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리커버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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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인 헨리는 달콤한 은둔에 들어선다. 글쓰기를 잠시 접고 세간의 이목에서 잠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즐긴다. 하지만 한 남자가 헨리 앞에 나타나며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평범한 주인공이 기괴한 인물과의 만남으로 한바탕 홍역을 겪다가 잠에서 깨 되돌아보는 악몽처럼 금새 사라지는 듯한 스토리의 '20세기의 셔츠'는 마치 19세기의 고딕 소설을 연상케한다. 사교성이라곤 없는 기분 나쁜 노인이 건네주고 읊는 희곡은 언뜻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매혹적이다.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이 주고받는 대화가 주가 되는 노인의 희곡은 어딘가 무엇을 연상케하는 기시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헨리는 그것을 홀로코스트에 관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막판의 클라이막스에서 사실로 드러난다.  

하지만 소설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고 나는 느꼈다. 풍부한 은유를 통해서 진실에 다가가는 얀 마텔의 작법은 독자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여러가지의 생각을 하고 대입해도 근사한 퍼즐을 맞추는 재미는 얀 마텔의 책을 찾는 이유 중 하나이다.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희곡의 주인공인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다. 극중 작가가 셔츠 위라고 설정한 무대를 떠돈다. 나중에 드러나듯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굶주리고 불안에 떨면서도 둘은 우정으로 버텨낸다. 그러다 생의 최후를 맞을 때의 그들의 대화에 그토록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마지막 순간에 '행복해야돼'를 연신 부르짖다 개머리판에 맞아죽는 장면 자체가 강렬해서였을까. 아니면 오히려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모습을 한 캐릭터의 외모에 감정이입이 되서였을까. 어쨌든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스타인벡의 '생쥐의 인간'의 두명의 떠돌이 이후 가장 가련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듀오였다.  

소설 초반 노인이 헨리의 일상에 처음 끼어들 때, 노인은 자신의 희곡 일부와 플로베르의 단편을 보낸다. 단편은 거의 전편이 수록되어 있어, 액자 형식의 독자적인 스토리로 인상을 남긴다. 나는 플로베르의 단편에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본다. 수많은 동물을 이유없이 죽이면서도 죄책감은 느끼지 못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인간세계에서 인간을 도와 영웅이 되는 중세의 주인공은 헨리는 물론 책 밖의 나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단지 동물학대에 관한 것이 아니다. 플로베르가 창조한 기사처럼 소수의 특출난 인물들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영웅으로 치켜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을 점점히 이어붙인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노인이 희곡을 쓴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니면 발설할 수 없는 과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과시하기 위해서? 앞서말한 나 개인적인 해석에 의하면 어느 것 하나 말끔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말년에 헨리 앞에 드러나 인간사의 한 부분에 관한 진실의 떡밥을 던졌고, 독자인 나에게도 똑같이 작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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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리커버 특별판)
얀 마텔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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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의 첫인상은 작가의 다른 소설과 사뭇 다르다. 표지에 쓰여있는 간략한 작가의 프로필을 그대로 따라가는 주인공의 행로는 본 책을 작가의 자서전 쯤으로 보이게 한다. 그것은 너무 실제적이고 회고적이라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었던, 내가 읽은 그의 두 권의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캐나다 국적으로 태어나 외교관인 부모님을 따라 세계 여러곳을 다니며 성장한 인물은 어느 순간부터 성을 달리한다. 고등학교 때는 분명히 수컷 냄새가 물씬 나는 전형적인 남자 기숙학교에 대한 묘사로 유년기를 채웠던 인물이 대학에 입학하자 돌출된 성기가 아니라 질을 가진 여성으로 변해있었다. 당혹스러운 전개다. 성이 뒤바뀌는 부분을 여러차례 읽어보았지만, 어떤 징후나 사건도 없었다. 화자는 자연스럽게 여성이 되었으며, 자신도 어떠한 자각이나 혼란도 없다. 여지껏 여성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남성에서 여성으로 그리고 남성으로 변화되는, 자웅동체적인 인물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만들어졌을까. 물론 이게 실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파이 이야기'에서 구조된 소년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본인 보험조사원의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 이건 실제가 아니지만 실제보다 확연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살면서 인생을 되돌아볼 때가 있었다. 내가 찌질하고 쪽팔리거나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던 순간들과 어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는지를 회고하다보면 길지 않은 인생의 경로가 확연하지 않다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제 3의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내 인생을 글이나 영상으로 표현해준다면 참 흥미진진할거라고 상상했다. '셀프'는 그러한 나의 망상과 맞닿아있다고 느낀다. 많은 책들이 그랬듯이 전능한 작가나 신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생애를 성을 바꾸어가며 교차검증한다는 아이디어는 뛰어나다.  

그것에는 남녀가 똑같은 인간이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을테다. 또한 영어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는 주인공의 말을 원어 그대로 수록한 것은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관점과 감정의 차이를 암시하고자 시도한 것일테다.  

'셀프'는 여러 면에서 기묘한 경험을 안겨준다. 앞서 말한 스토리의 전개도 그렇거니와 여성의 삶을 살면서 겪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들은 본 책이 결국에는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결국 문화의 다원성과 인간 각각의 독자성을 잊으며 감정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었다고 나는 느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성장한 이력을 가진 이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사상의 경지이다. 나 혼자의 경험으로는 절대 획득할 수 없는 작가의 사상을 공유하는 기회는 책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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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4 -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 근대세계체제 4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박구병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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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대로 책의 키워드는 '중도적 자유주의'이다. 중도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사상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학문적 밑바탕이 없는 나로서는 저자가 말하는 중도적 자유주의의 정확한 개념을 감히 안다고 말하기 힘들다. 다만 대략적으로 말해보자면 권력을 귀족과 군주가 아니라 인민이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프랑스대혁명이 보여주었고, 그로부터 근대의 자유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중도적'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는 이유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자유주의가 점차 주류를 점해갔기 때문이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의 평화로운 백여년 간의 시기를 저자는 중도적 자유주의가 주도적인 이념으로 대체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개인의 창의성과 이익추구권을 존중하면서도 국가의 존재와 역할을 긍정하는 중도적 자유주의는 19세기를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절로 수놓았다. 비록 비서구세계의 착취로 이룩한 그들만의 황금기였을지 몰라도 말이다.  

다르게 보면, 중도적 자유주의의 출현과 발흥이 역사의 진보라고 보기 힘든 면도 있다. 산업혁명을 축으로 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팽창에는 기존의 군주정이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이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계급이 국가의 핵심으로 대체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념의 출현을 시작으로 보는 것보다는 바뀐 체제의 필요성에 의해 이념이 고안된 것이 맞지 않을까.  

'근대세계체제'는 시리즈의 일환이라고 한다.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담아두었다던 3권을 읽어보지 못하고 아무 기반없이 4권을 읽게되어 충분한 독서는 되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힘의 충돌이 아니라 사상을 키워드로 읽어낸 19세기의 서구의 역사는 새로웠고 유익했다. 특히 중도적 자유주의가 파급시킨 학문과 사상의 분화는 우리가 말하고 누리는 개념이 불과 백여 년 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또한 같은 진보운동인 패미니스트와 노예제 폐지론이 충돌하는 예시에서 보듯, 지금 누리는 권리가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란 걸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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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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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는 '마션'으로 성공적 데뷔를 한 앤디 위어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여러개의 반구형의 돔을 이어놓은 달 표면의 도시 아르테미스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마션'과 마찬가지로 공학적인 설명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독자인 우리가 일상에서 거의 보지 못하는 물건들이 지구와는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곳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독자에게 전해줄려면 작가가 '설명충'이 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션'과 마찬가지로 화자이자 주인공은 혼잣말을 연신 뱉어내는 쾌활한 인물이 되어야 했다. 

작가는 서문에서 소설의 주인공 재즈에 대단히 애착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취향에는 보고있기가 고역인 유형의 인물이다. 머리회전은 빠르지만 도덕관념은 희박하고 감성적이고 제멋대로인, 몸만 20대인 사춘기 소녀는 보다 높은 매력이 부여되어야 주인공다워 진다. 유감스럽게도 문학적 소양이 없고, 이제야 두번째 장편소설에 도전한 작가에게는 버거운 작업이다. 그러니 싸이코패스로 보이는 소녀가 오로지 돈 때문에 온갖 민폐를 일으키며 도시를 발칵 뒤집는 과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션'은 쌍욕으로 시작되는 거두절미가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 이래로 수없이 변주되온 홀로 살아남는 서사를 화성으로 가져온 아이디어도 좋았다. 머리 아픈 공학에 대한 설명도 사실감을 높여주는 긍정적 역할을 했다. 전작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르테미스'는 읽기가 고역이었다. 앞서 말한 주인공에 대한 짜증을 비롯해서 내 개그코드와는 전혀 맞지않는 유머들은 왜 그렇게 많던지.  

SF 장르가 고파서 본 책에 관심이 있다면 차라리 예전에 쓰여진 SF의 고전들을 다시한번 읽자. 그게 내 솔직한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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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전쟁 -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오정환 지음 / 종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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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책의 부제다. 책은 천년 간에 걸친 베트남과 중국과의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핵심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다. 현직 기자이기도 한 작가는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부터 1979년의 중월분쟁까지의 역사를 따라간다.  

책을 읽으며 한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국이고 중국의 유무형의 영향을 받아 살아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베트남은 훨씬 지독한 환경을 거쳐왔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국가의 안보는 지정학적인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한반도는 대륙의 끝자락이며 육로로 이어진 중국과의 접경은 만주의 이민족에 의해 잦게 끊어지기도 했다. 사오백 년 이상을 유지했던 체제안정은 지정학적인 고립 덕분이었다.  

그에 반해 베트남은 중국과 중동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의 경로에 위치해 있었고, 중국에 자리한 제국과 바로 국경을 매번 접했다. 또한 베트남의 역대 국가가 자리했던 현재 하노이 인근의 생산력은 국력을 팽창시키기에는 턱없이 낮았다. 현재의 호치민이 자리한 메콩델타가 베트남의 영토가 된 것은 응우옌 왕조 시기인 18세기가 되서였다. 그러니 베트남이 중국의 직할 영토가 되거나, 독립을 쟁취해도 왕조가 100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게 단명하는 이유가 납득이 간다.  

때문에 책을 팽창하는 중국에 대한 경계와 증오의 논거로 읽는 것은 지나친 단견일 것이다. 국가의 존속은 지정학적 위치에 달려있다. 그리고 자국의 국력을 자각하며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 근거로 본 책에 담긴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의 침략에 의해서만 고통받은 것이 아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자리한 참파,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와의 패권전쟁과 수많은 내전들의 역사가 그것이다. 고만고만한 세력 간의 분쟁은 모두를 수렁에 빠뜨렸다. 내전이 반도의 전쟁으로 번지고, 외부의 수퍼파워를 끌어들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을 장악한 것도 프랑스의 용병과 기술을 빌어왔던 덕분이었던 것이다.  

별개로 투쟁으로 점철된 소용돌이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이어온 베트남인의 저력에 감탄한다. 예전에 읽었던 호치민 평전에서 감탄했던 것이 공산주의 이념보다 앞섰던 민족주의였다. 본 책을 읽고서야 오랜 세월 속에서 그들을 지켜온 것이 총칼보다 무형의 민족적 자각이었구나라고 깨닫는다.  

베트남을 보다 깊게 알 수 있었던 유익한 기회였다. 다만 된소리가 들어간 베트남의 낯선 인명의 향연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작가도 그런 점을 고려했는지, 특파원 시절에 직접 촬영한 베트남 곳곳의 사진들이 컬러로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또한 맥락에 필요치는 않지만 부연 설명이 필요하면 따로 분량을 마련해 놓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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