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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역사
마야 룬데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벌들의 역사'는 다른 시간대를 번갈아 보여준다. 1858년의 윌리엄과 2007년의 조지와 2098년의 타오는 그들 사이의 공간을 점점 좁혀간다. 과연 수백년을 관통하는 주제가 어떻게 어느 지점에서 드라마틱하게 드러날까에 대한 궁금증은 책을 넘기게 되는 가장 큰 동기이다. 물론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이 모두는 벌과 관련되어 있다.
글의 의도는 벌이 사라진 미래, 2098년의 지구에 드러나있다. 벌들이 멸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꽃가루의 전파와 생식을 뜻하는 '수분'은 전적으로 벌에 의존해왔다. 생태계의 중요한 고리의 붕괴는 인간에게 식량생산의 차질을 뜻한다. 인구는 줄어들며 문명은 쇠퇴했다. 타오가 배회하는 베이징의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풍경은 디스토피아의 전형이다.
검색해보니 설정은 단지 작가의 상상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2008년 이후에 벌들이 집단으로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군집붕괴현상'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의 이유로 전자파나 살충제 등을 가리키고 있으나 확실히 규명되고 있지 않고 있다. 마냥 흥미로웠던 책의 내용을 돌이켜보면 뒤늦게 등골이 서늘해진다.
소설의 구조는 전체 형태를 구성하는 일부의 형태가 동일하다는 프랙털 이론을 연상시킨다. 극의 인물들의 행태는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벌과 닮게 묘사된다. 이는 인간이 벌과 같은 생태계에 묶여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니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양봉업 혹은 농업이 지속된다면 인간 역시 속박과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할거라는 메시지는 설득력있다.
등장인물들은 전지구적인 고뇌가 아니라 가족들 사이에서 소시민적인 갈등을 겪고 속앓이한다.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소통하지 못해 본심이 왜곡되는 과정을 드라마의 축으로 삼아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치명적 단점이 드러난다. 작가가 그려내는 남성들은 어딘가 뒤틀려있고 과장되어 있다. 아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괴로워하는 윌리엄과 조지는 우리 주변의 아버지라기보다 심술궂은 노인이나 철없는 어린애에 가까워보인다. 아무리 장성한 자식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의 아픔을 그려낸다고 하지만, 윌리엄과 조지는 너무 비호감이며 생뚱맞은 감정의 소유자들이다. 이래서는 독자가 그들에 감정이입 할 수 없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잘 봐줘도 평균에 불과한 스토리텔링과 감정묘사의 불균형은 아쉽다. 결국에 인물과 사연 대신 생태주의적 설교만 남는다. 이는 페이지의 낭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