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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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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뻬Le mal du pays, 향수병〉를 들으며 하루키가 상상력을 동원해 소설을 만들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난 직후의 소감입니다. 느낌은 음악처럼 슬프고 소설처럼 쿨하고 산뜻합니다.

 

 

아무런 색채가 없는, 당연히 개성이 없는, 이성적異性的으로는 물론 이성적理性的으로도 누군가의 관심을 끌 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곁에 있건 없건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이 사실을 다자키가 알게 되는 것은 네 명의 친구와 헤어진 지 16년이 지난 삼십대의 한 복판에서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배타적인 절친 이너 써클의 친구들,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하양), 구로(까망)와는 달리 주인공 다자키의 이름에는 색깔을 가리키는 글자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교묘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하루키는 그의 이름에도 장치를 합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이지만 그가 주인공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겠지요, 다자키의 이름에는 다른 의미의 글자를 넣었습니다. ‘쓰쿠루’입니다. 〈作만들다〉, 색채가 없는 대신 다자키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루키가 줄곧 고딕체로 강조하며 쓰는 낱말의 하나처럼 〈정말로〉다자키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 또한 16년이 지나서 확인한 일이지만 색채가 없는, 무덤덤한, 스스로 생각해도 있으나마나한 존재 같았던 다자키, 아니 쓰쿠르, 실은 그가 5명의 절친 그룹을 지탱할 수 있게 한 중심이었고 보호막이었습니다.

 

〈4色 + 1作〉.

 

네 가지 색을 가지고 고등학교 시절의 빛나는 모임/추억을 빚어낸 사람이 바로 ‘만드는 사람’ 쓰쿠루였던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나고야를 떠난 사람은 럭비선수 출신의 씩씩한 아오도, 수재형 똘똘이 아카도, 수의사 지망생이지만 날카로운 메스를 들고 개의 배를 가르고 말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감성적이고 지나치게 민감한 시로도, 자립심 강하고 터프한 성격에 말이 빠르고 머리회전도 그만큼 빠른 구로도 아니었습니다. 도쿄로 떠난 사람은 바로 쓰쿠루였습니다.

‘만드는 사람’ 쓰쿠루가 빠진 이 절친 모임은, 나고야에 남은 네 가지 색채의 사람 누구도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균형추가 빠진 기계처럼 삐걱거린다는 것을 느낌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색채는 빛나면 되는 것이지 조절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쓰쿠루가 빠진 결과는 뻔한 것이었겠지요. 삐걱거리는 이 모임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민감한 시로였을 것이고 사달이 나는 것이 거기였을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전후 사정은 끝까지 알려지지 않지만 시로는 실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하고 유산을 합니다, 그리고 서른 살에 교살 당합니다. 시로는 자기를 강간한 사람으로 쓰쿠루를 지목합니다. 절친 그룹의 아카, 아오, 구로 누구 하나 이것을 믿지 않지만 시로가 원한다는 핑계로 쓰쿠루를 그룹에서 제명합니다. 이제 쓰쿠루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다자키입니다. 세 명 가운데 아무도 다자키에게 제명시키는 까닭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전개에서 난처한 하나의 지점이기도 한데 전후 사정을 밝힌다면 소설은 더 이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고 까닭을 말하지 않고 그냥 제명한다고 통보하는 것으로 그치는 일은 그간의 그들 사이의 관계에 미뤄볼 때 지나치게 인위적입니다. 이 난처한 지점에서 하루키는 후자를 택하면서도 인위적 인상을 씻어내는데 이 지점은 우리가 뛰어난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의 자질을 확인하는 지점이 되기도 합니다.

 

소설은 대학교 2학년 후반기, 고등학교 시절의 절친 그룹으로부터 절교 선언을 받고 약 반년 간을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강렬하게 죽음에 이끌렸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에게서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는 절교 선언을 받았다. 단호하게 가차 없는 통고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초반의 이 대목들로 이 소설은 미스테리 소설의 특징을 약간 도입한 셈입니다. 〈뭔가 있다〉하는 궁금증을 독자에게 주입시킵니다. 이 미스테리 소설의 기법, 하루키가 난처한 지점을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금 앞으로 돌아가면 ‘만드는 사람’ 쓰쿠루가 빠진 이 모임이 불편했던 것은 시로 뿐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시로에게서 났다 뿐이지 모두가 이 모임을 깨고 싶었습니다. 나고야를 떠났지만 아직도 자기 자리를 모임 안에 굳게 차지하고 있는 쓰쿠루, 부재중이면서도 여전히 함께 하는 쓰쿠루, 그렇다고 명실 공히 함께하는 것도 아닌 이 엉거주춤한 모습, 모두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위적이어서 소설의 품격을 치명적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는 이 막무가내 절교 선언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 맥락도 한 몫 합니다.

 

막무가내 절교 선언의 내막에 독자들이 조급해 하도록 하루키는 하이다, 하이다의 아버지 그리고 신비로움으로 포장한 녹색 인간 미도리카와를 등장시킵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들의 그 조급증이 절정에 다다를 때쯤 사라가 등장하면서 그 절교선언의 내막은 그 뚜껑이 열립니다. 아오와 아카를 만나면서 내막의 배경은 설정되고 핀란드에 가 있는 구로를 만나 내막의 핵심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16년간이나 꼭꼭 숨어있던 내막이라기에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강간이나 교살이 갖는 음습한 구석은 전혀 없이 깔끔하게, 하루키가 좋아하듯 쿨하게 드러납니다.

 

다자키는 자기에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항상 자신이 없었고 언제나 ‘텅 빈 그릇’같이 느껴왔다고 말하는데 색채가 아닌 이름 에리로 돌아간 구로는 말합니다.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스무 살 무렵 막무가내 절교선언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7개월을 지나면서 다자키가 성년이 되었다면 감춰진 내막, ‘잃어버린 세계‘를 찾으면서 다자키는 성인이 됩니다. 아마 사라와의 관계 설정(소설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한 밤중 전화가 온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이 어떻게 되던 이제 성년의 순간에서 성장을 멈췄던 다자키는 자립한 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19〉장은 아직도 할 말을 다 못한 하루키가 설명조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자리이고 아끼고 아끼던 마무리 말로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입니다.

 

가야할 장소.

향해야 할 장소.

우연히 주어진 장소.

돌아가야 할 장소.

 

하루키는 이 ‘장소들’을 가지고 이 소설을 또 다시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지나치게 떨어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마무리는 원래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구로 아니]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말,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고 화자/하루키는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하루키가 이 소설의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소설 속에는 내가 이 북 리뷰의 제목으로 사용한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이 말은 사라가 소설의 전반부에서 쓰쿠루에게 한 말로 쓰쿠루는 이 말을 아카, 구로에게 말함으로써 소설 안에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루키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고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맞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개인들의 삶은 더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하나인데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나 내용은 사람 따라 다 제 각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에 영향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따라 영향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상처를 입습니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 내용이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성숙의 수준이 기억 내용을 넘어 역사적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어쨌든 기억 내용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더 깊은 천착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이 소설이 그 부분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흔쾌하지가 않습니다.

 

통찰력, 투시력을 지닌 사람들, 눈이 밝고 맑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너절하고 음습하고 참혹한, 쓰레기더미 같은 전 세계적 현실을 개탄합니다. 〈공공성〉이 문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일 터, 신간이 나올 때마다 전 세계적 주목을 받는 하루키가 어째서 이런 현실에 눈 감고 새로울 것 없는 성장소설, 사소설을 반복하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하루키의 글 솜씨라면 어떤 장르의 소설에라도 이 전 세계적 현실의 실체를 자연스럽게 녹여 넣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안타깝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나이 들면 감각sensibility은 떨어지고 감상sentimentality만 는다고. 나이 들면서 정말로 경계해야 할 일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소설도 그런 우려는 충분히 불식시키고 있습니다. 실험적이지도 않고 세상의 참혹한 실체를 들여다 볼 기회도 만들어 주지 않은 소설이지만 읽고 나서 별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60대 중반이면서도 늙지 않은 그의 차기 소설에 대한 여전한 기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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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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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리라 - 북 리뷰

 

좋은 글, 읽을 만한 글에 목마른 분들께 강추합니다

 

황현산 - 밤이 선생이다(난다, 2013)

 

 

 

 

문학평론가 황현산 명예교수(고려대 불어불문학과)가 산문집을 냈습니다. 2009년부터 작년까지 4년간 〈한겨레〉의 〈삶의 창〉에 실었던 글이 태반을 이루고 2000년대 초에 〈국민일보〉에, 지난 세기인 1980년대 중반 〈강원일보〉에 실었던 칼럼이 나머지입니다. 3부로 돼 있는 이 책의 〈제2부〉는 이 책을 위해 쓰인 글일 텐데 사진작가 구본창과 강운구의 사진 다섯 작품을 놓고 작품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기억의 세계에서 끌어온 삽화들과 연결시켜 상상의 세계에서 맛있게 버무려 빚은 다섯 편의 산문으로 돼 있습니다.

 

황현산 교수의 이 산문집을 읽으며 남다른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기에 오늘은 호칭을 현산 형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난 게 대학에 들어가는 1969년이니(형은 65학번입니다) 올해로 44년째입니다. 한 독서서클에 입회했는데 현산 형과 65학번 동기들이 만든 서클이라는 것은 들어가서야 알았습니다. 형이 번역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나는 희미하지만, 맨날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나를 억지로 붙들어다 형이 군 입대하기 전 잠깐 근무했던 어학교육원에 앉혀놓고 불어를 가르쳐주던 일은 생생합니다. 어찌된 셈인지 프랑스어 쌩 초보 1학년에게 형이 텍스트로 쓴 게 카뮈의 《페스트》였는데 그 때 형이 준 갈리마르판 《페스트》는 평생의 기념물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글들은 미발표작들인 〈제2부〉(이 부분은 따로 한번 다룰 생각입니다)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기왕에 읽은 글인데 다시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 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책을 펴내며〉의 이 글에서 말하는 ‘그리움’과 ‘사랑’과 ‘꿈’은 현산 형에게 글을 쓰게 만드는 바탕이며 원동력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바탕과 원동력에는 평생 변화가 없습니다.

 

불문과 출신들이 쓰는 글은 묘한 공통점이 있어, 글 시작을 대부분 자기 또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해,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이번에 형의 산문집을 통째로 읽으니 그런 글쓰기의 전형이 바로 현산 형이었구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형의 글이 거대담론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정언명령으로 시작하는 일은 없습니다. 형은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당신의 사소한 사정〉)고 말할 정도입니다. 좋은 글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추상적 명제를 만들도록 하지 추상을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구체적인 사실들을 늘어놓도록 하지 않습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난 그해 5월말 〈중앙일보〉에는 그 신문사 논설위원이며 정치전문기자가 쓴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이 실렸고 며칠 후 〈한겨레〉에는 현산 형이 쓴 〈나는 전쟁이 무섭다〉가 실렸습니다. 그때 나는 〈인문학 고전 읽기와 쓰기〉 교양 강의시간에 이 두 글을 학생들에게 읽게 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두 글을 함께 읽었는데 당시 학생들의 반응이 틀리지 않았으며 그 까닭이 내용뿐 아니라 글쓰기 방식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경직된 글과 유연한 글, 추상과 구체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엔 막강한 민간인 부대가 있다. 강릉 앞바다 잠수함을 신고하고 속초 앞바다 잠수정을 그물로 잡고 천안함 함미를 발견하고 어뢰 파편을 건져 올린 이가 모두 민간인이다. 국민이 단결하면 생화학이나 특수부대에 대처할 수 있다......전쟁을 결심할 수 있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 국가의 능력을 알면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김진,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은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황현산, 〈나는 전쟁이 무섭다〉)

 

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이만큼 구체적이며 서정적으로, 슬프고 아프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 책에 실린 글들, 형의 글들의 독창성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며칠 고심했는데 결국에는 형이 한 말로 형의 글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의 편향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혼신의 힘을 모둔 결단의 말들과 함께 오랫동안 신중하게 주저하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비명과 탄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배어나오는 말들이나 그것들을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말이 거칠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한 정신이 비범한 평정상태에 이르러 그 지경을 모방하여 얻어낸 유려한 말들에 나는 종종 귀를 기울였지만 그보다는 그 상태를 증명해주는 다급한 말들의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장난치는 말들, 판을 깨는 말들도 좋아했다. 하던 일을 진중하게 계속하는 사람은 늘 찬양을 받아야 하지만 때로는 손에 쥔 것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기약 없는 땅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용기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 말들은 어김없이 순결하다.”(《말과 시간의 깊이》의 〈책머리에〉)

 

이 책의 제목 《밤이 선생이다》, 형의 이메일이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오래 전부터 ‘밤이 선생이다’가 올라있습니다. 워낙 한밤중에 일하는 형인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이성을 불신하고 상상력을 따르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형이 몇 줄 뒤에서 지적했지만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습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입니다.

 

이 책의 제사는 ‘천 년 전부터 당신에게......’입니다. 속지 뿐 아니라 잘 디자인 된 표지 왼쪽 하단에도 눈 밝은 사람들에게나 띌까, 8포인트 정도의 작은 글자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마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더 쉽게 말해 형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올곧은 것들을 정확하고 예리하지만 따뜻한 글로 전하고 싶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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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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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2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12

 

얼마 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목수정 작가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1940- )의 자전적 작품들을 묶은 《삶을 쓰다Ecrire la vie》(Gallimard, 2011)를 소개하면서 까칠한 멘트를 날린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끼오스끄(가두판매대)에서 더 많이 팔리는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버젓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로 행세하고 있다고. 베르나르 베르나르와 아멜리 노통(브)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목수정 작가는 아니 에르노가 프랑스 현대 작가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됐으면서도 의외로 알려지지는 않은 작가라는 지적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가 한꺼번에 다시 번역돼 나온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이 두 권은 1988년 한 권으로 묶여 나온 적이 있습니다.《아버지의 자리》(《어떤 여인》동시 수록, 홍상희 역, 책세상, 1988)라는 이름으로. 1995년까지 7년 동안 여섯 번 재판을 찍었는데 상대적으로 고급 독자들, 작가들에게 많이 읽혔습니다. 2000년대 들어 절판돼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어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도시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서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내 자식만은 공부를 시켜 반듯한 직업을 가지고 보란 듯 삶을 살게 하겠다는 부모의 바람에 따라 딸은 대학을 갑니다.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대학 출신의 남편을 얻습니다. 중산층 사회로 편입된 것입니다. 이제 딸은 부모가, 부모가 속해 있는 사회계층이 불편합니다. 그들의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도 역겹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엄마, 아버지 이야기는 개인적인 이야기, 집안 이야기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못된 아버지인지 알았는데 실은 아니더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름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더라, 어머니 이야기도 마찬가지. 출산/생의 비밀, 기막힌 불화의 원인, 그리고 화해.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 두 작품 모두 부모가 돌아가신 뒤 과거로 돌아가 불화하던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은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개인들의 온갖 사정들, 천박하든 우아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아늑하든 으스스하든 인간들의 문제는 개인적인 까닭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까닭에서도 반쯤은 연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에르노의 작품들은 깨닫게 해줍니다.

 

에르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찌든 삶〉속으로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인데, 왜 그들이 어색한지, 그들과의 관계가 왜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알아보려고.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 그들이 사용하는 불편한 말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그 속에는 어머니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있습니다. 지금의 내 중산층 삶의 원천이 바로 그〈찌든 삶〉입니다. 내 세련된 말투의 뿌리가 실은 그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그 때의 삶을 배반한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찌든 삶〉을 지금의 삶에 영입시킨 것입니다.

 

《한 여자》의 마지막 대목.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릐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110면)

 

덧붙이는 글 :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를 읽은 분들께서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북 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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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는 사랑과 받는 사랑

 

 

2001년 1년을 나는 프랑스 중동부의 아름다운 고도古都 디종에서 보냈다. “한껏 자유롭게, 한껏 외롭게, 한껏 책이나 읽자”는 생각으로 지낸 1년이었다. 4월의 어느 날 《피가로》지 북섹션에 나타난 작가 한 사람이 망각의 세계에 묻혀있던 내 젊은 날의 떨림을 기억의 세계로 불러냈다.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lers(1917-1967). 그날 《피가로》는 빠리에서 미국의 여류작가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lers의 미완의 자서전 《영감과 불면의 밤들》(Illuminations et nuits blanches, 영어제목은 Illumination and Night Glare로 1999년에 출간되었)이 번역, 출판된 일을 크게 다루고 있었다. 10/18의 문고본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카슨 매컬러스가 남편 리브스와 주고받은 편지들, 프랑스에서 출간되지 않은 3편의 단편소설이 함께 묶여 있다.

프랑스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한 듯 이 책이 번역 출간되자 《피가로》지는 ‘문예’면의 한 페이지 반을 할애해 로맨틱한 분위기가 한껏 연출된 사진들과 함께 그의 삶과 작품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는 같은 날 ‘문예’면에 막 출간된 프랑스의 대 문호 앙드레 지드의 플레이야드판 《회상과 기행》 출간 소개에 반 페이지만을 할애한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랄 수 있다.

나는 서점으로 가 이 책과 함께 그의 대표작 《슬픈 카페의 노래》(La Ballade du Café triste, 영어제목은 The Ballade of the Sad Café, 1951)를 구해서 읽었다. 프랑스어로 읽는 《슬픈 카페의 노래》에 나오는, 젊은 시절 내 영혼을 사로잡았던 통찰력에 빛나는 ‘사랑의 분석’은 참으로 오랜만에 ‘흔들리는 섬광’으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마을 자체가 황량하다(......) 쓸쓸하고 슬프고 세상의 다른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소외된 것 같다(......)딱히 할 일이 없다면 폭스펄즈 고속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이야기나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로 시작해 ‘일단’ “그렇다, 마을은 황량하다(......) 영혼은 지루함으로 점점 부패해 간다. 폭스펄즈 고속도로로 내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이야기나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은 배경만큼이나 기이한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한 카페가 있는데 마을의 황량함을 어느만큼은 덜어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사실 그곳이 처음부터 카페는 아니었다. 키가 크고 골격이나 근육이 남자 같으며 짦은 머리를 뒤로 벗겨 넘긴 사팔뜨기 미스 아멜리아가 아버지로부터 이 건물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주로 사료와 비료, 곡식이나 코담배 같은 것을 파는 생필품 가게였다. 술도 팔았다. 미스 아멜리아는 그 도시의 골목 깡패인 마빈 메이시와 결혼한 적이 있는데, 그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근육질의 몸, 잿빛 눈, 곱슬머리를 갖고 있는 이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또한 그는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평판이 고약한 “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으면서도 얼굴값 하느라 주위에 꼬여드는 젊은 아가씨들을 여럿 망신시킨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마빈 메이시가 미스 아멜리아에게 반한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사람이 성실하게 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혼 첫날밤부터 각방을 쓰고 마빈 메이시의 노력에도 이 결혼은 열흘만에 끝난다. 그리고 마빈 메이시는 마을에서 사라진다. 악명높은 범죄자가 돼 결국은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어느 날 이곳에 아멜리아의 먼 친척임을 내세우는 사촌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는 볼품없는 꼽추이다. 키는 140센티미터 남짓에 가늘고 휜 두 다리는 너무 가늘어 그 구부정한 가슴과 어깨 위에 얹혀 있는 혹의 무게를 지탱하기 조차 힘들다. 머리통은 너무 컸고 움푹 들어간 두 눈에 작은 입술 윤곽이 뚜렷했다. 얼굴은 양순해 보이면서도 좀 뻔뻔스러운 구석이 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미스 아멜리아는 라이먼을 내쫓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게는 이 마을의 중심이 된 카페로 탈바꿈 하는데 여기에는 라이먼이 지니고 있는 특이한 성향, 평범한 사람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자질이 한몫 톡톡히 한다. 그는 “보통 어린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성향,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들 사이에 즉각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

이 카페는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겨울밤에도 따뜻하고 아늑해서” 이 마을의 중심이 되었는데 불빛이 어찌나 환한지 5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카페가 마을의 중심이 된 것은 이런 따뜻함이나 실내 장식들, 그리고 밝은 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카페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모종의 자부심과 관계가 있다. 이 새로운 자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란 결국 값어치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생은 단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하나의 길고 어두운 싸움일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그렇듯 모든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으레 값을 치러랴 하고, 오직 돈으로만 살 수 있다(......)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값도 매겨져 있지 않다.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고 아무런 값도 매겨져 있지 않다(......)삶의 가격은 얼마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때때로 삶이란 전혀 가치 없거나 만약 있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내가 처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결국 가치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그런데 이 카페는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 아이들에게까지 “새로운 자부심”을 심어준다. 이 카페에 오기 위해 단돈 1센트만 있어도 되지만 사람들은 이 카페에 오기 전에 세수를 하고 정중하게 문지방에서 신발을 털었으며 아이들조차 예의바르고 조심성 있게 행동했다. “카페에 있는 동안만은 단 몇 시간 동안이라도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쓰라린 생각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어느 날 형무소에 있던 마빈 메이시가 출옥하여 이 마을로 돌아온다. 라이먼은 미스 아멜리아의 애원에도, 마빈 메이시의 경멸에 찬 홀대에도 메이시의 마음에 들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라이먼의 뜻대로 메이시는 미스 아멜리아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아멜리아와 메이시 사이에 생사를 건 결투가 벌어진다. 미스 아멜리아의 승리가 목전에 있는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비명이 카페 안을 뒤흔들었다(......) 미스 아멜리아가 마빈 메이시의 목을 조르던 순간 꼽추는 앞으로 튀어 올라서 마치 매의 날개라도 단 듯 공중을 가로 질렀다. 그는 아멜리아의 널찍하고 단단한 등에 뛰어내려 사나운 짐승의 발톱같이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난장판이 벌어지고 구경꾼들이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싸움은 꼽추로 인해서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난 후였다. 그날 밤, 마빈 메이시와 라이먼은 카페의 귀중품을 챙겨 사라진다. 사탕수수 시럽, 과일 잼, 증류기, 응축기, 냉각기 등등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못 쓰게 만들었다. 그 후 미스 아멜리아는 멍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의 폐인이 되고 카페는 문을 닫고 마을은 예전의 황량함으로 되돌아간다.

이들의 삼각관계에 대한 카슨 매컬러스의 ‘사랑의 분석’은 이렇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체험이다. 그러나 함께 하는 체험이라는 게 두 사람이 똑같은 체험을 한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이 있지만 완전히 별개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도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반드시 결혼반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젊은 남자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 아이,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 얘기해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어서도 20년 전 어느 날 오후, 치하 거리에서 스쳤던 한 낯선 소녀를 가슴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녀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목사가 타락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 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 가는 데에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 것 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순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의 가치든 사랑의 질이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려는 게 바로 이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데 그럴만한 큰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최소한의 어떤 관계라도 맺으려 열망해 끊임없이 그를 홀딱 벗기려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통만 있더라도.”

아멜리아는 라이먼을, 라이먼은 메이시를, 메이시는 아멜리아를 사랑한다. 동시에 라이먼은 아멜리아를, 아멜리아는 메이시를, 메이시는 라이먼을 증오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갈라지는 한 사랑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행위는 사랑과 증오로 이뤄진다. 이게 내가 젊은 시절 이 작품을 읽은 방식이다.

한 때 이 마을에서 황량함을 걷어냈던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아멜리아가 직접 빚어내는 술이다. 아마도 〈술에 대한 경배〉로 이만한 대목이 또 있을까.

“미스 아멜리아의 술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게 있다. 혀끝에서는 정갈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내고, 일단 뱃속으로 들어가면 화끈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백지 위에 레몬 즙으로 메시지를 쓰면 글씨가 보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종이를 잠시 동안 불에 대고 있으면 글씨가 갈색으로 변해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 볼 수가 있다. 위스키가 바로 그 불이고 메시지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쓰인 글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아멜리아가 만든 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무심히 흘려버렸던 일들, 마음속 깊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직조기와 저녁 도시락, 잠자리, 그리고 다시 직조기, 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방적공이 어느 일요일에 그 술을 조금 마시고는 늪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우녕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그 꽃을 올려놓고 황금빛의 정교한 꽃받침을 살펴볼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고통처럼 날카로운 향수가 일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눈을 들어 1월 한밤중의 하늘에서 차갑고도 신비로운 광휘를 보고는 문득 자신의 왜소함에 지독한 공포로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 아멜리아의 술을 마시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을 느낄 수도,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이 경험들이 보여주는 것은 진실이다. 그 술을 마시면 영혼이 따뜻해지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의 마지막에는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사형수들이 한 쇠사슬에 함께 묶여 노역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12명의 사형수들’이 붙어 있다.

“폭스펄즈 고속도로는 마을에서 4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이 일하고 있다(......)죄수들은 동이 트면 교도소 호송차에 실려 와 떼 지어 내렸다가는 8월의 잿빛 황혼이 드리워질 때 다시 짐승 몰이 하듯 몰려 차에 실려 가버린다. 그곳에서는 온종일 진흙땅을 파는 곡괭이 소리, 강렬한 햇빛, 그리고 땀 냄새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매일 노래가 있다. 누군가 침울한 목소리로 콧노래 비슷하게 한 소절을 시작하면, 마치 질문에 대답하듯 얼마 후 다른 목소리가 어울리고 곧이어 모든 죄수들이 합창을 한다. 노랫소리는 눈부신 황금빛 햇살 속에서 더욱더 우울하게 들리고 그 가락에는 슬픔과 즐거움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그 소리들이 열두 명의 죄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또는 드넓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고 희열과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노랫소리가 잦아들어 한 가닥 외로운 선율만 남게 되면 다시 침묵 속에 거친 숨소리와 태양, 그리고 곡괭이 소리만 남을 따름이다.” 이 부분을 에피소드로 읽을 경우와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읽을 경우 작품의 의미는 크게 갈린다(젊은 시절에는 이 부분을 놓치고 읽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매컬러스는 1959년의 한 글에서 정념에 찬 개인적인 사랑(옛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이 형제애(아가페적인 사랑), 남자들의 사랑보다 열등하다면서 "《슬픈 카페의 노래》에 등장하는 미스 아멜리아가 보여주는 꼽추 라이먼 사촌에 대한 기이한 사랑에서 내가 보여주려고 애썼던 게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에는 이 작품을 “도시 자체는 황량하다......이 도시에서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까지만 읽고 나머지는 에피소드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영혼은 지루함으로 점점 부패해 간다. 폭스펄즈 고속도로로 내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이야기나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들이 부르는 비통하면서 동시에 기쁨에 찬 노래는) 마음을 열게 하고 듣는 사람을 황홀함과 경악으로 꼼짝 못하게 하는 음악이다”를 지나 끝까지 읽고 특히 ‘12명의 사형수들’을 뒤에 붙인 까닭을 곰곰이 따져 보는 식으로 읽는 방식을 달리 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12명의 사형수들은 이 지방 출신의 흑인 일곱명과 백인 다섯명이다. 아마도 매컬러스는 흑백의 화합을 갈망했으리라. 책읽기는 읽을 때 마다 서로 다른 작품 해석의 한 방식이다.

《영감과 불면의 밤들》에는 미국 남부 지방 출신의 매컬러스가 흑인문제를 흑인의 입장에서 다룸으로써 KKK단의 위협을 받은 일이 나와 있고 흑인 작가 리차드 라이트가 매컬러스야말로 백인에 대해 말할 때처럼 흑인에 대해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남부 작가라고 평가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글을 쓸 수 없어 (50세의 나이에!) 구술로 만들어진 《영감과 불면의 밤들》은 매컬러스 자신 뿐 아니라 작가들의 천형과도 같은 저주받은 삶을 절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날 떠오르는 계시와도 같은 영감은 그의 체험과 절묘하게 결합하여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뒤따르는 삶의 고통은 불면의 밤으로 이어진다.

영감의 순간과 불면의 밤이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같은 세계의 겉과 속이라는데 작가들의 비극이 있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마지막에서 비프 브래넌을 통해 ‘일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한 적이 있지만 매컬러스는 《영감과 불면의 밤들》에서도 자기의 삶이 ‘일’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책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작품의 영감 그리고 갑자기 찾아오는 고통스런 삶’의 다른 말이며, “그의 삶을 드러내는 행복과 고통의 연쇄”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 인용은 장영희 교수가 번역한 열림원(2005)판을 쓰고 부분적으로 손을 봤다. 이외에도 정현종(문예출판사), 안동림(신구문화사), 윤시원(산호)의 번역본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을 함께 읽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카슨 매컬러스의 다른 작품도 번역돼 있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공경희 옮김, 문학세계사, 2005), 《고딕소녀》,(엄용희 옮김, 열림원, 2006), 단편집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이소영 옮김, 열림원, 2008).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북 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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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예찬 - 문학에 나타난 그리움의 방식들 예찬 시리즈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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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철, 《애도예찬》, 현대문학, 2012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왕은철 교수가 2010년 봄부터 2011년 가을까지《현대문학》지에 〈사랑과 죽음, 그리고 애도〉라는 꼭지로 연재한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애도예찬》입니다. 왕 교수는 문학이 애도의 한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애도하는 방식을 다룬 이 책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등,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세익스피어의 《햄릿》,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등 열일곱 명의 작가 또는 그들의 작품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봅니다.

 

캐서린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히스클리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애도의 거부”입니다(《폭풍의 언덕》). 사랑하는 사람 모리스를 살려만 준다면 그를 포기하는 일을 포함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세라,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줍니다. 그는 살아 돌아옵니다. 세라는 그 일이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그를 만나서는 안 되니까요.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세라는 급성폐렴으로 죽습니다. 이제 애도는 모리스의 몫입니다. “진정한 애도는......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벽장’ 속에 고스란히......남겨두는 것일지” 모릅니다(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끝》).

 

프로이트는 애도란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고 자유로운 리비도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헤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 속에 남겨두고 다시/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인지요. 사랑하던 사람을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해버리고 나서라면 몰라도 기억 속에 그 사랑의 흔적을 온전히 남겨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왕 교수가 다룬 작품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애도에는 끝이 없습니다. 애도기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틈만 생기면 여지없이 찾아드는 게 애도입니다. 허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생긴〈구멍〉이 어찌 메워지겠습니까, 메워진 듯 보일 뿐이지.

제가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으로 시작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다룬 〈슬픔의 깊고 큰 구멍-적군을 사랑한 한 여성의 애도〉를 이 책의 백미로 꼽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2010년 가을에서 다음 해 이른 봄까지 한국에서 구제역으로 매몰된 소, 돼지는 3백만이 넘었고, 조류독감으로 매몰된 닭, 오리는 5백만이 넘었습니다. 살처분, 생매장의 현장은 끔찍했습니다. 애도의 대상이 인간만은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쿳시의《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다룬,〈존재가 존재에게 남기는 空洞-홀로코스트와 동물들을 위한 애도〉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미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고 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은 석 달 또는 3년이 지나면 웬만큼은 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열정적인 사랑에 이르는 것은 도파민, 페닐에텔아민, 옥시토신 같은 호로몬 덕분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길게 잡아도 3년을 안 잡습니다, 이들 호르몬의 역할이 끝나고 또 이들에 대한 항체도 생긴다고 합니다. 이제 가슴은 뛰지도 않고 사랑은 시들해집니다.〈애도기간〉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는 것으로 보면 이런 유물론적인 주장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지 모릅니다. 금슬 좋았던 부부들 가운데 한 편이 세상을 뜨는 경우가 그렇지 못했던 부부들의 경우보다 재혼율이 높다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왕 교수의 지적처럼 애도를 다루는 거의 모든 문학작품들이 애도기간은 무한정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프로이트의 주장, “애도란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고 자유로운 리비도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문학작품 속에서와는 달리 우리의 현실에서는〈애도기간〉이 유한한 경우가 많고, 유한한 애도기간을 갖는 사람들이 헤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말입니다. 호르몬 분비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는 엄연히 존재하고,〈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극단적이며 폐쇄적이며 자기 파괴적이기 까지 한 사랑, 끝까지 가야만 하는 사랑도 분명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의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 의 <북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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