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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치학 (양장) ㅣ IVP 모던 클래식스 5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신원하.권연경 옮김 / IVP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수의 정치학을 읽고
존 하워드 요더, 신원하, 권연경 옮김. 446쪽, 초판 2007.10.10(2014.2.10, 초판 5쇄), IVP, 서울시 마포구
복음은 언젠가 실제로 일어났던 하나의 이야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입했던 상황이 다분히 전형적인 것이었음을 유념해야 하는데 (이전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라는 뜻에서),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그가 이 땅에서 상대했던 세력들은 정부, 제도적 종교, 민족주의 사회적 불안 등과 같이 인간의 역사 속에 언제나 존재하는 그런 요소들이었다. - 도드(C.H. Dodd) '하나님 나라와 현상황 Christian News-Letter, 1940년 2월 29일자, 부록31호. (표지에서)
들어가면서
요즘 나는 어떤 문제들을 바라볼 때 개인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를 구분하곤 한다. 2007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은 ‘개인의 영성 문제가 아닌 사회적 영성 문제’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계기가 있었다. 우리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이 아닌 공동체, 즉 사회적, 구조적 문제로 진단하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보수적 기독교 환경에서 성장한 터라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 개입하는 것은 먼 나라 얘기로만 치부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기로는 예수의 말구유 탄생을,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초라하고 비참하게 탄생했다는 식으로 이해했지만, 중동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집주인의 최대한의 호의와 배려 속에 출생한 것이라는 이야기-‘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는 우리의 고정 관념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접근하기는 내 깊이가 턱도 없이 모자람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단편적으로 듣거나 막연히 알았던 내용들의 편린이라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일독(一讀)으로는 고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면서,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여러 가지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지나온) 고민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저자의 견해를 따라가 본다.“예수의 정치학은 위험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의 인생이 결코 어제와 똑같을 리 없는 까닭이다.”라는 김두식 교수의 문구를 염두에 두고서...
서문
서문에서 요더는 자신을 기독교 평화주의자이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초판에 밝힌 ‘성경적 현실주의’는 성경적 세계관의 통찰을 윤리의 영역에 적용하는 시도라고 소개하면서, 성경적 현실주의는 전통적인 현학적 성향에 빠지지 않은 채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의 모든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려 하면서도 성경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그런 접근법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1장. 메시아적 윤리의 가능성
주류 윤리학은 '예수는 규범(the norm)이 아니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저자는 신약학과 현대 윤리학의 접점(接點)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 저작(著作)의 목표가 예수가 사회 윤리에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 것을 증명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가 윤리적 규범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비폭력적인 예수를 정치적으로 본다면 실패자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현실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적 정치활동은 정치적으로도 반향을 일으켰으며, 사회변화에도 공헌했다고 본다. 인용1)
2장.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마리아의 찬가, 사가랴의 찬가, 세례요한의 선포 그리고 헤롯의 반응 등(눅1:46, 68, 3:7)-을 통해 예수의 사역을 사회 정치적 현실 속에서 오실 자의 사역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성경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눅3:21)이라는 표현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아들의 신분을 인정하는 사건이 아닌 사명을 위한 부르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예수의 광야 시험은 경제적인 선택의 문제, 사회 정치적 선택의 문제, 기적 표현에 대한 문제를 통해 예수가 무리를 먹이는 왕임을 증명하고, 천하 만국에 대한 열망의 유혹이자 정치적 명성에 대한 유혹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12사도를 임명한 것도 종교 기득권자들의 조직적 반대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실체를 공식 출범하는 것이고, 인용2) '예루살렘을 향하여'라는 말에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폭동과 정적주의(quietism) 양자에 대한 정치적 대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사탄의 광야에서의 첫 번째 기회, 예루살렘 입성의 열렬한 환호를 받을 때의 두 번째 기회, 그리고 베드로의 무력으로 인한 무장봉기 가능성이 있었던 세 번째 기회, 이 모두를 거절 한다. 인용3)
3장. 희년의 의미
희년이 요구하는 4가지는 땅의 휴경, 빚의 탕감, 노예 해방, 가족 재산의 환원 등이다. 휴경년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고 포기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안식일의 완성자라고 말하며,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그 당시 만연했던 사회 경제적 문제의 대안책으로 희년은 빚을 탕감하고, 빚을 갚지 못해 종으로 전락한 자들을 해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과부의 두 렙돈 비유를 들며, 십일조만 내면 이룰 수 있었던 편리한 율법 완수와 도덕적 자기만족의 수준을 넘어서려는 것이며 사람들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단계로 초청하고자 했다. 인용4)
4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라
구약의 기사-애굽 군대의 수장(출14:13~14), 아말렉과의 전쟁(출17장), 여리고성의 점령(수6장), 기드온의 미디안 군대 격파(삿7장)-는 하나님이 대신 싸우신다는 믿음에의 순종의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숱한 나라들과의 이스라엘의 전쟁 역사(대하 14:11, 16:7~9, 20:17, 왕하 6:11)들도 마찬가지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기록들은 예수의 왕국 계시를 강화한다. 인용5)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기록들을 비현실적(상징적)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장. 비폭력적 저항의 가능성
예수님 당시의 효과적인 비폭력 저항의 예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저항으로 가이사랴에 옮긴 가이사의 상, 빌라도의 수로 공사 자금횡령에 대한 시위, 칼리굴라 상에 대한 예루살렘 시민들의 시위를 받아들인 페트로니우스 등의 예시를 들면서 예수도 열심당의 저항 방식, 칼을 거부하고 이런 비폭력적 저항 방식을 택했다고 말한다. 인용6)
6장. 시산표(試算表)
십자가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십자가는 대가를 미리 계산한 뒤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의 종착역이며, 사회적 현실로서 원치 않는 세상 속에 도래할 새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최대의 유혹은 사용할 수 있는 폭력적 방법들을 활용하여 정당한 혁명을 도모하고, 이로써 본연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비정치적인 방법으로 정치에 관여하였다. 인용7)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꼭 짚고 것은 역사의 예수와 교리의 예수를 분리시키지 말고, 정치와 분파주의를 분리시켜서도 안된다.
7장. 그리스도의 제자와 예수의 길
6장까지의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본 신약과 윤리학의 접점에 관한 논의를 1차적으로 정리하고, 7장부터는 실제 사도 시대의 윤리적 전통의 몇몇 흐름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개인적이어서 사회구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인식 없다는데 반증을 제시한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권세 개념의 교리를 현대의 관점들과 질문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방식으로 조명한다.
8장. 그리스도와 권세
권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의 변화 가운데도 일을 일어나게 만들 수 있는 모종의 능력이며, 구조적으로 어떤 사회 사물이나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정형화된 면모들을 일컫는다. 골1:15~17에서 함께 섰다(subsist)는 영어의 시스템(system)과 어원을 같이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체계화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들은 피조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8)
요더는 사회적 구조를 1)종교적 구조 : 안정된 고대 원시 사회의 종교적인 토대 2)그리고 지적구조 : -학, -주의 3) 도덕적 구조 : 법규와 관습 4) 정치적 구조 : 전제군주, 시장, 학교, 법정, 민족, 나라 등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조들은 창조 질서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예수는 자발적으로 권세에 복종했지만 죽음으로서 그 권세를 깨뜨렸고, 부활을 통하여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이 세상에 궁극적 방향이라고 믿게 한 권세들의 망상의 힘을 해제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용9)
보다 구체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질문 해결을 위한 '기독교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서는 바리새인의 태도, 즉 율법이나 결의론을 사용하거나 사두개인의 태도. 세상의 힘을 획득하여 바람직한 목표를 위해 사용, 바꾸어 말하면 세상 권세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대해서는 함구한다.
9장. 혁명적 복종
사회 윤리에 대한 예수의 적실성(초대교회를 포함)에 대한 과소 평가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래서 마르틴 디벨리오스(양식 비평의 아버지)는“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필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변정 전통에서 발전된 도덕적 교원의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저자는 "가정 규례는 스토아 철학자로부터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증한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 스토아 철학은 나 중심, 그래서 아버지, 친구, 형제, 노예가 각기 따로 기록했다면, 가정 규례는 관계 중심, 즉 짝을 지어서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은 단수, 가정규례는 복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은 품위 있는 남자를 염두에 두고 최고의 자아상을 따라 살라고 요구한 반면, 가정 규례는 사회 위계 구조에서 최하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뿐만 아니라 가정 규례는 종속적인 위치에 사람에게 복종을 권면한 후 그 관계를 역전시켜 지배적인 위치에 사람들에게도 복종을 요구한다. 서로 상호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원래의 사회적 신분에 남아있고(고전7:24), 세상의 구조 속에서 모든 사람이 염려 없기를(32절) 도우려고 했고, 만약 자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거든 자유하라(21절)고 조언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22~23절)고도 권면한다. 인용10)
10장. 모든 영혼은 복종하라 : 로마서 13장과 국가의 권위
저자는 로마서 13장에 근거한 국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촉구하는 견해에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인용11)
‘신약 성경은 국가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로마서 13장은 이런 신약적 가르침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복음서는 세속 정부를 사탄의 주권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보는 강한 흐름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서 13장도 정부의 지배를 묵인하는 것일 뿐 현존하는 정부를 하나님이 인정하였거나 신적인 개입에 의해 어떤 나름의 주권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용12)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을 거부하고, 정부에 대한 복종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도덕적 독립성과 판단력을 여전히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가 권세를 가졌다고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존재하는 모든 정부는 하나님에 의해 규제된다. 그리고 정부가 시행하거나 시민에게 요구하는 일이 무엇이든 다 선하지는 않다. 그것은 가이사를 향한 경배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권력에 자신을 죽이게 허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1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칭의
마르쿠스 바르트는 2장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핵심 이슈는‘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하나의 교제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갈2:14) 그래서 칭의는 하나의 사회적 사건, 곧 관계를 바로 잡는 것, 화평을 토대로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고,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은 변화된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창조계가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인용13)
12장. 어린양의 전쟁
역사의 과정에서는‘손잡이’를 잡기 위한 전략적 희생이 전제되었다. 바람직한 방향에 기초를 선택하기만 하면, 사회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스스로 혹은 사회 전체적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우리가 확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설정된 이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효율성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도덕적 척도가 된다는 생각이다. 인용14)
그러나 그 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역사가 진행해 나가야 할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할만한 자격이나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기에 역사의 과정에 관한 물음과 관심은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죽임당한 어린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시다'라는 말의 의미는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닌 십자가와 부활 간의 관계이며 그리스도는 역사를 통제할 모든 손잡이(효율성)를 포기한다고 하였다. 이때 포기, 즉 패배는 목적을 이루겠다는 '강박감'을 포기한 것으로 사탄과 열심당이 제시한 권력의 포기이며, 이는 대적들과 소외된 자들과의 화해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인 외관상의 패배일 뿐이다. 그 결과 우주적 관계 속에서 위대한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인용15)
나가면서
현대의 정치와 경제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우리는 그 구조(권위, 권세)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BC의 구약과 AD 1세기에 씌여진 신약 성경의 현대적 적용점은 무엇일까? 그런데 21세기에 와서도 그 적용점은 초대 교회(공동체)가 그 시대에 고민했던 사회적 윤리와 정치적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못한 듯 하다. 그리고 부지불식간 교회 공동체는 그 존재 자체로만 세상을 침노하는 무서운 사회적, 정치적 집단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예수의 정치학’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가 필립 캐링턴 대주교는 획기적인 신약 전승 비평 연구서인「초기 기독교 교리 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 내용에 주목하는 이유다. 벗어버리라! 복종하라! 살피라! 저항하라! 인용16)
메노나이트(재세례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 전통에만 갇히지 않았던 신학자 요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다양한 문헌과 신학적 주장 그리고 석의(釋義, exegesis)를 통해 자신이 기독교 평화주의자임을 변증하고 있다.
요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회에 대한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고 권고하지는 않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또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말하거나 제시하지 않는다. 인용17)
요더는 10장의 말미에 복종(surbodinstion)은 자발적 의지를 통해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고, 순종(obedience)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완전히 접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른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열심당이거나 사두개파적인 열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양심, 자발적 헌신 인용18)을 통해 끊임없이 이 시대를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분별력과 지혜는, 곧 하나님이다. 그 분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었던 선조들처럼 우리만의 현재의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채우고 이야기해야 한다. 요더의 주장처럼 교회 공동체라는 개인이 아닌 대안 사회에 대한 꿈을 꾸는 것도 좋고, 인용19) 사회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말릴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내려놓을 것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수가 포기한 것은 폭력이라기보다는 강한 자들로 하여금 약한 자들의 존엄함을 무시하도록 만드는데도, 곧 목적을 이루겠다는‘강박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용20)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우리 싸움의 아니라‘야웨의 전쟁’인용21) 이라는 것, 그 효율성은 죽어서는 살아나고, 살아서는 죽는‘십자가의 역설’에 있다는 것이다. 인용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