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인재들 -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걸작 논픽션 7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송정은.황지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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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이며 실패다. 아시아의 공산주의의 확산이 민족주의적 열망에서 출발했음을 이해못한 미국의 세계전략은 도미노 이론으로 반공주의를 개입의 이유로 삼았다. 결과로 미국이 지켜야할 민주주의의 보루는 썩어빠지고 무능한 남베트남 정부였다. 미국이 첨단무기와 끝없어보이는 물량으로 밀어붙일수록 북베트남은 굳건해졌다. 명분없는 전쟁의 종말을 명백히 보여주는 예이다. 애초부터 모호했던 전략적 목표는 달성되지 못한채 미국의 리더십은 손상되었다.  

때문에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예정된 재앙이었다. 정답은 올바른 물음으로 도출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미국이 왜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가 아니라 '미국이 왜 베트남에 개입하는 결정을 내렸는가'에 방점을 찍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역사적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자. 책은 중국의 공산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국민당의 패배를 중국의 상실로 받아들였고, 이어진 매카시즘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전문가들의 숙청을 낳았다. 책임을 전가받고 빨갱이라는 오명을 쓴 이들의 퇴진은 1950년대의 아시아와 단절을 야기했다. 올바른 판단에는 올바른 정보가 필요하지만 그러지못했다. 소련을 상대하던 방식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전훈으로 미국이 판단한 베트남은 실제와 달랐다. 이는 베트남 전쟁을 냉전의 일부분으로 서술하는 종래의 평가와는 거리가 있다. 프랑스의 바톤을 이어받은 미국과 베트남 관계에서 전쟁의 시작과 끝을 찾는다.  

책은 최고의 인재들이 항상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의 제목 '최고의 인재들'은 비꼬는 의도지만 반쯤은 사실이기도 하다. 작가가 들여다보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참여자들은 하나하나 능력자들이었다. 각기 거쳐온 곳에서 전설적인 흔적을 남긴 최고의 엘리트들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눈부시다. 더구나 그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청렴한 인격자였으니 사석에서 그들을 직접 만난다면 대외정책의 실패자라기보다 성공의 아우라에 눈이 부실터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실패했다. 방대한 저술의 결론을 나름대로 요약해보자. 우선 그들은 오만했다. 정점을 달리던 미국의 힘을 과신했고 아시아를 무시했다. 경험했던 전쟁과 전혀 다른 베트남의 환경을 공군을 맹신한 잘못된 군사적 접근으로 패배를 자초했다. 또한 민족주의에 기초한 아시아적 열망을 소련의 공산주의와 동일선상에 두었다. 여전한 매카시즘의 공포에 질려있던 미국의 엘리트들은 타협을 유약함으로 오인받을까 두려워했다.  

영영 적국일 것 같았던 중국을 닉슨이 1972년에 방문한데에서 보듯이 국제정치가 현실주의 일색일 수는 없다.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서 보면 호치민은 이미 1950년대 초반에 자국항구의 미군개방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열렬히 미국에 구애했었다. 애석하게도 미국이 호치민의 손을 잡아주진 못했지만, 북베트남과 전쟁중이던 프랑스를 돕지 않으며 베트남 개입을 극력 피하던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을 이어갔어도 베트남에서의 파국은 피할 수 있었다.  

단락마다 수를 놓은 눈부신 커리어의 엘리트들이 도출한 결론이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예리하고 신랄한 글로 난도질되는 그들을 보며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가 거쳐온 집단의 가치관에서 벗어나기가 힘듬을 깨닫는다. 동시에 인물의 한계를 정확히 짚어내고 적재적소에 놓는 용병술의 어려움을 절감한다. 베트남 전쟁 이전과 이후에도 역사적 실수가 반복되는 까닭은 본래 인간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이 모든 정치적 프로세스를 올바르게 통제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책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게 된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는 특정한 구도에 고정된 사고에 함몰되어 잘못된 전략을 수립했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역사적 대전환을 앞둔 우리 역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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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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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라는 형식에는 유감은 없지만 단편소설집은 펼치기가 매번 망설여진다. 읽을 때마다 독후감을 적기에 애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든 길든 글 한편을 읽고나서의 여운의 공간이 곧장 뒤의 글로 메워지는 느낌이 썩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의 글을 다 읽어보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본 책을 들었다.  

김연수의 글을 읽으며 E.H. 카의 유명한 글귀를 떠올린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김연수는 일관되게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그렸다. 작가 특유의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문장은 그를 통해 한국의 현대사 곳곳을 파고 들어간다. 예스럽고 이념편향적인 과거 작가의 전유물인 것만 같았던 과거의 순간을 김연수스럽게 재해석하는 맛은 지금까지 그의 글을 찾아읽었던 주요한 이유였다.  

그의 장편들을 읽으며 창작의 고통을 감지하곤 했다. 작가는 거대한 의도와 야심을 가진 장편 사이로 휴식을 위한 글쓰기를 시도한다고 '사랑이라니 선영아'의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본 단편들도 그렇게 쓰여지지 않았을까. 분량상 깊지않게 우리 일상에 맴도는 글이지만 가볍기보다 산뜻하고 깔끔하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구조는 여전하지만 작가 자신에 향한 것인듯 보다 희망적으로 결말난다.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증발된 가운데 문장이나 장면이 강렬히 각인되는 경험은 단편을 읽는 기쁨이다. 특히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대중에게 다가갈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부분이 있다. 늙은 여인의 기억속에서, 젊을 적 영화감독과 사랑의 도피를 했던 제주도에서의 빗소리는 음계를 갖추고 있었다. 4월에서 7월로의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음계와 동치시킨 기가막힌 재치와 은유는 일상을 기적으로 뒤바꾸고 있다. 

범상한 인간에게 지루하게만 보이는 우리 내부와 주변에서 무언가를 감지해내는 예술가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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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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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어 익숙한 쿳시의 작법이 '나라의 심장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지배계급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분명하지 않은 서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다. 그럼에도 새롭다.  

소설은 아마도 20세기 초로 추정되는 남아프리카의 농장을 배경으로 한다. 홀아비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외동딸 마그다는 결혼적령기를 넘겼다. 이야기는 초반부터 격정적이다. 마그다는 새어머니와 아버지를 도끼로 살해하고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한다. 이는 곧 마그다의 상상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곧이어 마그다는 정말로 아버지를 총으로 죽여버린다.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버지의 시중을 들면서 신경과민의 노처녀로 늙어가는 마그다의 인식으로 쓰여지는 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그다의 내면은 생생히 다가온다. 가까운 우체국까지 자전거로 이틀을 달려야하는 오지의 대농장에 아버지도 사라지고 홀로 된 마그다에게 압도적인 무기력이 찾아온다. 손길이 필요할수록 손을 놓아버리는 심리상태는 나도 경험이 있으므로 무척 공감하며 읽어갔다. 

권위적인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해버린 마그다가 후에 찾아오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마그다는 스칼렛 오하라가 아니었다. 집안의 흑인 일꾼에게 강간을 당하지만 남성성에 굴복하며 매달리기까지 한다. 이는 인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별을 떠나 인간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최종에 그녀는 진취적으로 자립하거나 남성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고향을 떠나거나 하는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쉽지만 아무도 택하지 않았을, 그곳에서 죽게될 운명을 선택했다. 세상의 기대를 배반하며 기뻐하는 그녀에 전율하며 그녀를 동정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로디지아를 무대로 삼았던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와 유사해서 특유의 불친절한 쿳시의 문장을 오감이 풍성한 레싱의 글로 보완하며 따라갔다. 그러나 두 소설은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풀잎은 노래한다'는 여성작가의 작품답게 남성중심의 세계에 대항하는 여성이라는 고전적인 구도에 머물러 있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도 역시 유사해보이지만 앞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지배계급에 속하면서도 피압제자로 위치한 여성성을 택한 것일 뿐이다. 피부색으로 결정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도를 소재로 삼은 이전의 문학들과는 달리 지배계층의 한 곳에 자리한 쿳시의 위치선정은 절묘하다 하겠다. 본 작품은 세계의 근원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이전 문학보다 전진해있고 현대적이다. 무시무시한 도발로 맺는 결말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이다. 나름 까다롭다고 자부하는 내 기준으로 감히 걸작이라 평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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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역사
마야 룬데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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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역사'는 다른 시간대를 번갈아 보여준다. 1858년의 윌리엄과 2007년의 조지와 2098년의 타오는 그들 사이의 공간을 점점 좁혀간다. 과연 수백년을 관통하는 주제가 어떻게 어느 지점에서 드라마틱하게 드러날까에 대한 궁금증은 책을 넘기게 되는 가장 큰 동기이다. 물론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이 모두는 벌과 관련되어 있다.  

글의 의도는 벌이 사라진 미래, 2098년의 지구에 드러나있다. 벌들이 멸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꽃가루의 전파와 생식을 뜻하는 '수분'은 전적으로 벌에 의존해왔다. 생태계의 중요한 고리의 붕괴는 인간에게 식량생산의 차질을 뜻한다. 인구는 줄어들며 문명은 쇠퇴했다. 타오가 배회하는 베이징의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풍경은 디스토피아의 전형이다.  

검색해보니 설정은 단지 작가의 상상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2008년 이후에 벌들이 집단으로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군집붕괴현상'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의 이유로 전자파나 살충제 등을 가리키고 있으나 확실히 규명되고 있지 않고 있다. 마냥 흥미로웠던 책의 내용을 돌이켜보면 뒤늦게 등골이 서늘해진다.  

소설의 구조는 전체 형태를 구성하는 일부의 형태가 동일하다는 프랙털 이론을 연상시킨다. 극의 인물들의 행태는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벌과 닮게 묘사된다. 이는 인간이 벌과 같은 생태계에 묶여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니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양봉업 혹은 농업이 지속된다면 인간 역시 속박과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할거라는 메시지는 설득력있다. 

등장인물들은 전지구적인 고뇌가 아니라 가족들 사이에서 소시민적인 갈등을 겪고 속앓이한다.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소통하지 못해 본심이 왜곡되는 과정을 드라마의 축으로 삼아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치명적 단점이 드러난다. 작가가 그려내는 남성들은 어딘가 뒤틀려있고 과장되어 있다. 아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괴로워하는 윌리엄과 조지는 우리 주변의 아버지라기보다 심술궂은 노인이나 철없는 어린애에 가까워보인다. 아무리 장성한 자식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의 아픔을 그려낸다고 하지만, 윌리엄과 조지는 너무 비호감이며 생뚱맞은 감정의 소유자들이다. 이래서는 독자가 그들에 감정이입 할 수 없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잘 봐줘도 평균에 불과한 스토리텔링과 감정묘사의 불균형은 아쉽다. 결국에 인물과 사연 대신 생태주의적 설교만 남는다. 이는 페이지의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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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별 - 김원일 소설
김원일 지음 / 강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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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별'에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본 단편들은 앞서 읽은 김원일의 글로 확인한 작가의 문학세계의 경계 안에 위치한다. 작가가 창조한 군상은 식민지에서 전쟁과 분단에 이르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다. 역사의 비극은 영향력 아래에 놓인 개인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온몸으로 체득된 변화는 개인의 평생에 따라다니고, 심지어 유전자의 정보에 주입된 듯 후손들에게까지 전한다.  

가족사가 얽힌 분단을 주제로 평생을 파고들었던 작가는 또 그만큼의 노력을 과거와 연결된 현재의 고리를 주목했다. 그러한 결과가 '아우라지 가는 길'이나 '가족'같은 장편소설들이었는데, 글쎄 내 기준에는 작가의 의도가 달성되지 못한 범작에 불과했다. 본 단편들 역시 그런 의도의 연장선상에 서 있지만 감상은 사뭇 다르다. 장편이라는 분량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 덕분인지 모르겠다. 과거와 현재를 묶는 주제를 거침없이 펼치는 글을 따라가다보면 숨이 가빠진다.  

한국문학에 으례 따라붙는 책 뒷편의 평론은 본 단편들에서 생명과 사랑을 짚어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매료되었던 부분은 시간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주제가 일으키는 어떤 정서였다. 이를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할까.  

영화 '화양연화'의 결말이 떠오른다. 앙코르왓에서 옆집의 여인이 함께 한 화양연화를 회고하는 씬은 영화를 러브스토리 이상으로 끌어올린 명장면이었다. 불멸의 상징인 앙코르왓에서 필멸자인 인간은 불과 수십년 전의 일을 먼지 낀 창틀 너머로 희미하게 바라본다.  

한국전쟁에서 폭격에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예감에 이끌려 서로를 찾게되는 남매의 사연을 그린 '오마니별'이나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여인과 5년마다 만나기를 반복하다 이제는 늙은이가 되버리는 '용초도 동백꽃'를 읽노라면 그야말로 애가 끓는다. 글의 정서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는 비애감을 깨운다. 결국에 서로를 서서히 잊을 것이고 기억의 주체 역시 사라질 것이다. 모두에 앞서는 압도적인 시간에 선 소설의 인물들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좋은 글이란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 위치한 독자들을 사로잡을려면 글은 소재에 머물러 있어선 안된다. '오마니별'을 비롯한 김원일의 단편에는 현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했고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의 감정이 정직하게 녹아있다. 허구가 항상 현실을 못 따라가듯, 인간사의 정수를 잔재주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풀어내는 필력에 빠져들었고 감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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