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김희림 지음, 길다래 그림 / 자음과모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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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의 기우(杞憂)

-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p263, 자음과 모음, 서울 : 김희림, 2018. 1

설 명절 나른한 오후에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갔다. 아내는 티케팅 하러 가고 나는 마트 안 서점에 잠간 들렀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서점 직원에게 묻는다. “...철학을 팝니다. 있어요. 작가는 김희림예요”
컴퓨터를 검색한 직원이 대답한다.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자음과 모음에서 나온 거 맞나요?”
“예”
“한 권 남았네요.” 진열대까지 좇아 온 직원이 한참을 찾더니 책 한권을 건네준다.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라는 노란 표지의 책이다. 글자보다 훨씬 큰 쉼표와 마침표가 눈의 띈다.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책을 펼치기 전, 표지부터 찬찬히 살펴본다. 세로 제목, 지은이, 그린이, 출판사 등이 찍혀 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쉼표와 마침표를 크게 한 이유는?’ ‘여하튼?’ ‘철학을 (시장에서 통용되는 재화도 아닌데) 어떻게 팔지? 철학책을 아니면 책의 내용을 판다는 의미일까?’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될 시간이다. 뒤표지는 다 읽고 다시 자세히 읽어 보기로 하고, 지금은 흑인 슈퍼 히어로를 만나러 극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5관 J열 3번, 4번.

책은 5부로 구성되어져 있다. 철학을 쓰고, (개그로) 읽고, (비틀어) 보고, (요만큼만) 또 읽는다. 그렇게 그 철학으로, 마침표 없는 철학, 앎의 속성을 사유하는 재미있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탐험한다. 저자는 이 책을 ‘철학 무용론’을 제기하는 21세기 아데이만토스에게 철학의 쓸모(생각의 씨를 뿌리는 것?)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책 읽는 사회가 읽지 않는 사회보다는 더 나은 우리의 삶을 담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었을까? 여전한 의문 속에 책의 제목부터 씹어 보자.

제목에는 ‘여하튼’이 들어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어쨌든, 하여(何如)튼, 아무튼 등과 비슷한 말이다. 그 뜻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 이다. 이 단어에서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쉼표와 마침표’에서는 ‘앎의 문장에 마침표는 없되 오직 쉼표만이 그 역할을 대행한다.’(p53)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인용을 통해 ‘주체와 객체는 수건돌리기 하듯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이 무한한 해석의 마침표는 영원히 찍히지 않는다.’(P53)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철학’은 책의 곳곳에서 다룰 것이니 차치하고라도, ‘팝니다’는 공짜가 없었던 공자를 처음부터 모셔옴으로써 철학을 파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자본에 의해 헐값이 된 지식과 노동에 대한 대접을 바라고 인류의 스승 공자에게 예의를 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유명 철학자의 철학을 한 두 문장으로 소개한다. 바꾸어 말하면 핵심 정리인 셈이다. 그 철학으로 우리의 현실과 접목을 시도한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우리 현실이 그동안 공부한 철학을 불러오게 했겠지만) 그리고 인용이나 나름의 코멘터리로 글을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모든 철학자가 고민했던 모든 것, 세상 만사의 모든 것을 사유하고 철학한다. 여태까지 학교(?)에서 배운 철학하는 방법을 통해 철학하는 선배를 모셔오거나 자신의 필설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개인적으로 빵 터진 부분이 몇 군데 있다. 그 중에서 한 두어 개 소개하자면, 꼰대 보존의 법칙에서 오늘날 어른들이 자녀 세대를 걱정하는 내용이나 700년 전(1311년) 영국의 펠라기우스가 “요즘 대학생들 한숨만 나온다...”로 시작하는 꼰대의 불변하는 기우(杞憂)는 시간과 장소만 변했을 뿐 그대로다. 그리고 아낙시네메스의 공기와 과자 봉지에 공기를 넣어 부풀게 한 과자 회사의 꼼수를 빗댄 글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통쾌함이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사는 이 시대를, 가늠이 되지 않는 독서와 공부의 깊이로 오늘날 젊은이의 고민과 현실에 대한 풍자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때로는 유쾌하고 발칙하게, 때로는 진중하게 자신의 언어로 채운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산타 할아버지와 푸코를 모셔 와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구체성과 거대함을 논한다거나, 윌리암 제임스와 장자, 이산화 질소와 나비를 대비하는 서늘한 망상을 따라가면서 환각이나 망상을 경험하게도 한다. 개인의 가치나 개성을 존중해야하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을 빌려 민주주의의 핵심을 꼬집기도 한다. 본능과 직관과 해체라는 디오니소스의 핵심을 통해 학(學)의 지경이 넓혀지리라는 기대도 품게 한다. 플라톤의 이성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이 전쟁을 일으켜 만 번의 살인을 자행하는 인간의 모순을 비틀기도 한다. 서양의 시선으로 동양을 이해한 화이트 헤드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젊은이의 기백은 나도 모르게 두 손 꼭 쥐어 보게 한다.

시인 장정일은 80학번 시대를 통칭해서 ‘60년산 우리 시대’라고 정의(Define)했다. 장정일(1962년생)의 삼중당 문고 문법에 열광했던 20대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 본다.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불경스럽고 외설스러운 언어로 가득 채웠던 그의 작품들에 매료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젊은 날의 방황을 제도권 밖의 언어로 풀어내는 통쾌함이 나를 시원하게 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문고판의 책들은 읽기조차 불편해졌다. 솔직하게 물리적으로 읽기가 만만하지 않다. 어느새 노안이 온 것이다.

얼마 전 이스라엘을 함께 다녀왔던 초등학교 5학년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면서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영어를 부담 없이 쓰는 도도함이 부러웠고, 외국인을 대하는 자신감이 놀라울 뿐이었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 시대를 실감나게 살고 있다. 세계화의 바탕에는 언어라는 소통의 수단을 깔고 있다. 얼마 전 윔블던에서 4강을 차지한 정현(1996년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경기를 이기고 인터뷰에서 영어로 농담도 하고 한국말로 한국 팬들에게 인사하는 여유와 당당함을 보면서 내심 뿌듯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저자가 철학을 소재로 책을 냈다. 자음과 모음이 작은 출판사도 아니다. (출판사가 그냥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실력과 노력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김희림이 아니더라도 다른 김희림이, 앞으로도 또 다른 김희림이 끊임없이 해 나갈 일이다. “분명한 의견 하나를 갖기 위해서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야 한다.”(p252)는 자각과 겸손은 중요하다. “달걀은 바위를 깨지는 못하지만, 온 몸을 바쳐 바위에 몸을 부딪쳐서 산산조각 남으로 바위의 견고함을 폭로할 수는 있다”(p218) 는 비장감으로 더욱 공부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선대의 스승들이 가졌던 고민과 결과물을 흡수하고 반성하여 그 위에 벽돌한 장 올려놓는데서 그치지 말고, 저자만의 현현epiphany을 통해 철학으로 세계에 거대한 담론과 방향을 제공하는 키잡이가 우리에게서 나오기를 바란다. 지금은 대학생들에게 한숨 말고, 격려와 존경을 담은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야 할 때이다. 그 전에 꼰대의 기우부터 거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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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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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를 읽고

맘이 내켜서 어떤 것을 해본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아침에 일어날 때, 해야 할 일과 만나야할 사람 때문에 기쁘게 일어나 본 적이 얼마나 되었는가? ‘정말 내 맘에는 꼭 드는 책이다.’라고 할 만한 저자 나름의 이유와 그 세월이 부럽고 대단할 뿐이다. 나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만은 스스로가 잘했다고 칭찬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네가 인정하는 것보다 내가 인정하는 행위가 진짜라고 하고 싶은 세월을 살고 싶다.

존재란 항상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한다. 진짜는 혼자 있을 때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배후공간’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고독은 진짜를 만나게 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드러난 공간, 공적인 공간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짜의 모습이 드러나는, 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성공적인 삶을 꿈꾸는가? 성공을 노력의 결과로 설명하는 인과론은 산업화 시대에는 아주 폼 나는 내러티브였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이유가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재미 있고 때로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자.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알고 스스로 조정하고 세상을 대면하자. 세상이 원하는 성공 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꾸자.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외롭다고 관계 속으로 도망할 이유는 없다.

아직도 불안한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질서를 세우고 내가 반복할 만한 것들을 찾아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좋다. 구체적인 일상의 예를들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정해보자 그러면 모든 게 거기에 맞추어 조정이 된다. 한번 시도해 보자.

한국은 ‘분노’가 집단심리학적 특징이다. 내 편-네 편의 이분법은 존재가 불안한 이들의 특징이다.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반대편의 적을 만들어야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생기는 질투로 인해 눈을 부릅뜨고 적을 찾아내는 한국 사회다. 그렇게 발명된 적에 집단 린치를 가하여 자신은 지극히 정의롭고 선한 존재로 합리화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정적 정보가 긍정적 정보보다 전염이 빠르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의 대안은 고마움과 감사함이다.

행복은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의 조건은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거 자주 먹고, 하얀 시트 커버의 침대에서 잘하는 거 혹은 잘자는 거다. 설렘으로 경험되는 행복은 철저하게 음악적이다. 잘 자는 만큼 행복한 게 없다. 잘 먹는 것 만큼 행복한 게 없다. 잘하고 싸는 것 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안 당해보면 모른다.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free from)와 ~을 향한 자유(free to) 두 종류의 자유가 있다. 전자는 소극적 자유이고 후자는 적극적 자유이다. 자유는 추구하는 바가 분명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그리스인 조르바식 자유가 울림이 있는 이유다.

이제는 사랑할 시간,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딱 그만큼이다. 사랑,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 된다. 저자의 말대로 사랑에는 그리움과 설렘이 동반된다. 가슴 뛰는 삶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살아가는 이유다.

이 시대는 재미를 추구한다. 재미가 주로 개인적 동기 차원에서 설명된다면, 의미는 개별적 행위가 가지는 사회적 인정차원과 관련된다. 이 시대가 파편화, 개인화되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길어진 노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고령화 사회(노년)의 근본 문제는 연금이 아니라 아이덴티티다. 그래서 그 정체성은 사회적 맥락에서 연구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우리는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평균수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 셈이다. 평균 수명만으로도 여러 가지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노년의 삶이 길어졌고 본격적인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반갑지 않은 친구같이 찾아오는 고독, 불안, 분노, 행복, 자유 그리고 재미와 의미 등을 문화심라학자인 저자만의 독특한 코드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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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치학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5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신원하.권연경 옮김 / IVP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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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수의 정치학을 읽고

존 하워드 요더, 신원하, 권연경 옮김. 446쪽, 초판 2007.10.10(2014.2.10, 초판 5쇄), IVP, 서울시 마포구

복음은 언젠가 실제로 일어났던 하나의 이야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입했던 상황이 다분히 전형적인 것이었음을 유념해야 하는데 (이전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라는 뜻에서),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그가 이 땅에서 상대했던 세력들은 정부, 제도적 종교, 민족주의 사회적 불안 등과 같이 인간의 역사 속에 언제나 존재하는 그런 요소들이었다. - 도드(C.H. Dodd) '하나님 나라와 현상황 Christian News-Letter, 1940년 2월 29일자, 부록31호. (표지에서)

들어가면서
요즘 나는 어떤 문제들을 바라볼 때 개인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를 구분하곤 한다. 2007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은 ‘개인의 영성 문제가 아닌 사회적 영성 문제’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계기가 있었다. 우리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이 아닌 공동체, 즉 사회적, 구조적 문제로 진단하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보수적 기독교 환경에서 성장한 터라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 개입하는 것은 먼 나라 얘기로만 치부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기로는 예수의 말구유 탄생을,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초라하고 비참하게 탄생했다는 식으로 이해했지만, 중동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집주인의 최대한의 호의와 배려 속에 출생한 것이라는 이야기-‘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는 우리의 고정 관념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접근하기는 내 깊이가 턱도 없이 모자람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단편적으로 듣거나 막연히 알았던 내용들의 편린이라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일독(一讀)으로는 고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면서,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여러 가지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지나온) 고민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저자의 견해를 따라가 본다.“예수의 정치학은 위험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의 인생이 결코 어제와 똑같을 리 없는 까닭이다.”라는 김두식 교수의 문구를 염두에 두고서...

서문
서문에서 요더는 자신을 기독교 평화주의자이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초판에 밝힌 ‘성경적 현실주의’는 성경적 세계관의 통찰을 윤리의 영역에 적용하는 시도라고 소개하면서, 성경적 현실주의는 전통적인 현학적 성향에 빠지지 않은 채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의 모든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려 하면서도 성경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그런 접근법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1장. 메시아적 윤리의 가능성
주류 윤리학은 '예수는 규범(the norm)이 아니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저자는 신약학과 현대 윤리학의 접점(接點)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 저작(著作)의 목표가 예수가 사회 윤리에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 것을 증명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가 윤리적 규범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비폭력적인 예수를 정치적으로 본다면 실패자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현실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적 정치활동은 정치적으로도 반향을 일으켰으며, 사회변화에도 공헌했다고 본다. 인용1)

2장.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마리아의 찬가, 사가랴의 찬가, 세례요한의 선포 그리고 헤롯의 반응 등(눅1:46, 68, 3:7)-을 통해 예수의 사역을 사회 정치적 현실 속에서 오실 자의 사역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성경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눅3:21)이라는 표현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아들의 신분을 인정하는 사건이 아닌 사명을 위한 부르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예수의 광야 시험은 경제적인 선택의 문제, 사회 정치적 선택의 문제, 기적 표현에 대한 문제를 통해 예수가 무리를 먹이는 왕임을 증명하고, 천하 만국에 대한 열망의 유혹이자 정치적 명성에 대한 유혹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12사도를 임명한 것도 종교 기득권자들의 조직적 반대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실체를 공식 출범하는 것이고, 인용2) '예루살렘을 향하여'라는 말에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폭동과 정적주의(quietism) 양자에 대한 정치적 대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사탄의 광야에서의 첫 번째 기회, 예루살렘 입성의 열렬한 환호를 받을 때의 두 번째 기회, 그리고 베드로의 무력으로 인한 무장봉기 가능성이 있었던 세 번째 기회, 이 모두를 거절 한다. 인용3)

3장. 희년의 의미
희년이 요구하는 4가지는 땅의 휴경, 빚의 탕감, 노예 해방, 가족 재산의 환원 등이다. 휴경년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고 포기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안식일의 완성자라고 말하며,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그 당시 만연했던 사회 경제적 문제의 대안책으로 희년은 빚을 탕감하고, 빚을 갚지 못해 종으로 전락한 자들을 해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과부의 두 렙돈 비유를 들며, 십일조만 내면 이룰 수 있었던 편리한 율법 완수와 도덕적 자기만족의 수준을 넘어서려는 것이며 사람들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단계로 초청하고자 했다. 인용4)

4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라
구약의 기사-애굽 군대의 수장(출14:13~14), 아말렉과의 전쟁(출17장), 여리고성의 점령(수6장), 기드온의 미디안 군대 격파(삿7장)-는 하나님이 대신 싸우신다는 믿음에의 순종의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숱한 나라들과의 이스라엘의 전쟁 역사(대하 14:11, 16:7~9, 20:17, 왕하 6:11)들도 마찬가지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기록들은 예수의 왕국 계시를 강화한다. 인용5)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기록들을 비현실적(상징적)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장. 비폭력적 저항의 가능성
예수님 당시의 효과적인 비폭력 저항의 예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저항으로 가이사랴에 옮긴 가이사의 상, 빌라도의 수로 공사 자금횡령에 대한 시위, 칼리굴라 상에 대한 예루살렘 시민들의 시위를 받아들인 페트로니우스 등의 예시를 들면서 예수도 열심당의 저항 방식, 칼을 거부하고 이런 비폭력적 저항 방식을 택했다고 말한다. 인용6)

6장. 시산표(試算表)
십자가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십자가는 대가를 미리 계산한 뒤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의 종착역이며, 사회적 현실로서 원치 않는 세상 속에 도래할 새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최대의 유혹은 사용할 수 있는 폭력적 방법들을 활용하여 정당한 혁명을 도모하고, 이로써 본연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비정치적인 방법으로 정치에 관여하였다. 인용7)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꼭 짚고 것은 역사의 예수와 교리의 예수를 분리시키지 말고, 정치와 분파주의를 분리시켜서도 안된다.

7장. 그리스도의 제자와 예수의 길
6장까지의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본 신약과 윤리학의 접점에 관한 논의를 1차적으로 정리하고, 7장부터는 실제 사도 시대의 윤리적 전통의 몇몇 흐름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개인적이어서 사회구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인식 없다는데 반증을 제시한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권세 개념의 교리를 현대의 관점들과 질문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방식으로 조명한다.

8장. 그리스도와 권세
권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의 변화 가운데도 일을 일어나게 만들 수 있는 모종의 능력이며, 구조적으로 어떤 사회 사물이나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정형화된 면모들을 일컫는다. 골1:15~17에서 함께 섰다(subsist)는 영어의 시스템(system)과 어원을 같이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체계화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들은 피조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8)

요더는 사회적 구조를 1)종교적 구조 : 안정된 고대 원시 사회의 종교적인 토대 2)그리고 지적구조 : -학, -주의 3) 도덕적 구조 : 법규와 관습 4) 정치적 구조 : 전제군주, 시장, 학교, 법정, 민족, 나라 등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조들은 창조 질서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예수는 자발적으로 권세에 복종했지만 죽음으로서 그 권세를 깨뜨렸고, 부활을 통하여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이 세상에 궁극적 방향이라고 믿게 한 권세들의 망상의 힘을 해제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용9)

보다 구체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질문 해결을 위한 '기독교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서는 바리새인의 태도, 즉 율법이나 결의론을 사용하거나 사두개인의 태도. 세상의 힘을 획득하여 바람직한 목표를 위해 사용, 바꾸어 말하면 세상 권세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대해서는 함구한다.

9장. 혁명적 복종
사회 윤리에 대한 예수의 적실성(초대교회를 포함)에 대한 과소 평가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래서 마르틴 디벨리오스(양식 비평의 아버지)는“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필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변정 전통에서 발전된 도덕적 교원의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저자는 "가정 규례는 스토아 철학자로부터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증한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 스토아 철학은 나 중심, 그래서 아버지, 친구, 형제, 노예가 각기 따로 기록했다면, 가정 규례는 관계 중심, 즉 짝을 지어서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은 단수, 가정규례는 복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은 품위 있는 남자를 염두에 두고 최고의 자아상을 따라 살라고 요구한 반면, 가정 규례는 사회 위계 구조에서 최하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뿐만 아니라 가정 규례는 종속적인 위치에 사람에게 복종을 권면한 후 그 관계를 역전시켜 지배적인 위치에 사람들에게도 복종을 요구한다. 서로 상호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원래의 사회적 신분에 남아있고(고전7:24), 세상의 구조 속에서 모든 사람이 염려 없기를(32절) 도우려고 했고, 만약 자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거든 자유하라(21절)고 조언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22~23절)고도 권면한다. 인용10)

10장. 모든 영혼은 복종하라 : 로마서 13장과 국가의 권위
저자는 로마서 13장에 근거한 국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촉구하는 견해에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인용11)
‘신약 성경은 국가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로마서 13장은 이런 신약적 가르침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복음서는 세속 정부를 사탄의 주권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보는 강한 흐름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서 13장도 정부의 지배를 묵인하는 것일 뿐 현존하는 정부를 하나님이 인정하였거나 신적인 개입에 의해 어떤 나름의 주권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용12)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을 거부하고, 정부에 대한 복종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도덕적 독립성과 판단력을 여전히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가 권세를 가졌다고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존재하는 모든 정부는 하나님에 의해 규제된다. 그리고 정부가 시행하거나 시민에게 요구하는 일이 무엇이든 다 선하지는 않다. 그것은 가이사를 향한 경배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권력에 자신을 죽이게 허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1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칭의
마르쿠스 바르트는 2장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핵심 이슈는‘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하나의 교제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갈2:14) 그래서 칭의는 하나의 사회적 사건, 곧 관계를 바로 잡는 것, 화평을 토대로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고,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은 변화된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창조계가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인용13)

12장. 어린양의 전쟁
역사의 과정에서는‘손잡이’를 잡기 위한 전략적 희생이 전제되었다. 바람직한 방향에 기초를 선택하기만 하면, 사회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스스로 혹은 사회 전체적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우리가 확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설정된 이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효율성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도덕적 척도가 된다는 생각이다. 인용14)
그러나 그 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역사가 진행해 나가야 할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할만한 자격이나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기에 역사의 과정에 관한 물음과 관심은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죽임당한 어린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시다'라는 말의 의미는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닌 십자가와 부활 간의 관계이며 그리스도는 역사를 통제할 모든 손잡이(효율성)를 포기한다고 하였다. 이때 포기, 즉 패배는 목적을 이루겠다는 '강박감'을 포기한 것으로 사탄과 열심당이 제시한 권력의 포기이며, 이는 대적들과 소외된 자들과의 화해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인 외관상의 패배일 뿐이다. 그 결과 우주적 관계 속에서 위대한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인용15)

나가면서
현대의 정치와 경제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우리는 그 구조(권위, 권세)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BC의 구약과 AD 1세기에 씌여진 신약 성경의 현대적 적용점은 무엇일까? 그런데 21세기에 와서도 그 적용점은 초대 교회(공동체)가 그 시대에 고민했던 사회적 윤리와 정치적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못한 듯 하다. 그리고 부지불식간 교회 공동체는 그 존재 자체로만 세상을 침노하는 무서운 사회적, 정치적 집단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예수의 정치학’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가 필립 캐링턴 대주교는 획기적인 신약 전승 비평 연구서인「초기 기독교 교리 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 내용에 주목하는 이유다. 벗어버리라! 복종하라! 살피라! 저항하라! 인용16)

메노나이트(재세례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 전통에만 갇히지 않았던 신학자 요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다양한 문헌과 신학적 주장 그리고 석의(釋義, exegesis)를 통해 자신이 기독교 평화주의자임을 변증하고 있다.

요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회에 대한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고 권고하지는 않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또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말하거나 제시하지 않는다. 인용17)

요더는 10장의 말미에 복종(surbodinstion)은 자발적 의지를 통해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고, 순종(obedience)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완전히 접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른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열심당이거나 사두개파적인 열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양심, 자발적 헌신 인용18)을 통해 끊임없이 이 시대를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분별력과 지혜는, 곧 하나님이다. 그 분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었던 선조들처럼 우리만의 현재의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채우고 이야기해야 한다. 요더의 주장처럼 교회 공동체라는 개인이 아닌 대안 사회에 대한 꿈을 꾸는 것도 좋고, 인용19) 사회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말릴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내려놓을 것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수가 포기한 것은 폭력이라기보다는 강한 자들로 하여금 약한 자들의 존엄함을 무시하도록 만드는데도, 곧 목적을 이루겠다는‘강박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용20)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우리 싸움의 아니라‘야웨의 전쟁’인용21) 이라는 것, 그 효율성은 죽어서는 살아나고, 살아서는 죽는‘십자가의 역설’에 있다는 것이다. 인용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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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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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啄同時)를 꿈꾸며...

공자가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덩치는 산만하고 생긴 모습은 우락부락한데 머리는 울퉁불퉁 짱구인 남자, 공인회계사 자격증(CPA)를 가졌고 학자 출신인데 청와대 별정직을 꿈꾸며 시내에서 사설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남자를 우리 시대는 어떻게 평가할까!

공자가 말하는 사람은 또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 좋은 음악을 듣고 앵콜을 청할 줄 아는 사람, 예의 바른 사람, 과묵한 실천자, 책임감 있는 리더,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 공적인 일에 사사로움이 없는 사람, 평범하되 비상한 사람, 멋과 맛을 아는 사람, 섬세함과 애틋함을 동시에 가진 전문가, 분명한 철학과 방향이 있는 리더,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게 하는 사람, 중심을 잡고 제대로 서 있는 사람, 아는 만큼 현장에서 땀 흘리기를 마땅히 여기는 사람, 정의롭고 정의를 실천하는 지식인 등을 군자로 보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덕목의 중심에 인(仁)을 두었다.

그 인(仁)을 안연에게 설명하기를 “내가 실체라는 생각을 넘어 관계라는 각성에 이르면 인이 되지. 단 하루라도 내가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온 세상이 본래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것임을 환히 알게 되리라. 물론 이런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거지 결코 남이 해줄 수 없는 거야.” 인간은 실체가 아닌 관계요, 그 관계를 흐르는 에너지, 아니 물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남들과 구별되기에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남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특별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전 세계가 따라서 바뀐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나를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 공자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을까?
공자가 향했던, 모델로 삼았던 시대,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나라나 집안을 경영하는 자는 모자람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근심하고, 또 가난을 근심하지 않고 평안하지 않음을 근심한다. 대개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모자라지 않고, 평안하면 기울지 않기 때문이다.”의 공자의 말씀에서 한 나라의 정치 경제적 구도는 ‘성장보다는 분배’에 방점이 찍히고 있다. 그 시대를 이끌 수 있는 리더는 인(仁)을 실천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리더, 즉, 이미 말이 아닌 몸, 아니 세포까지 인(仁)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정치 지도자를 기대한듯하다.

그 공자는 도가와 법가 사이, 개체와 전체 사이, 이상과 현실 사이 그리고 한 사안이 가진 둘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그 당시에 합당한 이치를 찾는 가장 날카로운 선택을 필요했던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중용을 지향했다. 중용이 지향하는 좋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였다.

그런데 그 길은 좁은 길이요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오솔길이요,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라서 가는 사람이 적고 힘겹고 소외된 길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비관적인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길이다. 문제를 사회 구조의 탓으로 돌리며 뒤로 물러나 조소하는 은둔의 길도 아니요, 그저 제 한 몸의 안락을 위해 이념과 지식을 파는 참여 일변도의 길도 아닌 그 사잇길, 안될 줄을 번연히 알면서 뚜벅뚜벅 행하는 정의의 길이었다.
미래 지향적 사람, 그 공자는 자신의 나라를 떠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천하를 주유하면서 당대의 현실 정치 시장에서 두루 경쟁하면서 설득력을 획득해 온 ‘땀 냄새 밴 존재 증명서’ 논어를 써내려간 셈이다.

그 공자가 우리에게 손짓한다. “밥 먹을 땐 밥만 먹고 잠잘 땐 잠만 자는 것 아무리 헐한 음식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고. 멋을 추구하되 멋에 빠지지 않고 주변과 어울리도록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고 섬세함과 애틋함의 세계를 추구하라.”고

그 진리의 길은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 먼저 간 쿵푸(功夫)의 고수(高手)에게 한 수 한 수 배우며 내가 하수(下手)임을 인정하고 아직은 어렵지만 그 길을 올곧게 가 줄탁동시(啐啄同時) 순간을 기다리며 정진할 뿐이다. 어쩌면 그 길은 내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 그 자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인도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사람으로 통한다. 그 길을 배움과 익힘을 함께 하는 사람, 동지요, 동반자요, (우리식의 표현) 동역자들 끼리 그 진리를 논하고 소통하며 소중한 만남을 통해 우리 함께 그 길을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줄탁동시(啐啄同時) :
닭이 알을 깔 때에 알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하여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이라 함.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행하여지므로 師弟之間(사제지간)이 될 緣分(연분)이 서로 무르익음의 비유로 쓰임.(네이버 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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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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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을 읽고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유시민지음(2013.10.21.초판)/돌베게/268쪽

지난 2007년 10월 3일 오후 3시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책은 그 단독 회담의 246분간의 기록을 저자(유시민)의 견해를 붙여 풀어낸 내용이다.

10.4 공동선언의 배경(근간)이 되었던 10월3일의 회담은 5년이 지난 2012년 10월 8일, 국감장에서 새누리당 의원인 정문헌의 폭로로 세상에 그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화록은 대외비 문서로 분류된 국가 기밀 문서였고 국회의원이 국감장에서 면책 특권을 악용한 정략적 도구가 되기에는 매우 예민한 문서였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리고 왜 그는 부정확한 정보-대화록이 공개된 이후 확인됨-의 발췌본(요약본)을 가지고 확신에 찬 어조로 폭로하게 되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을 민족-남한이라는 말이 더 가깝겠다-의 반역자로 몰게 되면 그들이 얻는 반사이익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 둔 시점에서 폭로했을까? 당시 대통령 선거를 이념 선거로 몰아가려는 고도의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대목이다.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과 북의 대화의 결과로 여러 차례 공동의 합의를 도출했고 선언, 합의나 합의서 그리고 성명서 형태의 결과물을 역사적인 자료를 남겨 두었다.
그 중 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필두로 노태우 정부의 12.31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10.4공동 선언 등은 의미 있는 결과물들이다. 남북 정상 간의 대화는 어느 날 갑자가 이루지지 않는다. 정상 회담을 위해서 사전에 실무자들은 의제를 설정하고 수차례 실무 접촉을 한 후 정상은 만나서 사인(결과물)하는 마지막 절차만을 이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확대하자면 하나의 선언이 나오기까지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지난 세월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찾아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용기 그리고 의지가 묻어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 충실한 과정을 통한 결과, 사전 징후나 징조를 통해 현상이 있을 뿐이다.

NLL(Northern Limited Line),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대로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NLL이다. 뭍에는 DMZ 이라는 명확한 경계가 있지만 정전 협정문에 써 놓지 못한 해상의 안전지대(SAFETY ZONE)가 문제다. 특히, 영화 연평 해전에도 그려진 그 서해 5도(우도, 연평도, 소청동, 대청도, 백령도)는 이미 남한의 생활의 터전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서해상의 경계선을 긋기가 만만하지 않다. 영해, 영공의 경계는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과 주권의 바탕을 이루는 국토(바다, 하늘 포함), 바꾸어 말하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국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화록 전문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소시민이지만 남과 북의 정상이 나눈 대화를 꼬투리를 잡기보다는 결과물(선언서)을 보고 그 이후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이행하느냐는 게 더 큰 관건이 아니었을까? 남과 북의 관계가 얼어붙은 계기가 어쩌면 이 폭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남과 북의 차이를 굳이 찾아보자면 두 단어 자유와 자주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어쩌면 한 자 유(由)와 주(主)의 차이일 수 있겠다. 법학 개론을 들었던 대학 시절이 생각난다. 법은 물 흐르듯 하는 것, 물이 더 잘 돌게 하기 위해서 가는 길(去) 앞에 삼 수(氵)를 변으로 쓰는 것(法)이라고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 법치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다스리게 하는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옳은 말이다. 남과 북의 차이를 법의 의미와 연결해보면 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국가의 통치를 스스로 하게 할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할 것을 내(?)가 주인 되게 할 것이냐, 유(由)와 주(主)의 차이, 법의 운용의 차이로 더욱 분명해진다. 어쨌든 국가의 주체는 국민(인민) 한사람 한사람이고 그 결정도 그들의 몫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통일을 위해서 평화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대원칙이 된 지 오래다. 이젠 남북관계의 바로미터가 된 7.4 남북 공동성명의 세 단어 자주적, 평화적, 민족적-과거 교과서에서는 민족적 대신, 민주적이라고 썼다.-이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만약, 두 정상의 합의대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건설되고 인천과 해주간 해로가 직통 연결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바다를 둘러싼 여러 분쟁들이 줄어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6.15 공동 선언 이후 개성으로 가는 길을 막는 이가 없듯이 해주로 가는 길도 활짝 열렸다면 새로운 전기가 마련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북의 핵 보유의 궁극적 목표는 체제안전과 평화보장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북의 속내는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것이다. 잘못 건드리면 내 죽고 네 죽는다는 식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을까? 자기는 죽고 싶지 않은데 힘이 약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핵문제는 내치보다는 외치의 통치 행위로 보인다. 여튼 핵은 한반도 남과 북 어디에도 두어서는 안되는 민족의 생존이 걸린 상종조차 해서는 안되는 망측한 괴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후 우리 나라는 잠정적 특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여정은 멀기만 느껴진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을 부르던 그 통일이 노래의 가사만큼 단순하지 않다. 과거 동독의 수십만 인구가 대량 이탈하는 특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급속한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 된 한반도를 향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남북의 교류를 확대해 가야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수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부탁한다. 이성, 감정과 충동 사이에서 자신의 잇속만 차리다가 소탐대실하지 말았으면 한다. 원하는 정권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외교 관례를 깨는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 북과의 관계는 갈수록 냉전 일로로 가는 자가당착적 소인배의 행위는 그만 하자. 시시때때로 북풍을 국민의 솥뚜껑(?)으로 등장시켜 놀래킨다하더도 그 약발도 곧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디 저자의 표현대로 ‘친미를 하되 친미주의자는 되지 말고 반미를 하되 반미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친미와 자주가 반대말은 아니다. 친미국가이면서 자주국가일 수 있다.’ 라는 표현이 호사가들의 말장난이 아니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영원한 공존을 꿈꾸는 우리 민족이 빛바랜 이념의 동굴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글로벌 세계 환경이라는 현실의 밝은 빛을 바라보고 세계인으로서의 꽃을 활짝 피울 때까지 우리 앞에 펼쳐진 장도에 오르자. 이를 위하여 혜안과 용기 그리고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의미있는 노력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하나된 우리 민족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서는 곧 다가올 현실을 준비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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