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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기도하라 - 성경에서 찾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
송태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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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찾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 Biblical Teachings on Prayer

송태근, 그러므로 기도하라, p248, 샘솟는기쁨, 2020. 1

 

결국 성경은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전부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199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알아갑니다. 제대로 알아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관계는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계획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필요에 대해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낮은 수준의 기도인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간구를 날줄과 씨줄처럼 엮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사용하십니다.(18) 그러므로 기도는 너머 계신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경험하고 경탄敬歎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915-17)

 

족보 뒤에 면면히 흐르는 사건들은 인간이 토해낸 역사의 얼룩들을 비춰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역사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신 열심을 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43) 나를 향하여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기 수준을 근거로 좌절한다는 것은 지독한 교만입니다.(44) 기도는 내 뜻이 포기되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일희일비할 것도, 내가 이루었다는 교만함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사무엘하 71-9)

 

아론과 훌은 전쟁의 승패가 전쟁 현장에 있지 않구나!’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영적인 원리를 모세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전쟁의 승패는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 있다는 것을 모세는 알았습니다.(53) 싸움은 그 결과의 승패를 쥔 하나님께 있습니다. 싸움의 승패는 기도하는 현장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현장은 쌓아도 모래성이요, 기도하지 않는 현실은 이루어도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현장이고 현실입니다. (출애굽기 178-12)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에 있습니다. 믿는 자가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서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61) 기도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간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만 내 존재를 의탁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누리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이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야고보서 15-8)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보내신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73)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서 그분의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기도입니다.(79) 내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전제가 됩니다. 기도는 사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끝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1-5)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찬송을 주십니다. 찬송케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 눈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름 앞에 반응하게 한다는 말입니다.(90) 바울에게 빌립보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에 눈이 열려 찬송하게 된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과 깊이와 그분의 능력의 무한함을 경험했습니다.(93) 그러므로 찬송은 결국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1616-25, 시편 201-9)

 

고난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100)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를 회복하고 고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나라의 대표자를 병들게 해서 기도의 자리로 내몰았던 것입니다.(114) 인간이 가장 절망적이라고 하는 자리, 고난이라고, 답이 없다고 하는 자리일수록 하나님이 드디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자리라는 말입니다.(187) 그렇게 기도는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내가 할 수 없다고 나를 포기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입이 아니라 귀로 하는 것입니다. (요나 21-10, 열왕기하 201-17, 예레미야 331-3,사무엘상 110-15)

 

기도는 주권이 바뀌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 (121) 하나님 나라의 정권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싶다는 부르심이 기도입니다. 그 나라의 힘은 놀랍게 크고 무궁무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0)

 

기도는 오히려 지금 주님의 가르침처럼 그 기도를 통해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배우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대접하는 최고의 적극적인 태도이면서, 동시에 그 기도는 마지막 진짜 결론이 이웃사랑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행위여야 합니다.(16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 사랑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균형 잡힌 삶으로 나아가는 지렛대입니다. (다니엘 91-6, 마태복음 77-12, 느헤미야 14-11)

 

기도는 감추어놓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합니다. 우리 인생 속에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 끝까지 되돌려지지 않는 어떤 슬픔과 괴로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은 그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당신이 이루어 가시는 세상의 경영을 즉, 인간이 바라봐야 할 길을 보게 만드십니다.(235) 그 슬픔 속에 오롯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춰 놓으셨습니다. (236) 기도는 슬픔 속에서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상실이 때로는 더 큰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욥기 421-6, 빌립보서 19-11)

 

기도는 내 싸움이 아닙니다. 기도의 승패는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도는 내 싸움입니다. 내 안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세상 것들에 대한 의지와 신뢰를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오롯이 내 인생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속하신 주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께만 나를 맡기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싸움입니다.(32) “! 하나님이 하셨군요.” 깨닫는 순간 기도는 그런 우리의 영적 안목眼目이 열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의로움과 긍휼은 동의어입니다.(212)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리입니다. (빌립보서 44-7, 창세기 1822-33, 에스라 96-15)

 

PS: 이 책은 삼일교회 새벽 기도 시간에 저자 송태근 목사가 기도에 관한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인용한 성경 본문은 구약 13, 신약 7번입니다. 등장 인물은 욥과 아브라함에서 바울까지 여러 성경의 인물들입니다. 만약 내가 그 자리, 새벽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면 그 설교를 메모했을 것이고 그 감동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느낌이 휘발되기 전에 '그러므로 기도는...' 이라는 한 줄 요약으로 주신 감동을 붙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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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국문학 교수들이 추천한 글누림세계명작선
다니엘 디포 지음, 김경섭 옮김, 한창훈 해설 / 글누림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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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Friday) vs 방드르디(Vendredi)

- 로빈슨 크루소, p562, 글누림 출판사, 서울 : 대니얼 디포, 2011. 12

1709년 2월 2일 칠레 해안에서 650㎞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마사 티에라 섬 근처를 항해하던 영국선적 듀크호 선장은 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 섬에 상륙한 몇 시간 뒤 선원들은 염소 가죽을 온몸에 두른 맨발의 한 남자를 붙잡아왔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개해 보이는 그는 한참 동안 말을 더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을 본 게 4년 4개월 만이라고...”

1704년 10월, 사략선 (私掠船, privateer 국가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개인이 무장시킨 선박) 의 선원이었던 A. 샐커크는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 섬에 버려진다. 당시에는 이렇게 외딴 섬에 버려두는 형벌은 흔한 것이었으며, 버려진 이는 굶주림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생 염소와 바다표범, 산딸기로 연명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1709년 2월 그는 듀크호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배의 선장 로저스의 《세계 항해 이야기》를 통해 전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논픽션(Non-Fiction)이다. 여기에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덧붙여져 픽션이 탄생했다. 그 소설(Fiction)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이다.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은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원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세상을 두루 살펴 견문을 넓히는 게 꿈이었던 그는 마침내 가출을 감행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듯 했다. 그러나 그가 승선했던 배는 조난을 당하고 그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브라질에 안착한다. 그 생활도 잠시 자연의 섭리(사탕수수 농사)에만 성공을 맡기는 것이 분에 차지 않았던 그는 운명처럼 항해의 길로 또 나선다. 그러나 그 항해마저도 또 난파를 당하고 육지에 혼자 도착한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도착한 곳은 육지가 아니라 사방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저 멀리 보이는 암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그만 섬 두 개 외에는 육지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섬이었다.

그는 이어지는 불행의 끝자락에서 왜 신은 당신의 피조물을 이렇듯 무참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타격하시는 건지. 태어난 것조차 뼈저리게 원망할 만큼 구원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이렇게 완전히 무시된 구렁텅이 속으로, 처넣어 버리시는 건지. 이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살아남는 게 더 급했던 그는 괴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즐기자는 심정으로 조금씩 변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필요한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만드는 경지까지 이른다. 무인도에서 외로운 생활로 지치고 아프고 쇠약해지면서 죽음과 양심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그렇게 그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기의 진수를 보여줄 즈음(무인도에 도착한지 25년 즈음) 이방인이 그의 섬을 침범(?)한다. 우여곡절 끝에 야만인을 구출하고, 그 야만인을 노예로 삼는다. 그리고 그를 프라이데이(야만인)라 부르고 교화하여 훌륭한 헬퍼로 만든다. 그 후 외딴 섬에 온 영국 배의 반란을 진압하고 28년 섬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귀환한다. 그렇게 집을 떠난 소년은 35년 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서구 근대 문명과 제국주의 경쟁이 인류에게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자 로빈슨 크루소의 신화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에 프랑스의 한 작가가 로빈슨보다 프라이데이를 더 부각시키는 이야기를 새롭게 만든다. (같은 제국주의 국가이면서도) 남의 것을 가져다가 논쟁거리로 만들기 좋아하는 프랑스인의 기질이 잘 반영된 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지어진 이름 프라이데이를 방드르디(프랑스식 프라이데이)로 바꾼다. 그리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로빈슨이 방드르디에게 감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렇게 <로빈슨 크루소>를 한 방에 뒤엎어버린 프랑스의 작가는 미셀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이고 소설 제목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현대 소설의 잣대 중 진실성과 균형감은 중요한 요소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이 소설은 낙제점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상상력으로 씌여졌고, 제국주의나 중상주의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그 어떤 작품도 이 소설의 대중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강상중 교수도 필독서로 추천 했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가! 물론, 로빈슨 크루소는 하나의 이론으로 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한 분석이 열려 있는 텍스트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으로 윽박지르고(필요하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음) 기독교로 교화하는 서구 제국주의 논리를 우리가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6세기, 한 손에는 조총,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찾았던 코쟁이들의 이야기(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P437)가 먼 나라도 아닌 이웃 나라 일본이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만약, 난파를 당해 울릉도에 상륙한 코쟁이가 우리 조상(원주민, 야만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로 창씨 개명하고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면... 분명한 사실은 하나이다. 그러나 해석과 적용은 다양할 수 있다. 디포와 투르니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등장할 수 있다. 노예인 프라이데이가 스승 방드르디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성 금요일이 불타는 금요일이 될 수도 있다. 주체와 객체는 수건돌리기 하듯 끊임없이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즐겨보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한국에 처음 와본 외국인 친구들이 겪는 문화적 차이나 생경함에 리액션하는 외국인들의 반응이 매우 재미있고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 중에서 영국 편에서 제임스 후퍼와 친구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롭 건틀렛을 기리는 자전거 투어에 나섰다. (그 투어에는 친구, 건틀렛의 아버지 데이비드도 함께 했다.) 제임스 후퍼는 롭 건틀렛에 대해 “11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로 그 친구 때문에 자전거 동아리에 들어갔다”며 “우리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같이 탐험하고 최연소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같이 갔다”고 설명했다. 이후 두 사람은 2008년 ‘올해의 모험가 상’을 수상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됐다. 그러나 2009년 롭 건틀렛은 알프스 등반 중 안타까운 사고로 사망했다. 이에 제임스 후퍼는 자선 단체(One Mile Closer)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여 친구의 죽음이 개인의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승화시켰다.

굳이 TV프로그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모험심을 길러준다는 이 소설의 취지에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다.) 로빈슨 크루소의 기본 구조는 인공 낙원의 건설과 야만족의 위협, 그리고 총과 기독교에 의한 배제이다. 그것은 서양과 비서양(非西洋)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300여 년에 걸쳐 끝없이 재생산된 ‘로빈슨 크루소류 문학’, 즉 제국주의 문학의 주제가 됐다. 그 놀라운 생명력은 제국주의 또는 식민지주의를 유지시킨 근원적 허구 중 하나와 결부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근원적인 허구다. 그래서 “나의 손에... 성경책 한 권... 총을 끼고...”라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을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부디 오늘의 세계화와 로빈슨 크루소가 자유롭게 변용되고 재해석되어 ≪불타는 금요일, 태평양의 시작≫이 새롭게 씌여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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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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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을 읽고..

조지 오웰, 도정일 옮김, 123쪽, 1998.8.5 초판(2015.9.26. 1판 94쇄), 민음사, 서울시 강남구

동물농장은 풍자와 우화를 결합한 풍자 우화이자 상징이 많은 소설이다. 동물농장은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벼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이 소설이 발표될 당시 정치적 비판의 목적을 잃었을지언정 사회 심리적 목적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본명, 에릭 블레어)이 ‘동물 농장’을 통해 미래의 전체주의를 경계하고 있지만 소설의 동물농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너무나 닮아 있다.

먼저 동물농장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메이저의 연설을 통해 오웰이 꿈꾸는 세상을 들여다보자.

-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달프고 그리고 짧소.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가지 때문입니다. ...(중략)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11쪽
(중략) 무엇보다 동물은 동족을 폭압해서는 안됩니다. 힘이 세건 약하건, 똑똑하건 않건 간에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동물은 어느 누구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합니다. -14쪽

메이저의 연설은 동물 농장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바꾸고 싶은 현실을 일깨워 차별 받지 않는평등한 사회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다. 왜냐하면 집 까마귀 모지즈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슈가캔디 마운틴(신비한 하늘나라)’은 지상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메이저의 사상에 체계를 더해 ‘동물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계명을 만들어 구체적 행동 강령까지 만든다. 그 계명은 아래와 같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 자서는 안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26쪽

동물농장의 계명은 적과 친구를 명확히 구분하고 친구들끼리는 누구든 평등하고 특권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명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변해만 가는데 그 이유나 과정을 미리 인지하는 동물은 거의 없다. 그렇게 다수의 우매한(?) 동물들은 눈앞에 놓인 과업(?)을 수행하느라 과거의 약속들이 지켜지는지 감시할 힘조차 없어 보인다. 그래서 결국 그 계명들은

1.2.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3. 돼지는 옷을 입어도 되고 꼬리에는 댕기까지도 치장한다.
4.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면 안된다.
5. 어떤 동물도 ‘너무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안된다.
6.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등으로 변질된다.

동물농장의 계명은 몇몇 힘을 가진 동물들의 담합으로 적들은 친구들로 변하고 작은(?) 문구의 변화가 소수에게는 무소불위의 특권과 편리와 안락을 제공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과거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로 회귀하게 된다. 단지 그들이 꿈꾸는 평등한 사회는 클로버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 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주는 그런 사회였다. -78쪽

그리고 ‘과거 존스 시절...’ 운운하는 대목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면 과거 한국 전쟁이라는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를 악용해서 현재의 공동체 트라우마로 만들어서 다수의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을 옭아매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다.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하는 강한 권력에의 의지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GDP 성장을 가져왔지만 또 다른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물론 당분간은 분배량을 재조정(그는 감축이라는 말은 절대로 쓰는 법이 없고 언제나 재조명이라 말했다)할 필요가 있지만 ‘과거의 존스 시절에 비하면’ 사정은 이만저만 나아진 게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98쪽

잊지말고 기억하자. 권력은 견제와 감시가 없으면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몰라도 모두가 살만한 세상, 요순(堯舜)의 시대는 우리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 방 안은 고함소리, 탁자 치는 소리, 의심에 찬 눈길, ‘그게 아니라니까’라며 맹렬하게 부정하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보아하니 나폴레옹과 필킹턴이 카드 게임을 하다가 둘이 동시에 똑같은 스페이드 에이스를 내놓은 것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열 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123쪽

소수가 자기들이 든 것이 스페이드 에이스(♠ 최고의 것)라고 핏대 세우면서 주장하지만 그 노름(놀음)판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감시하지 않으면 속을 수 밖에 없는 엄옥한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늙은 당나귀 벤자민만이 아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 당나귀 벤자민만은... 지금의 사정이 옛날보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해지지 않을 것이며 굶주림과 고생과 실망은 삶의 바꿀 수 없는 불변 법칙이라는 것이었다. -114쪽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걸고 얻은 전리품이 나눔의 문제에서 불공정하다면 그것은 결국 불평등한 사회를 배태할 수 밖에 없다. 결국은 되돌리고 싶지 않은 과거로의 회귀를 불러올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부터 이 농장은 메이너 농장으로 불릴 것이며 이는 이 농장의 정확한 원래 이름인 것으로 알고 있다. -122쪽

동물농장의 세계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풍자를 위해 쓰여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 풍자가 더 광범한 적용범위를 갖게 하자는 것도 자기 의도였다고 조지 오웰은 밝히고 있다. 이 해명에서 오웰은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꾸는 것으로 끝날 뿐 본질적 사회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들을 감시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은 성공한다는 것 등이 그가 작품 동물농장에 싣고자 한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다. 동물농장 앞부분 내용 중에 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돼지들만의 몫으로 빼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웰은 바로 이 대목이 혁명의 부패가 시작되는 전환점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이는 동물들이 그 대목에서 돼지들을 차단할 있었다면 동물농장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러시아 사회주의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타락했고 그 타락을 막지 못한 체제로부터 사회주의는 다시는 회생할 수 없다. 이것이 오웰의 논리이다. 동물농장이 압축하는 메시지 하나는 동물들의 무지와 무기력함이 권력의 타락을 방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부조리, 이상향, 여론 조작, 선동, 욕심, 권력, 계급 등은 동물농장 뿐만 아니라 사회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까닭에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동물농장과 다를 바 없는 인간농장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크고 작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누구나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2016년 4월의 봄은 4년에 한번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선거의 계절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선동과 여론 조작 등 사회의 부조리가 여과 없이 표출되는 시기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겠다고 나서는 한량들의 선동에 속지 말고 그들의 과거 행적이나 약속의 이행 등을 찬찬히 훑어보고 그 과정을 감시하자. 그것을 위해서도 누구나 한번쯤은 꼭 읽어야 할 고전이 동물농장이다.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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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음 / IVP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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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따진다고 할 때는...
-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를 읽고

우종학, 260쪽, 초판 2009.04.07(개정판 2014.10.30, 개정판 3쇄 2015..11.20), IVP, 서울시 마포구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수 있으며, 종교는 맹목적 숭배와 잘못된 절대성으로부터 과학을 정화시킬 수 있다. 과학과 종교는 각각 서로가 더 번역할 수 있는 더 넓은 세계로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다. (106쪽)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우리는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일 수 밖에 없는 시대이다. 그래서 모든 용어 뒤에‘과학’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구체적 데이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객관성을 담보한 것으로 알고 대체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과학’은 우리 사회 전반에 중요한 잣대가 되었고 개인의 영역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성경을 과학이라는 잣대로 들여다보는 시도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에 관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입장을, 소위 ‘창조 과학회’가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병행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 기사에 관한 분분한 학적(學的) 해석들을 무.크.따.는 진화와 창조에 관한 논증을 통해 비교적 쉽게 잘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과 신학의 특히, 창조와 진화에 대한 지적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입문서 역할을 하기에 적절하다. 갈릴레오 재판을 종교 재판으로 보지 않는 내용도 새로웠고, 과학에서 과학적 입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흥미 있는 두 단어가 눈에 띈다. 책 제목에서의 ‘따지다’와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사람 대신에 주로 쓴‘인간’이라는 단어이다.‘따진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캐묻고 분명한 답을 요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기 주기 위하여 그것에 맞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책에서는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의 사례들이 나열되고 설명이 덧붙어져 있다. 교수, 선생님과 기자 제자 사이의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어쩌면 학생의 무지를 깨우치게 해야 하는 선생님의 도리를 통해 학문 세계는 넓고 배울 건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에서는 사람이라는 단어보다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인간(人間)의‘간(間)’이 틈새에 끼인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신(성경)과 자연 사이에 끼이고, 신학과 과학 사이에 끼인 그 틈새에서 고민하는 모습이랄까? -물론, ‘틈새의 하나님’의 개념과는 무관하게- 하여튼, 인간은 틈새에서 제 갈 길과 방향을 잘 잡고 살아야 만 한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신이 신인지 자연인지 그것도 아닌 그 중간자인지를 알아야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따지기 위해서, 방향을 잘 잡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배워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제대로’알기(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제대로 배워서(알아서) 더 다양하고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어떤 면에서 나의 공부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고 이 공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은 이를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이 책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로 대척점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두 주장은 굳이 상호 모순될 필요가 없다는 열린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서로가 가진 주장을 활발하게 토론하고 논증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각자가 한 견해를 선택한 후 분명히 기억할 점은 다른 기독교 견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의견을 가진 크리스천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생각은 존중받아야 한다.
창조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성경’이라는 신앙심과 과거의 교과서 게재(창조론)를 위한 법적인 노력들은 존중한다. 그리고 로버트 클라크의 사례를 교훈삼아 반증을 위한 반증보다는 더 수학적이고 정량적인 논증을 통해‘과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들이 과학적 논증을 통해 과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응원한다. 그러나 저자의 우려대로 과학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창조 과학 때문에 기독교 신앙 자체도 마치 과학 앞에 비웃음을 사야하는 책임을 창조과학이 져야할지도 모른다.

오랜 지구론에 의하면 우주 나이는 140억년, 지구 나이는 40~50억년이 되었다고 한다. 굳이“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나‘평범성의 원리’를 차용하지 않더라도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그 인과 관계를 밝히는 과학적 방법은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왜냐하면 현재까지는 우주의 신비를 밝힐,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잣대만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우주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과학이라는 도구로 증명해보이지 못한다고, 신이 있다! 없다!를 단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하다. 바꾸어 말하면 무신론 과학자들이 스스로 과학교를 맹신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고 믿는 것도 믿는다고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이해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이 상황에 따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별개의 영역에 가깝지만.

신의 특별 계시인 성경일지라도 결국 인간의 언어로 쓰였다. 인간의 언어로 쓰였다는 말은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적 도구로서의 언어는 그 시대와 문화 그리고 그 사회의 발달 수준을 나타낸다. 재미난 예를 들어 하나 들어보자. 우리나라 개화기, 서양의‘캐첩’을 처음 들여와 서양 선교사가 캐첩을 조선 사람에게 먹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을 연상해보자. 캐첩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조선인에게 캐첩을‘서양고추장’이라고 설명했다고 하자. 전달하는 사람은 처음 경험하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적절한 비유법이라고 썼지만 거기에는 왜곡과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비유는 아무리 잘 표현되어도 캐첩이 고추장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쓴 창조 기사 역시, 고대근동지역의 그 시대 세계관을 드러낸다는 말은 유효하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해석의 문제’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자신들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따라 정해놓은 결론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여 짜맞추기하지는 말자. 그리하여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떠나보내고 과학과 신앙이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또 만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과학이 신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중 하나도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점검 해봐야 한다. 그 이유는 건전한 과학과 건전한 성경 해석은 항상 조화롭기 때문이다." (106쪽)
- 휴 로스(천문학자이자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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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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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승리법?

이 책은 아큐(阿Q)라는 한 남자가 중국의 신해혁명 전후의 격동기를 비루하게 살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정전(正傳)형식으로 풀어낸 중편소설이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비록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산다 해도 고작 보잘것없는 본보기나 구경꾼 노릇만 할 뿐 아닌가? 병들거나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런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은 저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그리고 정신을 고치는 데는 문학과 예술이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 했다.” 는 것이 작가가 이 소설은 쓴 동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의학을 전공한 루쉰, 그러나 우연히 본 사진 한장-동포가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데도 구경꾼으로 서있는 중국 군중들의 모습이 담긴-으로 중국인의 육체가 아닌 중국인의 정신을 고쳐야겠다는 일념으로 의사의 길을 접고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아Q의 ‘정신 승리법’은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중국인들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중화사상에 갇혀 있는 중국인들의 폐쇄적인 정신을 이 소설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실패로 끝난 신해혁명, 중국의 변화를 기대했던 루쉰의 좌절의 끝에서 이 책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치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속을 해치는 치장은 속을 더욱 부실하고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겉은 속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종착지여야한다. 지나치게 보이는데 천착하면 남는 건 허망함일 뿐이다.

소위 '정신 승리법'을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무기력이 불러오는 자기합리화이다. 계속 당하면서도 지금의 괴로움보다 더 큰 고통을 상상하면서 무기력하게 그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끝은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이름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지와 무기력은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실소를 자아낸다.

그 불쌍하고 어리석은 아Q의 마지막은 누명으로 인한 죽음이다. 아니 죽임이다. 무지와 오해의 끝은 자신의 생명조차 지킬 수 없다. 알고 눈감아주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엄밀히 다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상황이 어렵고 급박할수록 정신줄은 놓지 말아야 살아날 길이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신의 갈 바를 알아, 현명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만 이겨 자기합리화와 자기기만에 빠지지말고 진짜 싸워야할 대상과 당당히 싸워 승리해서 완전한 정신 승리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러다 때로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참된 정신이 살아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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