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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김희림 지음, 길다래 그림 / 자음과모음 / 2018년 1월
평점 :
꼰대의 기우(杞憂)
-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p263, 자음과 모음, 서울 : 김희림, 2018. 1
설 명절 나른한 오후에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갔다. 아내는 티케팅 하러 가고 나는 마트 안 서점에 잠간 들렀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서점 직원에게 묻는다. “...철학을 팝니다. 있어요. 작가는 김희림예요”
컴퓨터를 검색한 직원이 대답한다.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자음과 모음에서 나온 거 맞나요?”
“예”
“한 권 남았네요.” 진열대까지 좇아 온 직원이 한참을 찾더니 책 한권을 건네준다.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라는 노란 표지의 책이다. 글자보다 훨씬 큰 쉼표와 마침표가 눈의 띈다.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책을 펼치기 전, 표지부터 찬찬히 살펴본다. 세로 제목, 지은이, 그린이, 출판사 등이 찍혀 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쉼표와 마침표를 크게 한 이유는?’ ‘여하튼?’ ‘철학을 (시장에서 통용되는 재화도 아닌데) 어떻게 팔지? 철학책을 아니면 책의 내용을 판다는 의미일까?’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될 시간이다. 뒤표지는 다 읽고 다시 자세히 읽어 보기로 하고, 지금은 흑인 슈퍼 히어로를 만나러 극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5관 J열 3번, 4번.
책은 5부로 구성되어져 있다. 철학을 쓰고, (개그로) 읽고, (비틀어) 보고, (요만큼만) 또 읽는다. 그렇게 그 철학으로, 마침표 없는 철학, 앎의 속성을 사유하는 재미있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탐험한다. 저자는 이 책을 ‘철학 무용론’을 제기하는 21세기 아데이만토스에게 철학의 쓸모(생각의 씨를 뿌리는 것?)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책 읽는 사회가 읽지 않는 사회보다는 더 나은 우리의 삶을 담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었을까? 여전한 의문 속에 책의 제목부터 씹어 보자.
제목에는 ‘여하튼’이 들어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어쨌든, 하여(何如)튼, 아무튼 등과 비슷한 말이다. 그 뜻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 이다. 이 단어에서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쉼표와 마침표’에서는 ‘앎의 문장에 마침표는 없되 오직 쉼표만이 그 역할을 대행한다.’(p53)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인용을 통해 ‘주체와 객체는 수건돌리기 하듯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이 무한한 해석의 마침표는 영원히 찍히지 않는다.’(P53)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철학’은 책의 곳곳에서 다룰 것이니 차치하고라도, ‘팝니다’는 공짜가 없었던 공자를 처음부터 모셔옴으로써 철학을 파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자본에 의해 헐값이 된 지식과 노동에 대한 대접을 바라고 인류의 스승 공자에게 예의를 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유명 철학자의 철학을 한 두 문장으로 소개한다. 바꾸어 말하면 핵심 정리인 셈이다. 그 철학으로 우리의 현실과 접목을 시도한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우리 현실이 그동안 공부한 철학을 불러오게 했겠지만) 그리고 인용이나 나름의 코멘터리로 글을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모든 철학자가 고민했던 모든 것, 세상 만사의 모든 것을 사유하고 철학한다. 여태까지 학교(?)에서 배운 철학하는 방법을 통해 철학하는 선배를 모셔오거나 자신의 필설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개인적으로 빵 터진 부분이 몇 군데 있다. 그 중에서 한 두어 개 소개하자면, 꼰대 보존의 법칙에서 오늘날 어른들이 자녀 세대를 걱정하는 내용이나 700년 전(1311년) 영국의 펠라기우스가 “요즘 대학생들 한숨만 나온다...”로 시작하는 꼰대의 불변하는 기우(杞憂)는 시간과 장소만 변했을 뿐 그대로다. 그리고 아낙시네메스의 공기와 과자 봉지에 공기를 넣어 부풀게 한 과자 회사의 꼼수를 빗댄 글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통쾌함이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사는 이 시대를, 가늠이 되지 않는 독서와 공부의 깊이로 오늘날 젊은이의 고민과 현실에 대한 풍자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때로는 유쾌하고 발칙하게, 때로는 진중하게 자신의 언어로 채운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산타 할아버지와 푸코를 모셔 와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구체성과 거대함을 논한다거나, 윌리암 제임스와 장자, 이산화 질소와 나비를 대비하는 서늘한 망상을 따라가면서 환각이나 망상을 경험하게도 한다. 개인의 가치나 개성을 존중해야하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을 빌려 민주주의의 핵심을 꼬집기도 한다. 본능과 직관과 해체라는 디오니소스의 핵심을 통해 학(學)의 지경이 넓혀지리라는 기대도 품게 한다. 플라톤의 이성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이 전쟁을 일으켜 만 번의 살인을 자행하는 인간의 모순을 비틀기도 한다. 서양의 시선으로 동양을 이해한 화이트 헤드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젊은이의 기백은 나도 모르게 두 손 꼭 쥐어 보게 한다.
시인 장정일은 80학번 시대를 통칭해서 ‘60년산 우리 시대’라고 정의(Define)했다. 장정일(1962년생)의 삼중당 문고 문법에 열광했던 20대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 본다.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불경스럽고 외설스러운 언어로 가득 채웠던 그의 작품들에 매료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젊은 날의 방황을 제도권 밖의 언어로 풀어내는 통쾌함이 나를 시원하게 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문고판의 책들은 읽기조차 불편해졌다. 솔직하게 물리적으로 읽기가 만만하지 않다. 어느새 노안이 온 것이다.
얼마 전 이스라엘을 함께 다녀왔던 초등학교 5학년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면서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영어를 부담 없이 쓰는 도도함이 부러웠고, 외국인을 대하는 자신감이 놀라울 뿐이었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 시대를 실감나게 살고 있다. 세계화의 바탕에는 언어라는 소통의 수단을 깔고 있다. 얼마 전 윔블던에서 4강을 차지한 정현(1996년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경기를 이기고 인터뷰에서 영어로 농담도 하고 한국말로 한국 팬들에게 인사하는 여유와 당당함을 보면서 내심 뿌듯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저자가 철학을 소재로 책을 냈다. 자음과 모음이 작은 출판사도 아니다. (출판사가 그냥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실력과 노력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김희림이 아니더라도 다른 김희림이, 앞으로도 또 다른 김희림이 끊임없이 해 나갈 일이다. “분명한 의견 하나를 갖기 위해서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야 한다.”(p252)는 자각과 겸손은 중요하다. “달걀은 바위를 깨지는 못하지만, 온 몸을 바쳐 바위에 몸을 부딪쳐서 산산조각 남으로 바위의 견고함을 폭로할 수는 있다”(p218) 는 비장감으로 더욱 공부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선대의 스승들이 가졌던 고민과 결과물을 흡수하고 반성하여 그 위에 벽돌한 장 올려놓는데서 그치지 말고, 저자만의 현현epiphany을 통해 철학으로 세계에 거대한 담론과 방향을 제공하는 키잡이가 우리에게서 나오기를 바란다. 지금은 대학생들에게 한숨 말고, 격려와 존경을 담은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야 할 때이다. 그 전에 꼰대의 기우부터 거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