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뼈대를 먼저 만들고 살을 붙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살을 발라 뼈대만 남기거나 뼈대 위로 조금의 살만 남겨 놓는 이가 있다. 이 살은 대체적으로 맛있어 보인다. 허나 과유불급이라 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체한다. <논개>는 뼈대 위에는 맛있는 살만 붙이거나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논개는 어느 방향인가. 최근 읽은 양쯔쥔의 <사자개>를 볼 때보다 더 큰 아쉬움이 무럭무럭 꽃핀다.

 

 배나무로 따지자면 곁가지를 치지 않아 성장을 저해시키거나 배꽃을 제대로 따지 않아 열매가 달리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다. 김별아는 어떤 곁가지를 처내야 하고, 언제 배꽃을 따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는 것을 몸소 터득한 것이리라. 어쨌든 지나친 미사여구나 현학은 감탄의 대상은 될 지언정 마음의 감동은 얻지 못한다. 때로 그 감탄을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감동이라 믿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속을 수 없어 애석하다. 게다가 작중개입은 또 얼마나 남발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그 외 다른 것에서 감동을 얻었다면, 아마 이리도 표독스레 책을 노려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당대의 사회상을 아무리 떠벌려 보아도 작중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사건의 개연성은 희끄무레하기만 하다. 선명하던 인물이 갑작스레 희미해지다가 죽어 버리기도 하는 등 전반적인 구성 자체에 강약의 조절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에 곁가지를 잘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 결과다.

 

 김별아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허송세월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찾아오길 강렬히 고대했다고 한다. 그 순간 찾아 온 <논개>가 그를 흥분하게 했으리라. 작가는 그 흥분을 가라 앉힌 후,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그러다보니 강약조절에 실패하게 되고, 그것을 미사여구로 감추게 되었으며, 결국 어정쩡한 모양으로 남은 것이다.

 

 그의 말처럼, 논개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다. 허나 동시에 누구나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논개라는 기생이 왜적을 껴안고 강에 뛰어 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논개가 누구인지 그 왜적이 누구인지 왜 같이 뛰어 들어야 했는지 또 어떤 시대였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그것을 소재로 삼기에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소설적 허구로 재창조하기 편해진다. 그럼에도 <논개>는 허장성세에 불과하게 되어 버렸지만, 그렇기에 안타까움을 면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러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논개의 죽음 하나만은 선명하다.

 

 적의 장수를 껴안은 논개가 기우뚱 떨어진다. 그 모습이 분분한 낙화를 떠오르게 한다. 김별아는 그것을 이팝나무 꽃마냥 너즈러진다, 했던가. 시인 조지훈은 <낙화>에서 '꽃이 떨어지기로서니 / 바람을 탓하랴' 라고 말했다. 바람 불지 않아도 언젠가 생을 다해 떨어질진대, 바람을 탓해 무엇하느냐는 의미일게다.

 

 논개가 충절을 위해 죽음을 맞았는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음을 향하던 논개가 낙화할 때에 슬프고 괴로워하되 누구든 무엇이든 탓하지는 않았으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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