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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메블루트는 사촌의 결혼식에서 한 소녀에 반한다. 사촌의 배우자의 여동생이었던 소녀의 눈동자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결심한다. 둘은 곧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군대에 다녀오고 결혼할 여건이 되기까지 3년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상하지만 결혼식에서의 소녀의 눈은 남자에게 평생 아로새겨졌고, 그것이 1968년의 사랑이었다.
상대 집안의 반대를 우려한 가난한 메블루트는 사촌의 도움을 받아 사랑을 쟁취한다. 보쌈을 한 것이다. 거사를 성공한 후 소녀의 얼굴을 감싼 천을 벗긴 메블루트는 깨닫는다. 3년 동안 자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한 눈 앞의 그녀는 결혼식에서 반한 소녀의 언니였다는 걸.
'내 마음의 낯섦'은 그 이후로 40여 년을 살아가는 메블루트의 삶을 담담하지만 끈질기게 따라가며 기록한다. 글의 형식은 약간 독특한데, 메블루트를 포함한 인물들의 입장들이 짤막한 단락을 바꿔가며 전개된다. 마치 독자 앞에 소설의 인물들이 늘어서서 주관적이기에 엇갈리는 사연들을 호소하는 듯 하다.
책의 스케일만큼이나 분량도 상당한 본 책은 티비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앞서 말한 사랑의 시작이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한 은근한 긴장감이 전체 스토리를 잡아주고 있다. 또한 메블루트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일상성에 기반한 평범한 인물들에게서 고유한 성격을 잡아내고 풀어내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새삼 놀랍다.
앞서 읽었던 오르한 파묵의 책들은 노벨상 수상에 걸맞게 독자성과 지역색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뛰어난 문학작품들이었다. 하지만 2013 년에 쓰여진 '내 마음의 낯섦' 만큼의 대중성은 없었다. 작가의 데뷔작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이스탄불의 평범한 시민들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본 소설이 훨씬 매끄럽고 흡인력있다.
길고 긴 세월의 중심에 메블루트를 두고 풀어나가는 이스탄불 한켠의 작은 이야기는 거대하고 풀지못할수수께끼, 우리의 인생을 반추하게 한다. 삶은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혼식의 소녀와 이어지는 전개에서 작가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실감하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과 빈민가의 오두막 위로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며 변해가는 이스탄불의 풍경은 메블루트 앞을 지나가며 스토리에 무게를 더한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나도 나이를 먹어가며 흔하디 흔한 말의 아찔한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날로 현대화되는 거리에서 메블루트는 더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는 전통음료 보자를 팔러 다니는 데에 집착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려는 그를 흉볼 수는 없다. 다시 오지않기 때문에 더 소중한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다시 들춰보는 행위가 어느새 삶의 주요한 기쁨이 되었음에 슬프게 공감한다. 그래서 결혼식의 소녀 대신 자신의 삶으로 들어왔고 떠나간 그녀, 라이하를 여전히 사랑했었다는 중얼거림으로 결말짓는 마지막 장은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