곧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군대에 다녀오고 결혼할 여건이 되기까지 3년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상하지만 결혼식에서의 소녀의 눈은 남자에게 평생 아로새겨졌고, 그것이 1968년의 사랑이었다.  

상대 집안의 반대를 우려한 가난한 메블루트는 사촌의 도움을 받아 사랑을 쟁취한다. 보쌈을 한 것이다. 거사를 성공한 후 소녀의 얼굴을 감싼 천을 벗긴 메블루트는 깨닫는다. 3년 동안 자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한 눈 앞의 그녀는 결혼식에서 반한 소녀의 언니였다는 걸.  

'내 마음의 낯섦'은 그 이후로 40여 년을 살아가는 메블루트의 삶을 담담하지만 끈질기게 따라가며 기록한다. 글의 형식은 약간 독특한데, 메블루트를 포함한 인물들의 입장들이 짤막한 단락을 바꿔가며 전개된다. 마치 독자 앞에 소설의 인물들이 늘어서서 주관적이기에 엇갈리는 사연들을 호소하는 듯 하다.  

책의 스케일만큼이나 분량도 상당한 본 책은 티비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앞서 말한 사랑의 시작이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한 은근한 긴장감이 전체 스토리를 잡아주고 있다. 또한 메블루트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일상성에 기반한 평범한 인물들에게서 고유한 성격을 잡아내고 풀어내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새삼 놀랍다.  

앞서 읽었던 오르한 파묵의 책들은 노벨상 수상에 걸맞게 독자성과 지역색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뛰어난 문학작품들이었다. 하지만 2013 년에 쓰여진 '내 마음의 낯섦' 만큼의 대중성은 없었다. 작가의 데뷔작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이스탄불의 평범한 시민들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본 소설이 훨씬 매끄럽고 흡인력있다.  

길고 긴 세월의 중심에 메블루트를 두고 풀어나가는 이스탄불 한켠의 작은 이야기는 거대하고 풀지못할수수께끼, 우리의 인생을 반추하게 한다. 삶은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혼식의 소녀와 이어지는 전개에서 작가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실감하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과 빈민가의 오두막 위로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며 변해가는 이스탄불의 풍경은 메블루트 앞을 지나가며 스토리에 무게를 더한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나도 나이를 먹어가며 흔하디 흔한 말의 아찔한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날로 현대화되는 거리에서 메블루트는 더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는 전통음료 보자를 팔러 다니는 데에 집착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려는 그를 흉볼 수는 없다. 다시 오지않기 때문에 더 소중한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다시 들춰보는 행위가 어느새 삶의 주요한 기쁨이 되었음에 슬프게 공감한다. 그래서 결혼식의 소녀 대신 자신의 삶으로 들어왔고 떠나간 그녀, 라이하를 여전히 사랑했었다는 중얼거림으로 결말짓는 마지막 장은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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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간, 호모 미그란스 - 인류의 이주 역사와 국제 이주의 흐름
조일준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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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한 현생 인류를 저자는 호모 미그란스, 즉 이주하는 인간이라고 칭한다. 이주는 이사가 아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행위는 문명 이전에는 목숨을 건 자연에의 적응이 필요했고, 지금에도 만만찮은 부담을 가져야 한다.  

책의 전반부는 인류가 이주로 지구에 정착했음을 알려준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는 160만 년부터 타 대륙으로 이동을 시작해 불과 1500년 전에야 남아메리카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인류는 진화하고 분화했으며 정착하여 농업혁명을 통해 문명화에 들었다. 이주를 열쇳말로 다시 쓴 책의 간략한 문명사는 익히 알려진 내용이 태반이지만, 이주가 단순히 이동이 아니라 침략과 충돌이었음을 시사한다.  

책의 후반부는 현 국제 질서에 관한 글이다. 아프리카에서 변방으로 퍼져나간 인류의 이주는 현대에 들어 반대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변방의 후진국에서 갖가지 이유로 더 나은 삶을 찾아 부국으로 흘러들어오는 인구이동은 많은 현상을 낳고 있다. 긍정적인 예로는 단연 미국이다. 미국의 형성은 아메리칸 원주민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지만, 끊임없는 이주자들의 수혈은 국가의 번성을 가능하게 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힘으로 밀어낸 유대인의 집단이주는 수차례의 전쟁과 학살을 불러온 인류의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기자이기도 한 저자는 이주가 가져오는 변화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한다. 과연 이주자의 유입으로 노동단가의 하락은 사실인가에서부터 시작해 과연 이주가 긍정적인 것인가에 대해 엇갈리는 학설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에서 추측한 바대로 책의 논조는 이주에 대해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주자로 인한 노동단가의 하락은 생각과는 달리 미미하다는 것으로 기울며,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인구절벽인 국가에 활력을 불어넣어줄거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삶은 이론과 다르다. 당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화이트칼라 전문직인 저자와는 달리 육체노동자들은 외국인들로 인한 임금 정체를 실감한다. 또한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이웃으로 맞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체제와 기업으로 가야할 분노를 낯선 이웃으로 투사하는 그들은 결코 못배워서가 아니라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블루칼라나 브렉시트에 투표한 
중노년의 심리를 일부 이해한다.  

책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주란 주제가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열쇳말임을 실감하며, 세계와 내 주변을 다시 살펴보게된 기회여서 유익했다. 더 나아가 긴장완화되면서 장차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통일의 단계에서 섞이게 될 북한주민과의 공존을 상상해보면 '이주'라는 책의 주제가 뜬구름잡는 의제는 아니다. 그저 개인이 노력해야할 문제는 아니다. 분노로 얼룩진 혼돈을 미연에 방지할려면 국가는 기업에 끌려 눈가리고 아웅 식의 감성적인 임기응변보다는 보다 새로운 정책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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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탑
에도가와 란포 지음, 미야자키 하야오 그림, 민경욱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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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신문에 연재되었던 '유령탑'은 많은 이에게 영감을 제공했던 모양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 중 하나였던듯 직접 그린 그림으로 책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책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다. 거대한 시계탑이 포함되어있는 서양식의 대저택이 주인을 잃어버린채 숲 속에 방치되어 있다. 으스스한 구조물로 각자 비밀스러운 냄새를 노골적으로 풍기는 인물들이 모여드는 도입부는 지금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을 받은 만화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수없이 봐왔던 것이니 말이다. 물론 장르에서 작가의 역사적 위치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대중은 재미를 위해 책을 든게 아닌가.  

하지만 읽을수록 그게 아니다.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쩍은 범죄의 용의점이 미스테리한 여인 아키코에게로 향하지만, 주인공인 화자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랑에 눈멀어 수렁에 빠지는 심리가 작가 특유의 분위기 조성으로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현실과 거리를 두는 작가의 작법은 기상천외한 범죄기법이나 캐릭터 형성에도 발휘되면서, 소설 속 세계가 한 편의 악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에드가 앨런 포에서 따왔다는 작가의 필명답다.  

어릴 적 읽은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이 생각난다. 구체적인 스토리와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섬과 동굴의 배경에서 풍겨나왔던 으스스한 분위기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 인상이 단지 추억보정이 아니란 걸 '유령탑'은 말해준다. 분위기를 조성해가며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독보적인 작법과 동양과 서양이 뒤섞인 기묘한 상상력이 발휘된 설정들은 추리과정과 트릭을 제거해봐도 그 자체로 즐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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